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점할아버지의 또다른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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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10-07 03:05 조회1,388회 댓글0건본문
▣ 25) 김자점 이야기 ▣
김자점이라는 사람 얘긴데, 김자점이 김해김씨거든요.
이성계가 들어와서 등극한 이후지.
그 후로 거기다가 산소를 쓰면 용이 되어 올라가야 임금이 되거든요.
그 자손이 그래서 인제 거기다가 산소를 쓰는데 지관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거꾸로 묻으라고 했어 관의 머리를.
콩나물 콩 그 자디잔거 검정거.
그 자디잔 것을 거기 옥관하는데다가 묻어라.
묻으면 그것이 다 사람(군사)이 돼.
군사가.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묻고 했는데 그것을 거꾸로 묻느라고 자손들이 다 넘어졌다 이거여.
관을 갖다 묻었는데.
이것을 나라에서 어떻게 알고서는 그 때는 임금 시절이니까 막 파라고 하면 팔 때니까. 파니까 용이 다 되고는 대가리가 안 됐더래요.
대가리가 먼저 돼야 하는데 거꾸로 써서 대가리가 안돼서 눌를 데나 잡을 데가 없거든.
지금 같으면 기계가 좋으니까 배도 좋은 배가 있고 그렇지만 그 때는 사람이 저어서 가는 배니까 사람이 때려 누를 기세가 있나.
이제 들된 놈이 돌아서 나갈려니까 그 시간이 없으니까 그 때 도리깨로 때려잡어 죽여버렸어.
죽여버리고 콩을 전부 파헤치니까 전부 사람 머리가 됐는데 그냥 죄 밟어 죽이고 때려 죽이고 그래서 전주이씨가 김해김씨를 쌍놈으로 만들어버렸지.
전주이씨가.
그래서 김해김씨라고 무시 당했어요.
김자점의 아버지를 갖다 묻었나봐요. 여서원이라고 그러는데.
굴다리에서 내다보면 이렇게 돌았는데, 요렇게 누운 동네가 있는데.
여기서 보여요.
세원이라는 동네예요.
거기가 수석동(水石洞) 그쪽이지.
가운리는 아니고.
그런데 그게 이야기가 여러가지가 있어요.
그저 염을 할 적에 그 끈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그 얼른 보면 갈포 같은 거 잘 썩는 끈을 써야 하는데, 그만 질긴 끈을 썼다는 거예요.
명지 같은 것을 썼다는 거지.
그래서 용이 돼가지고 나오는데 발톱 이런 데, 전부 명지실이 감겨가지고 꼼짝을 못하고 제대로 돌질 못하고 해서 그 때 잡혔다는 말도 있거든.
그런데 그 옆에 그 때 도망가지 못하고 잡힌데, 때려 잡힌 데 바위가 지금도 뻘겋다는 얘기도 어딘가 있어요.
용을 잡으니까 뻘건 피가 나온다는거야.[제보자 : 최병욱(98032101)]
≪제3권 민속 | 제1편 생활과 풍습 | 제7장 구비전승* | 제1절 설 화 | 2.조사내용≫
▣ 수석동(水石洞, 석실) ▣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양주군 미음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미음면 석실리(石室里), 수변리(水邊里), 석도리(石島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수변의 ‘수’자와 석실의 ‘석’자를 따서 ‘수석리’라 하고 미금면에 편제되었다. 수변이란 글자 그대로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어서 붙은 이름이고, 석실은 이곳에 석실서원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해 미금시로 승격되면서 수석리가 수석동으로 개칭되었다.
≪제3권 민속 | 제2편 지명유래 | 제2장 남양주시의 지명유래 | 제14절 지금동(芝錦洞)≫
▣ 솔내영환 - 수석동은 강변복로를 따라 워커힐 지나 명빈묘입구 지나 우회전하여 곧바로 가면 오른쪽 풍속마을이라는 간판 있는 곳입니다.
▣ 김항용 - 철저한 정치적 모함을 위해 설화를 이용했습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 김영윤 -
김자점이라는 사람 얘긴데, 김자점이 김해김씨거든요.
이성계가 들어와서 등극한 이후지.
그 후로 거기다가 산소를 쓰면 용이 되어 올라가야 임금이 되거든요.
그 자손이 그래서 인제 거기다가 산소를 쓰는데 지관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거꾸로 묻으라고 했어 관의 머리를.
콩나물 콩 그 자디잔거 검정거.
그 자디잔 것을 거기 옥관하는데다가 묻어라.
묻으면 그것이 다 사람(군사)이 돼.
군사가.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묻고 했는데 그것을 거꾸로 묻느라고 자손들이 다 넘어졌다 이거여.
관을 갖다 묻었는데.
이것을 나라에서 어떻게 알고서는 그 때는 임금 시절이니까 막 파라고 하면 팔 때니까. 파니까 용이 다 되고는 대가리가 안 됐더래요.
대가리가 먼저 돼야 하는데 거꾸로 써서 대가리가 안돼서 눌를 데나 잡을 데가 없거든.
지금 같으면 기계가 좋으니까 배도 좋은 배가 있고 그렇지만 그 때는 사람이 저어서 가는 배니까 사람이 때려 누를 기세가 있나.
이제 들된 놈이 돌아서 나갈려니까 그 시간이 없으니까 그 때 도리깨로 때려잡어 죽여버렸어.
죽여버리고 콩을 전부 파헤치니까 전부 사람 머리가 됐는데 그냥 죄 밟어 죽이고 때려 죽이고 그래서 전주이씨가 김해김씨를 쌍놈으로 만들어버렸지.
전주이씨가.
그래서 김해김씨라고 무시 당했어요.
김자점의 아버지를 갖다 묻었나봐요. 여서원이라고 그러는데.
굴다리에서 내다보면 이렇게 돌았는데, 요렇게 누운 동네가 있는데.
여기서 보여요.
세원이라는 동네예요.
거기가 수석동(水石洞) 그쪽이지.
가운리는 아니고.
그런데 그게 이야기가 여러가지가 있어요.
그저 염을 할 적에 그 끈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그 얼른 보면 갈포 같은 거 잘 썩는 끈을 써야 하는데, 그만 질긴 끈을 썼다는 거예요.
명지 같은 것을 썼다는 거지.
그래서 용이 돼가지고 나오는데 발톱 이런 데, 전부 명지실이 감겨가지고 꼼짝을 못하고 제대로 돌질 못하고 해서 그 때 잡혔다는 말도 있거든.
그런데 그 옆에 그 때 도망가지 못하고 잡힌데, 때려 잡힌 데 바위가 지금도 뻘겋다는 얘기도 어딘가 있어요.
용을 잡으니까 뻘건 피가 나온다는거야.[제보자 : 최병욱(98032101)]
≪제3권 민속 | 제1편 생활과 풍습 | 제7장 구비전승* | 제1절 설 화 | 2.조사내용≫
▣ 수석동(水石洞, 석실) ▣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양주군 미음면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미음면 석실리(石室里), 수변리(水邊里), 석도리(石島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수변의 ‘수’자와 석실의 ‘석’자를 따서 ‘수석리’라 하고 미금면에 편제되었다. 수변이란 글자 그대로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어서 붙은 이름이고, 석실은 이곳에 석실서원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해 미금시로 승격되면서 수석리가 수석동으로 개칭되었다.
≪제3권 민속 | 제2편 지명유래 | 제2장 남양주시의 지명유래 | 제14절 지금동(芝錦洞)≫
▣ 솔내영환 - 수석동은 강변복로를 따라 워커힐 지나 명빈묘입구 지나 우회전하여 곧바로 가면 오른쪽 풍속마을이라는 간판 있는 곳입니다.
▣ 김항용 - 철저한 정치적 모함을 위해 설화를 이용했습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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