卒記(졸기) 04.<金질(김질)>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3-10-09 06:03 조회1,739회 댓글0건본문
▣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질)의 졸기(卒記) ▣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질)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부의하였으며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규례대로 하였다.
--김질의 자(字)는 가안(可安)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事) 김종숙(金宗淑)의 아들이고 상락 부원군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다.
--처음에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였다. 부사직(副司直)이 되었을 때에 참관(參官)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김질이 청하여 해직(解職)하고 학교에 갔는데, 참관이 학교에 가는 것은 김질로부터 시작되었다. 경태(景泰) 경오년에 과거에 급제해서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에 제배(除拜)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겼다가 여러번 옮겨서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병자년에 이개(李塏) 등이 난을 꾀하고 날을 약속하여 일을 거행하기로 하였으나 수행하지 못하였는데, 수일 뒤에 김질이 장인[妻父] 정창손(鄭昌孫)에게 말하여 변고(變告)를 상주하니, 이개 등이 주살(誅殺)되었다. 여러 신하가, 김질이 함께 모반하였는데 성패를 관망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어서야 고한 것이라 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조가 듣지 않고,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올리어 제수(除授)하고 곧 추충 좌익 공신(推忠左翼功臣)이라는 호(號)를 내려 주었다. 얼마 안 되어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오르고 옮기어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천순(天順) 기묘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고 상락군으로 봉해졌다. 신사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가 되어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로 나갔다가, 곧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계미년에 들어와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성화(成化) 병술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가자되었다. 정해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무자년에 도로 상락군에 봉해졌고,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되었다가 이윽고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기축년에 상락 부원군에 봉해졌고, 예종(睿宗)이 즉위하여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갑오년에 다시 우의정에 제배되었고, 주문사(奏聞使)에 충차(充差)되어 중국(中國)에 가서 의경왕(懿敬王)의 시호(諡號)를 청하여서 허락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니,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정유년에 도로 상락 부원군에 봉해졌다. 병에 걸리게 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어주(御廚)의 찬선(饌膳)을 내렸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7세이다.
--시호를 문정(文靖)이라고 하였는데, 충신 애인(忠信愛人)한 것이 문(文)이고, 관락 영종(寬樂令終)한 것이 정(靖)이다. 김질은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언론(言論)을 잘하였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를 우애(友愛)로 대하였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김질의 사람됨은 기국(器局)이 관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좋아해서 재상의 풍도가 있었으나, 나라를 경륜하는 것은 능한 바가 아니었다. 일찍이 하이도(下二道)의 군적 순찰사(軍籍巡察使)가 되었는데, 세조(世祖)의 뜻이 사려(師旅)를 확장하는 데 있는 것을 알고 오직 받들어 순종하여 군액(軍額)을 늘리기에만 힘써서, 한산(閑散)한 문무과(文武科) 출신과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다 군열(軍列)에 편입하여 비록 심한 폐질이 있는 자라도 혹 면제되지 못하는 수가 있었으며, 종사관(從事官) 양진손(梁震孫)은 더욱 각박하였으므로, 원망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하였다.】
≪출전 : 성종실록 89권 성종9년 2월24일(정사)≫
▣ 김항용 -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영윤 -
▣ 김주회 -
▣ 김항용 - 홈에 올립니다.
▣ 김상석 - 상세한 내용 잘 보았습니다.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질)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부의하였으며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규례대로 하였다.
--김질의 자(字)는 가안(可安)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事) 김종숙(金宗淑)의 아들이고 상락 부원군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다.
--처음에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였다. 부사직(副司直)이 되었을 때에 참관(參官)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김질이 청하여 해직(解職)하고 학교에 갔는데, 참관이 학교에 가는 것은 김질로부터 시작되었다. 경태(景泰) 경오년에 과거에 급제해서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에 제배(除拜)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겼다가 여러번 옮겨서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병자년에 이개(李塏) 등이 난을 꾀하고 날을 약속하여 일을 거행하기로 하였으나 수행하지 못하였는데, 수일 뒤에 김질이 장인[妻父] 정창손(鄭昌孫)에게 말하여 변고(變告)를 상주하니, 이개 등이 주살(誅殺)되었다. 여러 신하가, 김질이 함께 모반하였는데 성패를 관망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어서야 고한 것이라 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조가 듣지 않고,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올리어 제수(除授)하고 곧 추충 좌익 공신(推忠左翼功臣)이라는 호(號)를 내려 주었다. 얼마 안 되어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오르고 옮기어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천순(天順) 기묘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고 상락군으로 봉해졌다. 신사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가 되어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로 나갔다가, 곧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계미년에 들어와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성화(成化) 병술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가자되었다. 정해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무자년에 도로 상락군에 봉해졌고,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되었다가 이윽고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기축년에 상락 부원군에 봉해졌고, 예종(睿宗)이 즉위하여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갑오년에 다시 우의정에 제배되었고, 주문사(奏聞使)에 충차(充差)되어 중국(中國)에 가서 의경왕(懿敬王)의 시호(諡號)를 청하여서 허락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니,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정유년에 도로 상락 부원군에 봉해졌다. 병에 걸리게 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어주(御廚)의 찬선(饌膳)을 내렸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7세이다.
--시호를 문정(文靖)이라고 하였는데, 충신 애인(忠信愛人)한 것이 문(文)이고, 관락 영종(寬樂令終)한 것이 정(靖)이다. 김질은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언론(言論)을 잘하였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를 우애(友愛)로 대하였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김질의 사람됨은 기국(器局)이 관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좋아해서 재상의 풍도가 있었으나, 나라를 경륜하는 것은 능한 바가 아니었다. 일찍이 하이도(下二道)의 군적 순찰사(軍籍巡察使)가 되었는데, 세조(世祖)의 뜻이 사려(師旅)를 확장하는 데 있는 것을 알고 오직 받들어 순종하여 군액(軍額)을 늘리기에만 힘써서, 한산(閑散)한 문무과(文武科) 출신과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다 군열(軍列)에 편입하여 비록 심한 폐질이 있는 자라도 혹 면제되지 못하는 수가 있었으며, 종사관(從事官) 양진손(梁震孫)은 더욱 각박하였으므로, 원망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하였다.】
≪출전 : 성종실록 89권 성종9년 2월24일(정사)≫
▣ 김항용 -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영윤 -
▣ 김주회 -
▣ 김항용 - 홈에 올립니다.
▣ 김상석 - 상세한 내용 잘 보았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