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원류지류를 찾아.(실패한정치가 장보고)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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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3-10-01 02:39 조회1,566회 댓글0건본문
[2003/9/16]
[우리 민족 원류.지류를 찾아 .29] 실패한 정치가 장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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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빛나는 성취는 장보고가 정치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굴절되기 시작했다. 장보고가 지향해야 할 미래는 내분으로 지새는 신라왕실이 아니라 청해진의 발전에 있었다. 그러나 섬 출신 장보고는 왕실의 혈통이란 낡은 잣대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는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자신의 성취를 추인받고자 했다. 이무렵 신라 중앙 정계는 극도로 혼란했다. 삼국통일 이후 절대적인 전제왕권을 행사하던 태종 무열왕계의 중대(中代)는 36대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사방의 도전에 직면했다. 혜공왕의 모후 만월부인 김씨가 섭정하자 이에대한 반란이 잇따랐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혜공왕은 왕비와 함께 난병(亂兵)들에게 피살되고 내물왕의 10세손인 선덕왕(宣德王:780∼785)이 즉위하면서 태종 무열왕계의 왕통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선덕왕 사후 다시 극심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이 즉위해 원성왕계 왕위시대를 열지만 왕권은 이미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장보고에게 청해진 설치를 허용했던 흥덕왕(재위 826∼836)이 후사를 지명하지 않은 채 급서함으로써 다시 왕위 계승 전쟁이 발생했는데, 장보고도 여기에 말려들었다. 왕제(王弟) 김제륭(金悌隆)과 조카 김균정(金均貞)이 흥덕왕의 뒷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는데, 이 싸움은 진골 김양(金陽)이 균정을 지지하고, 김명(金明)이 제륭을 지지하면서 진골 전체의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김균정이 살해됨으로써 김명의 지지를 받은 김제륭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희강왕(僖康王:재위 836∼838)이다. 살해된 김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은 837년 5월 가까스로 서라벌에서 탈출해 잔병(殘兵)을 이끌고 청해진으로 와서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듬해 2월에는 김양도 잔병을 이끌고 청해진에 와서 합류했다. 장보고가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청해진은 자연히 반 희강왕 진지가 되어갔다. 청해진이 설치되던 828년 4월 우징은 시중(侍中)으로 있으면서 장보고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고로 왕권 다툼은 개인적인 의리로 개입할 사안이 아니었다. 이제 장보고는 좋든 싫든 신라말의 극심했던 왕위 계승 전쟁의 한복판에 선 것이었다. 그 사이 신라 왕실은 또다시 왕위 계승 분쟁에 휩싸였다. 희강왕을 옹립한 대가로 상대등이 된 김명은 838년 시중 이홍(利弘)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자살케 하고, 왕위를 차지했으니 그가 바로 민애왕(閔哀王:재위 838∼839)이었다. 김우징은 이를 복수의 기회로 여기고 장보고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다. ‘아찬 우징이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이 (희강왕의)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궁복(장보고)에게,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군부(君父)를 살해했으니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원하건대 장군의 군사를 빌려서 군부의 원수를 갚게 해 주시오”라고 말하자 궁복은, “예사람이 말하기를 ‘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내 비록 용렬하다 할지라도 명을 좇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군사 5천 명을 친구 정년에게 빌려주며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평정할 수 없네”라고 말했다.‘(삼국사기’ 민애왕조)’ 장보고의 후원을 받은 반정부군은 김양의 지휘 아래 정년, 염장(閻長) 등 6명의 날랜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로 향해서 838년 12월 무주 철야현(鐵冶縣:현 나주시 남평면)에서 민애왕의 군대를 격파해 승기를 잡고, 이듬해 정월에는 달구벌에서 민애왕의 대군을 격파해 대세를 결정지었다. 민애왕은 이들에게 살해되고 우징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신무왕(神武王)이다. 그는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와 2천호(戶)의 실봉(實封)을 내려 보답했는데, 장보고가 가장 바란 것은 이런 벼슬보다도 신라왕실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삼국유사 신무대왕·궁파·염장조’에는 김우징이 “내가 왕위에 오른다면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고 적고 있는데 국구(國舅:국왕의 장인)가 장보고의 목표였다. 신무왕이 불과 반년도 못되어 죽고 태자가 즉위하자[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 장보고는 그에게 자신의 딸을 들이려 했다. 그러나 문성왕은 재위 4년 이찬 위흔(魏昕)의 딸을 맞아들여 장보고의 희망을 꺾었다. 장보고는 차비(次妃)로라도 삼아달라고 한 발 물러섰으나 섬사람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정신하들이 반대해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차비마저 무산되자 분개한 장보고는 이듬해 군사를 일으켰다. ‘삼국사기’는 이때 ‘이를 토벌하려 하자니 예측할 수 없는 환란이 두렵고 방치하자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어서 어떻게 처리할 바를 몰라서 걱정했다’고 적을 정도로 장보고의 군사는 막강했다. 이때 민애왕을 쫓아낼 때 장군으로 싸웠던 염장이 장보고 제거를 자청하고 나섰다. 염장은 왕명을 받들고 청해진에 들어가 안내하는 사람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왕에게 작은 원한이 있어 그대에게 의탁해 신명을 보전하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궁파(장보고)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해서 “너희들이 왕에게 간해서 내 딸을 폐하고 어찌 나를 보려 하느냐”라고 말했다.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서, “그것은 여러 신하들이 간한 것이요, 나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대는 나를 혐의치 마시오”라고 말했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그를 청사로 불러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라고 물으니 염장이 “왕의 뜻을 거슬린 일이 있어 그대의 막하(幕下)에 의탁해서 해를 면해볼까 합니다”라고 답했다. 궁파가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다”라면서 매우 기뻐해 술자리를 마련했다.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뽑아 그를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이 모두 놀라서 엎드렸다.(삼국유사’ 권2, 신무대왕·염장·궁파조) 장보고는 망해가는 신라왕실의 일원이 되기를 간구하다가 왕위 계승 전쟁에 휘말려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일본의 기록인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장보고의 부장이었던 이창진(李昌珍)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염장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장보고 살해에 대한 반발이 만만찮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미 장보고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장보고가 죽은 후 그의 심복들은 중국 혹은 일본으로 떠났고,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국제무역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드디어 문성왕 13년(851)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지하고 그 주민들을 벽골군(碧骨郡:김제)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동아시아를 주름잡던 청해진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덕일<역사평론가>*일본 속 신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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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회 - 장보고와 김균정-신무왕(김우징)-원성왕( )의 인연!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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