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김방경) 사위 채홍철(1262-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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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08 19:37 조회1,597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김방경) 사위 채홍철(1262-1340)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충렬공께서는
1)배위 냉평국대부인(음평군부인) 죽주박씨 (박익정의 따님)과의 사이에 3남(선,흔,순) 3녀(조변, 김원충, 권윤명에 출가)를 두시고 ◀김방경 묘지명(1300) 기록◀
2)배위 손씨와의 사이에 1녀(채의에 출가) ◀김방경 묘지명(1300)기록◀
또는 용강 관비와의 사이에 1녀(채홍철에 출가)를 두시고 ◀고려사(1400년대 전반) 기록◀
3)???와의 사이에 1녀(경수에 출가)가 있고 ◀안동김씨 족보(1580) 기록◀
4)경주가씨(가석윤의 따님)와의 사이에 2남(론,돈) 養育 ◀안동김씨 족보(1580) 기록◀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 소개하는 [채홍철 묘지명] 국역본 내용중에
채의와 채홍철을 같은 인물로 분석한 내용이 있어 참고할 만 합니다. 맞다면 용강 관비는 손씨이겠지요?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2001.12월, 김용선,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862
249. 채홍철(蔡洪哲) 묘지명
--전거 [가정집]12
--연대 충혜왕복위 원년(1340)
원(有元)의 봉의대부 태상예의원판관 효기위 대흥현자이고, 고려(高麗)의 순성보익찬화공신 삼중대광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인 순천군(順天君) 채공(蔡公) 묘지명
지원(至元, 後至元)1> 6년 경진년(충혜복위1, 1340) 정월 10일 계해일에 대흥현자 순천군 채공이 79세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셨다. 예(禮)로써 장례를 지내려 하면서, 그 아들과 사위가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이곡(李穀)에게 묘지명을 청하므로, 곡이 말하였다. "공의 행실과 의리는 한 세상에 높았고 공로와 덕망은 온 나라에 알려져 있으니, 명문(銘文)을 짓는데 무엇을 더 하겠습니까."
공의 이름은 홍철(洪哲)이고, 자는 무민(無悶)이며, 교주도 평강현2>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문사(文詞)에 능하여 성균시에 합격하고3>, 23세에 진사제(進士第)에 올라4> 처음으로 응선부녹사에 임명되었다. 다섯 차례 옮겨서 통례문지후가 되고, 장흥부5>사로 나가서는 자혜롭게 다스렸다.
--2>교주도는 강원도 춘천시,철원군,회양군 지역을 중심으로 설치된 고려시대의 도이고, 평강현은 강원도 평강군의 고려시대 이름
--3>채홍철(1262-1340)이 18세가 되는 해는 충렬왕5년(1279)이다.
--- 중간 생략 ---
부인 ★김씨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역시 아들이 귀하게 되자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는데15> 아버지 아무개<金方慶>16>는 벼슬이 첨의중찬 상락공에 이르렀고 (元) 세조 황제의 조정에 공이 있어 중봉대부 도원수에 제수되었다. 부인은 유순하고 아름답고 정숙하고 착하여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지켰으며, 자녀 5명을 낳았다.
--15>[고려사]에는 金方慶이 北界를 다스리러 나갔을 때 龍岡의 官婢를 좋아하여 딸 한 명을 낳았는데, 채홍철이 부인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고려사] 108 채홍철전). 한편 [김방경 묘지명]에는 김방경이 孫氏와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낳았는데, 통례문지후 蔡宜에게 시집갔다고 적혀 있다. [채홍철 묘지명]에 그의 이름이 蔡宜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채홍철이 통례문지후를 역임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채의와 채홍철은 같은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6>⇒[김방경 묘지명] (이책 pp.662-668)
맏아들 ★하중(河中)17>은 원의 궁궐에서 숙위하여 태부부자의참군에 선발되고, 그 사이에 본국에서 벼슬하여 판삼사사가 되었으며, 지금은 평강군(平康君)이 되었다.
둘째아들 ★하로(河老)는 판종부시사이며
셋째아들 ★선지(先智)는 불교를 배워 계조연진대선사가 되었다.
맏딸은 지금 계림부윤 검교첨의평리인 ★설현고(薛玄固)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작고한 좌우위 보승별장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갔는데, 공보다 앞서 죽었다.
■ 김방경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공(公)의 배위(配位)는 거서랑 지제고(起居郞知制誥) ★박익정(朴益旌)의 따님으로서 삼남 삼녀를 나셨으니
장자 ★선( )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典法判書上將軍)을 지내시고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차남 ★흔( )은 관고려군 만호 진국상장군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장군(管高麗軍萬戶鎭國上將軍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將軍)을 지내시고
삼남 ★순(恂)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密直司副使判秘書寺事文翰學士)를 지내시고
딸 한분은 참지성사 ★조계순(參知政事 趙季恂)의 2자(二子) ★변( )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변( )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전리판서(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上將軍)을 지냈다.
둘째따님은 지첨의부사 ★김광원(知僉議府事 金光遠)의 장남(長男)인 조헌대부 신호위 보승장군(朝顯大夫神虎衛保勝將軍) ★김원충(金元沖)에게로 출가하였고,
셋째따님은 통례문사(通禮門事) ★권윤명(權允明)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기후(通禮門 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 《고려사》 제108권 - 열전 제21 >
채홍철
채홍철의 자는 무민(無閔)이요 평강(平康) 사람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응선부 녹사(膺善府錄事)로 임명되고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 장흥 부사(長興府使)로서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다.
이윽고 벼슬을 그만두고 14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면서 중암 거사(中菴居士)라 자칭하고 불교, 선교(禪), 거문고, 글씨 그리고 약을 짓는 것으로 일상사를 삼았다.
---중간 생략---
처음에 ★김방경(金方慶)이 북방 국경 지방을 수비하고 있을 때에 용강(龍岡) 고을 관비(官婢)와 관계하여 한 여식을 낳았던바 ★채홍철이 그에게 장가들어 ★채하중(蔡河中), ★채하로(蔡河老) 두 아들을 낳았다. 채하중은 따로 전기가 있다.
■ 안동김씨 족보 (1580 경진보, 1979 기미보)
○金方慶 할아버지는 5男(★ 선, ★ 흔, ★恂순, ★ 윤, ★惇순) 4녀(★趙 조변, ★慶綬경수, ★權允明권윤명, ★蔡洪哲채홍철)를 자녀로 두신 것으로 되어 있고,
○부기를 달면서 충렬공의 묘지석(1300년 이진 찬)을 발굴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朴益旌박익정의 따님인 냉평국대부인 ★竹州朴氏가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孫氏를 재취로 맞이하여 1녀를 낳아 ★蔡宜채의에게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역대세보에는 보이지 않으나 지석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기록하여 둔다고 하였고,
○★慶州加氏가 2남을 기른 것은 지석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錫胤석윤의 따님인 경주가씨가 2남(★ 윤, ★惇순)을 길렀다고 (生2男이 아니고 育2男으로 표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 윤, 惇순)은 한글로는 론, 돈인데 족보에는 한글로 윤, 순이라 되어 있습니다.
▣ 김영윤 -
▣ 김윤만 - 채홍철=채의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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