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09) ---대마도 정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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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02 22:03 조회1,564회 댓글0건본문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09) ---대마도 정벌1
1274년과 1281년에는 충렬공 ★金方慶이 여원연합군을 이끌고 대마도, 일기도, 규슈지방을 정벌할 때 둘째아들 ★김흔(초명 김수), 셋째아들 문영공 ★김순과 큰 사위 ★조변 등과 함께 역시 대마도를 정벌하신 바 있습니다.
郡/태영 종친님 의견으로는 대마도에 ★충렬공 영정이 있다는 말을 옛날에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대마도에 충렬공 영정이 있다면 두차례에 걸쳐 일본정벌을 가실때 여원연합군이 거쳐간 대마도 어디에 있겠지요? 일본 사람들은 기록과 유물을 잘 보관한다고 하는데, 현재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419년 이종무는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소굴을 10일간 완전 소탕하고 철군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1868년 명치유신 때까지 대마도는 조선의 정치력 하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보다 23년전인 1396년 (조선태조 5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겨울철에 57일간 충렬공 휘方慶의 현손이신 익원공 ★金士衡(★김사형)이 5도 병마도통처치사 로서 왜구의 본거지를 소탕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공략한 적이 있습니다.
대마도 안내책자를 보면 고려, 조선의 대마도 정벌시에 주로 남섬과 북섬의 중간에 위치한 아소만이라는 곳을 공략한 것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대아고속해운(http://www.daea.com/) 홈페이지 관광코스를 보면 대마도 남섬 이즈하라 인근 <●꼬모다 몽고 내습지> 도 관광코스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집결
-출국수속 부산출발
-이즈하라 국제 여객터미널 도착 후
-입국수속 후 호텔이동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쯔쯔자키반도(등대)
-●꼬모다 몽고 내습지, 이시야네 관광 후
-이즈하라 귀환
-숙소로 이동 석식, 자유시간 및 취침
▣ 한국방송통신대학 논문집 제20집, 1995. 8월
박위·★金士衡의 대마도 정벌 (노계현)
5. ★김사형의 대마도정벌
고려가 종말을 고하고 조선이 건국한 이후도 왜구의 침략은 여전하였다. 조선 태조시에도 고려말기와 같이 일본과는 사절의 내왕으로 선린관계를 유지시켰으나 일본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던 왜구문제는 역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태조때 왜구의 침략도 끊이지 않았으니 그 중의 중요한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393년(태조2년) 4월에 평안도 순천군에 침입한 왜구를 도순무사가 이를 격퇴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연이어 일어난다. 같은 달 경기도 양주도호부 관내에 왜구의 규모가 30척이나 되는 것이 침략해 왔고, 동년 10월에는 평안도 이성만호가 왜구 40여를 베었다.
그 다음해인 1394년 8월에는 침범한 왜구의 배 9척을 나포하였으며
1396년 8월에 동래현에서 왜선이 동래성을 포위함으로 이중 배 21척을 불살랐다
그리고 1397년 6월에 평안도 안주목사는 배 10척을 동원하여 침범한 왜구의 배 24척중 6척을 대파하였다. 또 같은 달에 황해도 장산갑에서 왜선 10척을 불사르고 평안도 해안에서도 왜구의 배 10척을 불살랐다.
1398년 (정종 즉위년) 10월에는 황해도 웅진현에서 왜구의 배 1척을 불사르고 50명을 베었다.
이와같이 끊임없이 노략질하여 오는 왜구를 무마하기 위하여 조선을 사신을 보내어 달래기도 하고 이선치도책 (以善治盜策 : 선으로써 왜적을 다스리는 정책)을 써서 침략해 오는 왜구에게 음식을 주기도 하고 방종하는 것을 묵인도 해 주었다. 그러나 이 이선치도책은 북쪽의 여진에게는 때로 효과를 보았으나 왜구에게는 별무소득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무제구책 (以武制寇策 : 무력으로써 왜구를 제압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金士衡으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함으로써 왜구의 근원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1396년 (태조5년) 12월(정해) 에 태조는 문하 우정승 ★金士衡을 5도 병마도통처치사로 삼고, 예문춘추관 대학사 南在를 도병마사로 삼고, 중추원 부사 辛克恭을 병마사로 삼고, 전 도관찰사 李茂를 도체찰사로 삼아 전국의 군함을 모아 대마도와 일기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정벌군이 출사함에 태조는 남문 밖까지 나아가 이를 전송하였다. 이때 태조는 ★金士衡 5도 병마도통처치사에게 부월 (임금이 출정군 사령관에게 내리는 것으로서 이것은 임금의 명령으로써 적을 정벌하라는 수권인 동시에 왕의 상징이기도 하다) 과 교서를 내리고 안마와 모관, 갑옷과 활 및 화살, 약상자를 내렸다. 태조는 또한 남재, 이무 및 신극공에게도 가각 모관, 갑옷, 활과 화살을 내렸다.
태조가 내린 교서에 이르기를
"----- 불행하게도 (왜구가) 쥐새끼처럼 몰래 날뛰고 개처럼 훔쳐가는 일들이 거듭 일어났다. 때마다 지방 관헌에게만 (이들을) 쫓든지 잡으라고 해왔다. 이 왜구의 세력이 창궐하여 지방 관헌의 힘만으로서 제어하기 어려우므로 대신들에게 대마도 정벌을 명하였다. ----- 지시를 받은 장수들은 나가 수륙으로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라. 그러면 변방이 언제나 평안하게 될 것이다. -----" 고 하고 있다.
태조실록에는 ★金士衡이 대마도를 정벌한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金士衡이 출정한 지 57일만인 1397년 1월 말에 돌아온 기사가 있다. ★金士衡이 개선하자 태조는 흥인문 밖에까지 나가 위로하며 맞이하였다. 그리고 2월에 태조는 ★金士衡에게 연회를 베풀어 칭찬하고 서대(물소 가죽으로 만든 띠로서 귀중품임)를 하사하였다.
■만인보14 (1997, 고은, 창작과비평사)
p.103
김 사 형
1396년 조선 태조 5년
현해탄 건너
일본 대마도
이끼섬을 공격했다.
김사형의 세 폭짜리 돛배전함 몇척으로
이것이 국토 밖으로 나가본 일
저 대륙과 반도
아우르던 고구려 이래
이끼섬은
본 수군과 해적과 어부의 전진기지
수없는 왜구에 의해
조선 국토 깊숙이 싸움터 되어온 이래
앞으로 더 큰 싸움터 되기에 이르기까지
그 과감한 김사형
관운장 수염 날려
거친 바닷바람 밀어붙여 공격했다.
그런 뒤 세종 2년
이종무가 대마도를 한번 정벌했다.
일본 사신이 와 빌었다.
만약 그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현해탄은 어정쩡 한국과 일본 사이 공해(公海)가 아닐 터이지.
▣ 김윤만 - 양자강도 가보고 싶고, 대마도 일기도도 가보고 싶고. . . . .
▣ 김항용 -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 여행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 김재원 -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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