일본 인터넷의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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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9-27 05:46 조회2,183회 댓글0건본문
일본 인터넷의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01)
인조이재팬네이버(http://j2k.naver.com/j2k_frame.php/korean/kumasan1127.cool.ne.jp/kuma/kirameki/land-story/lannd-history.htm)를 검색해 보면 2차례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을 일본측에서 분석하고 기록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자동번역된 것으로 오탈자도 많지만 당시의 전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연재하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 목 차
일본 멸망의 위기. .대몽고 제국의 내습
◇몽고 내습
1. 공전의 세계 제국 와 습
2. 문장 긴 역 이키·대마도의 싸움
3. 문장 긴 역 하카타만두의 싸움
4. 문장 긴 역 그리고 바다는 거칠어진
5. 홍안의 역 몽고는 그리고 온
6. 남송비 사계 멸망때
7. 니치렌 그 격렬한 생애
8. 아. .고려야
■ 처음에
세계는 , 제멋대로인 있고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기원 1206년 , 유라시아의 오쿠사원의 한쪽 구석에 탄생한 「대몽고국」은 , 징기스칸과 그 자손들에게 이끌려 , 유라시아 전역을 도토우 (와) 같이 질주 해 , 동쪽은 일본해로부터 서쪽은 도나우강 하구·아나트리아(현재의 터키 지방 전역)에 이를 때까지 공전의 거대 제국을 만들어냈다. 대몽고 제국의 성립이다.
후 에 , 오모토 제국이라고 칭하는 정복왕조의 출현은 , 지구상의 동서를 묶는 , 정리의 세계를 실감시키는 시대되었다. 전체상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사의 스타트가 되는 「몽고 시대」의 도래는 , 멀고 파 도를 넘은 동부지역 무사의 땅 「일본」을 진감 시키게 된다.
일본은 , 대외와의 전쟁이라고 하는 점으로 말하면 , 얼마인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몽고 내습 이전에 , 순수하게 국토 방위전을 싸웠던 것이 1회 있었다. 여진족의 내습이다.
1019년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전성 시대에 고려국의 북방으로 반거 한 여진족이 배로 고려 동해안을 덮친 뒤 , 키타큐슈에 와 구 했다. 소규모의 내습이기도 한 것을 잊고 떠나질 정도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400년 후 , 1419년에 이씨 조선국이 2000의 병선과 1만 7000의 군세를 가지고 대마도에 와 습 한 사건이 있다. 「오에이의 외구」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이것은 , 이씨 조선으로서는 한반도 동해안을 마구 망치는 왜구의 근거지를 두드린다고 하는 목적이기 때문에에서 만나며 , 일본과 일을 짓는 것 같은 것은 아니었다.
663년 , (쿠다라)백제를 구원한 일본군은 흰색촌강으로 신라·당의 연합군에 철저한 대패를 당했다.
이 싸움은 일부러 나간 것이다.
텐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 때의 야마토 조정은 진감 했다. 당으로부터의 침공을 예상했기 때문에이다. 그 공포는 , 침공 예상 루트에 따른 방위 라인을 정비하는 것에 향할 수 있어 , 봉화대나 미즈키의 구축을 재는 등 , 필사의 국토 방위에 근무했던 것이다. 행이라고 말해야할 것인가 , 당으로부터의 내습은 없었다.
이렇게 해 보면 , 타국의 대군단을 해 , 일본 열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 침공하는 것이 분별없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것을 잘 안다. 몽고 내습이 두 번에 건너 침공해 , 대전투를 펼쳐 국토 방위전을 싸운 것은 , 확실히 앙천의 사태였던 것이다.
두 번 있는 것은 세번 있다고 속담에 말한다.
일본은 , 몽고의 두 번의 침공을 격퇴해 , 이것에서 침략은 종결했다고 지금은 역사가 확정되어 있지만 그러나 , 당시 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생각되지 않았다일 것이다.
오히려 , 후세의 우리는 쿠빌라이가 세번째의 침공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던 것을 알고 있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불안은 여러번 내습의 공포와 위기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마쿠라막부는 , 내습에 대비해 , 방위를 위한 재원을 무리해서라도 조달해야 했다. 이윽고 , 가인의 궁핍은 심각함을 더해 가 세정은 어수선해 간다.
그 때문에 , 오모토 제국의 붕괴전에 가마쿠라막부 자신이 붕괴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 몽고라는 말에 가지는 이미지는 아마 , 「미개·야만·비문명」이라고 하는 배경이 있어 , 한층 더 내습된 기억으로부터 이끌리는 밉살스러운 감정의 것은 아닌가. 대마도·이키의 주민을 잔혹하게도 전멸 시킨 침략자의 이미지가 좋을 것이다 리가 없다. 「흉포해 인정 사정이 없는 잔학 제국」의 전에 「그야말로 약소 국가인 섬나라 일본」이 힘껏의 저항전을 싸웠다고 하는 과거의 참혹한 비장한 정경이 생각이 미쳐진다.
몽고군의 침략은 , 반드시 , 「살륙·파괴·약탈」이라고 한다 , 어떻게 시시한 어두움을 따라 말해진다.
근래의 연구에서는 , 확실히 그러한 면도 있지만 , 동서 고금 , 전쟁으로 학살이 없는 청결한 전쟁을 하는 군대등 있던 시험은 없고 , 현재에 가까운 과거의 전투에서도 많이 그 실례를 들 수가 있다. 그리고 , 몽고의 싸움의 뒤를 보면(자) , 몽고의 국토 확대 사고가 언제나 전쟁을 수반하고 있었는지라고 말하면 , 그렇게도 단언할 수 없다.
틴기스칸이 몽고 초원의 통일 사업을 일으켰을 때로부터 , 이상하게 싸우지 않는 군대였다.
키 인민의 수가 적었다. 만약 , 전투에 괴멸 하면 민족은 마지막이 될 정도의 물건이다. 그리고 , 후 의 강렬한 침략 행동을 가능으로 한 것은 모두 타민족을 전투 태세에 집어 넣었기 때문이다.
전투에 군대를 거느려 대치해도 , 전투에 이르는 것보다 , 지도자끼리의 논전을 전개해 뿐이 기울어지고를 쳐 합류한다는 것이 「유목민족」의 수법인 것 같다. 유목민은 농경민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수가 적다. 당연한 일이면서 , 세력은 수이며 , 아군에게 붙여야만 세력 확장이 순조롭게 간다고 하는 것이다. 몽고를 시작으로 하는 유목민은 결코 「무지 몽매의 야만인」은 아니었다.
제발 응이 라고도 , 다 죽여 버리면(자) , 거대 제국 등 성립 어쩔 수 없고 , 의미는 없다.
몽고군이 강했으니까 , 몽고 제국의 확대가 가능했다는 것 는 알기 쉽다.
그러나 , 실제로 전투를 섞은 예에서는 , 부득이 전투에 이르는 경우가 많이 있어 , 곤혹하는 것은 , 조금 찾으면 , 최강이라고 생각되는 몽고군이 깨져 있는 것이 눈에 띄는 것이다. 우선 , 전위 부대가 최초를 싸워 봐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고 하게 되면 , 오히려 , 빨리 철퇴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 당한 (분)편은 과장되게 대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여하에 잔학인지를 선전해 , 공포는 귀고리를 걸쳐 주위에게 전할 수 있다. 지켜야 할 아군의 군대의 불 보람없음을 몰아세우거나는 하지 않는다. 잔학인 군대를 많은 사람 정의의 군대가 왜 박살 당하지 않는가. .이상하지 않는가.
왜 , 그렇게 강렬한 학살군이 세계 제국이 되어 백년의 명맥을 유지했는지 , 맥락도 도착하지 않는다.
그러면 , 사상 공전의 국토 방위전의 시대에의 여행을 떠나고 걸칩시다.
▣ 김윤만 - 좋은 싸이트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1419년 조선국의 대마도 와습이란 것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 김항용 - 좋은 사이트를 찾아 주셨습니다. 그동안 일본과 중국(원)의 역사 자료를 찾으려 일본과 중국의 여러 사이트를 찾아 헤맸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출처 감사합니다. 틈나는 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인조이재팬네이버(http://j2k.naver.com/j2k_frame.php/korean/kumasan1127.cool.ne.jp/kuma/kirameki/land-story/lannd-history.htm)를 검색해 보면 2차례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을 일본측에서 분석하고 기록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자동번역된 것으로 오탈자도 많지만 당시의 전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연재하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 목 차
일본 멸망의 위기. .대몽고 제국의 내습
◇몽고 내습
1. 공전의 세계 제국 와 습
2. 문장 긴 역 이키·대마도의 싸움
3. 문장 긴 역 하카타만두의 싸움
4. 문장 긴 역 그리고 바다는 거칠어진
5. 홍안의 역 몽고는 그리고 온
6. 남송비 사계 멸망때
7. 니치렌 그 격렬한 생애
8. 아. .고려야
■ 처음에
세계는 , 제멋대로인 있고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기원 1206년 , 유라시아의 오쿠사원의 한쪽 구석에 탄생한 「대몽고국」은 , 징기스칸과 그 자손들에게 이끌려 , 유라시아 전역을 도토우 (와) 같이 질주 해 , 동쪽은 일본해로부터 서쪽은 도나우강 하구·아나트리아(현재의 터키 지방 전역)에 이를 때까지 공전의 거대 제국을 만들어냈다. 대몽고 제국의 성립이다.
후 에 , 오모토 제국이라고 칭하는 정복왕조의 출현은 , 지구상의 동서를 묶는 , 정리의 세계를 실감시키는 시대되었다. 전체상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사의 스타트가 되는 「몽고 시대」의 도래는 , 멀고 파 도를 넘은 동부지역 무사의 땅 「일본」을 진감 시키게 된다.
일본은 , 대외와의 전쟁이라고 하는 점으로 말하면 , 얼마인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몽고 내습 이전에 , 순수하게 국토 방위전을 싸웠던 것이 1회 있었다. 여진족의 내습이다.
1019년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전성 시대에 고려국의 북방으로 반거 한 여진족이 배로 고려 동해안을 덮친 뒤 , 키타큐슈에 와 구 했다. 소규모의 내습이기도 한 것을 잊고 떠나질 정도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400년 후 , 1419년에 이씨 조선국이 2000의 병선과 1만 7000의 군세를 가지고 대마도에 와 습 한 사건이 있다. 「오에이의 외구」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이것은 , 이씨 조선으로서는 한반도 동해안을 마구 망치는 왜구의 근거지를 두드린다고 하는 목적이기 때문에에서 만나며 , 일본과 일을 짓는 것 같은 것은 아니었다.
663년 , (쿠다라)백제를 구원한 일본군은 흰색촌강으로 신라·당의 연합군에 철저한 대패를 당했다.
이 싸움은 일부러 나간 것이다.
텐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 때의 야마토 조정은 진감 했다. 당으로부터의 침공을 예상했기 때문에이다. 그 공포는 , 침공 예상 루트에 따른 방위 라인을 정비하는 것에 향할 수 있어 , 봉화대나 미즈키의 구축을 재는 등 , 필사의 국토 방위에 근무했던 것이다. 행이라고 말해야할 것인가 , 당으로부터의 내습은 없었다.
이렇게 해 보면 , 타국의 대군단을 해 , 일본 열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 침공하는 것이 분별없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것을 잘 안다. 몽고 내습이 두 번에 건너 침공해 , 대전투를 펼쳐 국토 방위전을 싸운 것은 , 확실히 앙천의 사태였던 것이다.
두 번 있는 것은 세번 있다고 속담에 말한다.
일본은 , 몽고의 두 번의 침공을 격퇴해 , 이것에서 침략은 종결했다고 지금은 역사가 확정되어 있지만 그러나 , 당시 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생각되지 않았다일 것이다.
오히려 , 후세의 우리는 쿠빌라이가 세번째의 침공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던 것을 알고 있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불안은 여러번 내습의 공포와 위기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마쿠라막부는 , 내습에 대비해 , 방위를 위한 재원을 무리해서라도 조달해야 했다. 이윽고 , 가인의 궁핍은 심각함을 더해 가 세정은 어수선해 간다.
그 때문에 , 오모토 제국의 붕괴전에 가마쿠라막부 자신이 붕괴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 몽고라는 말에 가지는 이미지는 아마 , 「미개·야만·비문명」이라고 하는 배경이 있어 , 한층 더 내습된 기억으로부터 이끌리는 밉살스러운 감정의 것은 아닌가. 대마도·이키의 주민을 잔혹하게도 전멸 시킨 침략자의 이미지가 좋을 것이다 리가 없다. 「흉포해 인정 사정이 없는 잔학 제국」의 전에 「그야말로 약소 국가인 섬나라 일본」이 힘껏의 저항전을 싸웠다고 하는 과거의 참혹한 비장한 정경이 생각이 미쳐진다.
몽고군의 침략은 , 반드시 , 「살륙·파괴·약탈」이라고 한다 , 어떻게 시시한 어두움을 따라 말해진다.
근래의 연구에서는 , 확실히 그러한 면도 있지만 , 동서 고금 , 전쟁으로 학살이 없는 청결한 전쟁을 하는 군대등 있던 시험은 없고 , 현재에 가까운 과거의 전투에서도 많이 그 실례를 들 수가 있다. 그리고 , 몽고의 싸움의 뒤를 보면(자) , 몽고의 국토 확대 사고가 언제나 전쟁을 수반하고 있었는지라고 말하면 , 그렇게도 단언할 수 없다.
틴기스칸이 몽고 초원의 통일 사업을 일으켰을 때로부터 , 이상하게 싸우지 않는 군대였다.
키 인민의 수가 적었다. 만약 , 전투에 괴멸 하면 민족은 마지막이 될 정도의 물건이다. 그리고 , 후 의 강렬한 침략 행동을 가능으로 한 것은 모두 타민족을 전투 태세에 집어 넣었기 때문이다.
전투에 군대를 거느려 대치해도 , 전투에 이르는 것보다 , 지도자끼리의 논전을 전개해 뿐이 기울어지고를 쳐 합류한다는 것이 「유목민족」의 수법인 것 같다. 유목민은 농경민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수가 적다. 당연한 일이면서 , 세력은 수이며 , 아군에게 붙여야만 세력 확장이 순조롭게 간다고 하는 것이다. 몽고를 시작으로 하는 유목민은 결코 「무지 몽매의 야만인」은 아니었다.
제발 응이 라고도 , 다 죽여 버리면(자) , 거대 제국 등 성립 어쩔 수 없고 , 의미는 없다.
몽고군이 강했으니까 , 몽고 제국의 확대가 가능했다는 것 는 알기 쉽다.
그러나 , 실제로 전투를 섞은 예에서는 , 부득이 전투에 이르는 경우가 많이 있어 , 곤혹하는 것은 , 조금 찾으면 , 최강이라고 생각되는 몽고군이 깨져 있는 것이 눈에 띄는 것이다. 우선 , 전위 부대가 최초를 싸워 봐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고 하게 되면 , 오히려 , 빨리 철퇴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 당한 (분)편은 과장되게 대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여하에 잔학인지를 선전해 , 공포는 귀고리를 걸쳐 주위에게 전할 수 있다. 지켜야 할 아군의 군대의 불 보람없음을 몰아세우거나는 하지 않는다. 잔학인 군대를 많은 사람 정의의 군대가 왜 박살 당하지 않는가. .이상하지 않는가.
왜 , 그렇게 강렬한 학살군이 세계 제국이 되어 백년의 명맥을 유지했는지 , 맥락도 도착하지 않는다.
그러면 , 사상 공전의 국토 방위전의 시대에의 여행을 떠나고 걸칩시다.
▣ 김윤만 - 좋은 싸이트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1419년 조선국의 대마도 와습이란 것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 김항용 - 좋은 사이트를 찾아 주셨습니다. 그동안 일본과 중국(원)의 역사 자료를 찾으려 일본과 중국의 여러 사이트를 찾아 헤맸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출처 감사합니다. 틈나는 대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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