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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07) ---고려사 김방경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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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02 01:51 조회1,5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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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07) ---고려사 김방경열전



인조이재팬네이버(http://j2k.naver.com/j2k_frame.php/korean/kumasan1127.cool.ne.jp/kuma/kirameki/land-story/lannd-history.htm)에서 검색해 볼 수 있는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의 일본측 기록과 고려사열전 및 역사스페셜 등 우리측 기록을 대조해 보면 많은 것을 비교하여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안동김씨 대동보에 충렬공 할아버지 신도비 기록을 보면 1592년 임진왜란때 일본 침략군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두 차례에 걸친 충렬공 할아버지의 일본정벌과 관련이 있지 않나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 개정된 일본 역사교과서를 보면 임진왜란 관련 내용은 반 페이지에 불과하고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관련 내용은 3페이지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계을 정복한 원나라의 침공도 "신의 바람" 이라는 신풍과 자기들의 항전으로 물리쳤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임진왜란은 부끄러운 기록이므로 최대한 축소 은폐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



○ <원종> 15년에 제(帝)가 일본을 치고자하여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조(詔)하여 전함(戰艦)을 감조(監造)하게 하니 조선(造船)을 만약 만양(蠻樣)에 의거하면 공비(工費)가 많고 장차 일국(一國)이 근심하였다.



★김방경이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가 되어 먼저 전라(全羅)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자문(咨文)으로 중서성(中書省)의 격문(檄文)을 받고 본국(本國 고려(高麗) )의 조선양식(造船樣式)을 써서 독촉하여 만들었다.



이해에 원종(元宗)이 훙(薨)하고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매 ★김방경이 홍다구와 더불어 단기(單騎)로 와서 진위(陳慰)하고 ♠합포(合浦)에 돌아와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과 부원수(副元帥) 홍다구·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전함(戰艦)을 사열(査閱)하였다.



★김방경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박지량(朴之亮)·★김흔(金)·지병마사(知兵馬事) 임개(任愷)로 부사(副使)를 삼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신(金侁)으로 좌군사(左軍使)를 삼고 위득유(韋得儒)·지병마사(知兵馬事) 손세정(孫世貞)으로 부사(副使)를 삼고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로 우군사(右軍使)를 삼고 나유(羅裕)·박보(朴保)·지병마사(知兵馬事) 반부(潘阜)로 부사(副使)를 삼아 3익군(翼軍)이라 이름하니 ★김흔(金)은 곧 ★김수(金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蒙古軍)·한군(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과 인해(引海)·수수(水手 수부(水夫) )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소()로써 ♠합포(合浦)에 머물러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리니 여진군(女眞軍)이 기일(期日)에 늦을까 하여 이에 발선(發船)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서 쳐서 죽임이 심히 많았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위에 진(陣)을 친지라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서()인 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다가 다시 와서 싸우거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趙)과 더불어 1,000여 급(級)을 격살(擊殺)하고 배를 ♠삼랑포(三郞浦)에 버리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매 죽인 바가 대단히 많았다.



왜병(倭兵)이 갑자기 이르러 중군(中軍)을 쳐서 검(劒)이 좌우로 부딛쳤으나 ★김방경은 의연하여 조금도 물러가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빼어 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외치니 왜(倭)가 놀라 피하여 달아나므로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조변(趙)·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新奕) 등이 힘껏 싸워 왜병(倭兵)이 크게 패하여 엎어진 시체가 삼대와 같았다.



홀돈(忽敦)이 말하기를,

“몽인(蒙人)이 비록 싸움에 익숙하였으나 어찌 이에 비하리오.”

하였다. 모든 군사가 같이 싸워 해가 저무니 이에 해산(解散)하였다.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소적(小敵)이 견수(堅守)하면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힌다.’고 하였으니 피핍(疲乏)한 군사를 채찍질하여 날로 불어나는 무리를 당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유복형(劉復亨)이 유시(流矢)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오르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올 때 마침 밤에 크게 풍우(風雨)가 있어 전함(戰艦)이 암벽(岩壁)에 부딛쳐 많이 파손(破損)되고 김신(金侁)은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합포(合浦)에 이르러 노획한 기장(器仗)을 제(帝) 및 왕에게 바치니 왕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장일(張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김방경을 먼저 돌아오도록 명하여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判御史臺事)를 더하였다.









○ <충렬왕(忠烈王)> 7년 3월에 군사를 내어 동정(東征)할 때 ★김방경이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이르러 병장(兵仗)을 사열(査閱)하고 왕은 ♠합포(合浦)에 이르러 크게 제군(諸軍)을 열병하였다.



★김방경이 흔도(都), 홍다구(洪茶丘),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과 더불어 출발(出發)하여 일본 세계촌(世界村) ♠대명포(大明浦)에 이르러 통사(通事) 김저(金貯)로 하여금 격(檄)으로 설유(說諭)하였다.



김주정(金周鼎)이 먼저 왜(倭)와 더불어 교전(交戰)하매 제군(諸軍)이 다 내려 같이 싸워 낭장(郞將) 강언(康彦), 강사자(康師子) 등이 죽었다.



6월에 ★김방경, 김주정(金周鼎), 박구(朴球), 박지량(朴之亮), 형만호(荊萬戶) 등이 일본병(日本兵)과 더불어 함께 싸워 300여 급(級)을 베니 일본병(日本兵)이 돌진하므로 관군이 무너지고 홍다구가 말을 버리고 달아나거늘, 왕만호(王萬戶)가 다시 가로질러 쳐서 50여 급(級)을 베니 일본병(日本兵)이 이에 물러가고 홍다구는 겨우 면하였다.



그 다음날 다시 싸워 패적(敗績)하고 군중(軍中)에 또 크게 질병이 나서 죽은 자가 무릇 3,000여 명이라, 흔도 홍다구 등이 여러 번 싸워 불리하였고 또 범문호(范文虎)가 기일(期日)을 지나도 오지 않음으로써 회군(回軍)하고자 의론하기를,



“성지(聖旨)가 강남군(江南軍)과 동로군(東路軍)이 반드시 이 달 16일에 일기도(一岐島)에서 만나게 하였는데 지금 남군(南軍)이 오지 않고 아군(我軍)이 먼저 와서 여러 번 싸웠으나 전선(戰船)이 썩고 양식이 다 하였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

하니 ★김방경이 묵연(默然)하였다.



10여일에 또 의론이 처음같거늘 ★김방경이 말하기를,

“성지(聖旨)를 받들고 3개월 분량의 양식을 가지고 왔으니 이제 한달 양식이 아직 있는지라 남군(南軍)이 오기를 기다려 합공(合攻)하면 이를 멸할 것이다.”

하니 제장(諸將)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범문호(范文虎)가 만군(蠻軍) 10여만을 거느리고 오니 배가 무릇 9,000소()였다.



8월에 대풍(大風)을 만나 만군(蠻軍)이 다 빠져 죽으니 시체가 조수(潮水)를 따라 포구(浦口)에 들어와 포구(浦口)가 이 때문에 막혀 밟고 다니게 되는지라 드디어 환군(還軍)하였다.













▣ 김윤만 -

▣ 솔내영환 -

▣ 김윤식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몽고군은 수전에 약했고, 강남군은 실제 전투 능력이 있었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일이니 정예병은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고려군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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