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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충렬공의 주변인물들 (32)원부(元傅)-원주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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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0-13 18:06 조회1,5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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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원주 원씨(原州元氏)
 원주(原州)는 강원도 원석군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인데 신라시 대(新羅時代)에 북원소경(北原小京), 940년(고려 태조 23)에 원주로 고쳤다. 그후 일신현(一新縣)·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 등을  거쳐 원주목(原州牧)이  되었으나 1310년 성안부(成安府)로 강등, 1353년(공민왕 2)에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1895년(고종 32) 원주목(原州牧)이 되었으며 1955년 일부가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원씨(元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양왕(襄王 : 제18대 왕, 재위기간 : 기원전 651∼619) 때 위대부(衛大夫)에  봉해진 원훰(元 )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원씨(元氏)의 시조(始祖)는 643년(고구려 보장왕 2) 당(唐)나라  태종(太宗 : 제2대 왕 재위기간  : 627∼649)이 고구려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원 경(元 鏡)이다.
 원주(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원씨(元氏)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운곡공계 耘谷公系 : 원경을  시조로 함)·원성백계(原城伯系 : 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시중공계(侍中公系 : 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 등 크게 세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하고 있으며,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원충갑(元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 최근에 그가 원성백계(原城伯系) 극유(克猷)의 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合譜)가 되었다.
 
각 계통별(系統別)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운곡공계(耘谷公系)에서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의 7세손 천석(天錫)이 유명했다. 그는 고려  말에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득세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고향인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다. 학문과 문장이 당세에 유명하여 방원(芳遠 :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신조(新朝)에 불사(不仕)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여사제강(麗史提綱)」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여러번 요직에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이  그를 만나러 치악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치악산 계곡으로 피신하여 끝내 태종을 만나지 않았다. 태종이 계곡의 석대(石臺)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천식의 아들 형(泂)을 풍기 감무(豊基監務)로  삼았으며, 태종이 앉았던 바위는 <태종대(太宗臺)>로 불렀다고 한다. 운곡(耘谷)  천석은 치악산에 묻혀 살며 망국(亡國) 고려(高麗)를 회고하는 야사(野史)  6권과 시사(詩史) 2권을 저술하여 운명할  때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그리고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며 열어 보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불에 태웠다고 한다. 운곡(耘谷)의 증손 보륜(甫崙)은 세종(世宗) 때 지평(持平)과 교리(校理)를 역임했고, 6세손 황( )은 선조(宣祖) 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진해(振海)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필명(筆名)을 떨쳤다.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던 극유(克猷)의 후손에서는 좌복야(左僕射)  진(瑨 : 극유의 9세손)의 아들 부(傅)가 고려 원종(元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는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고금록(古今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한편 첨의평리(僉議評理)  선지(善之 : 부의 손자)의 아들 송수(松壽)는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왕(王)을 호종하여 피난한 공(功)으로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신 돈(辛 旽)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그 울분으로 병사했다. 특히 시문(時文)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송수의 아들  상(庠)은 고려말에 김 저(金 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 색(李  穡)과 함께 혹형을 당한 끝에 정몽주(鄭夢周)의 구제소(救濟疏)로 광주(光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장단(長湍)의 대덕산(大德山)에 은거(隱居)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났었던 창명(昌命 : 상의 아들)은 세종 때 조견례(朝見禮)를 올리려 궁전에 들었을 때 난간에 중(僧) 옷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그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임금에게 배알하여 "상감께서는 신 돈(辛  旽)이 나라 망친 일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 금중(禁中)에 승니(僧尼)의 자취가 있으니 전철을 밟을까 저어합니다"라고 말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인맥(人脈)으로는 별장(別將) 헌(憲)의 아들  호(昊)가 유명했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그는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王位) 찬탈 음모가 무르익어가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있다가 병을  핑계하고 벼슬을 버린 후  원주(原州) 남송촌(南松村)에 은거(隱居)하였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내쫓기자 호(昊)는 열월 서쪽에 집을 짓고 조석(朝夕)으로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예(禮)를 다했으며, 단종이  사사(賜死)당하자 3년상을 치르고 원주 옛 집으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이 수년이 지나도록 얼굴 한번 볼  수 없었을 만큼 폐문불출하였다.
 세조(世祖)의 좌익공신인 조카 효연(孝然 : 원산군 황의 아들)이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찾아와 문 앞에서 뵙자고 간청했으나 그는 방  안에서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세조가 호조 참의(戶曹參議)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내가 죽거든, 업어다 앉히라"고 과격하게 불응했다.
 어느날 강원도 관찰사가 도사처럼 평복차림으로 호를  찾아 갔을 때 야인인줄로만 알고 나가 맞았다가 보니 관찰사라 손을 내두르며 도망쳐 방안에 들어가서 고리를 잠그고 자기 있는 동(東)쪽으로 머리를 향했고, 그가 사는 남송촌도 관부(官府)에  가까워 그 오예(汚穢)의 기운이 젖어든다는 이유로 보다 골짜기가 진 주천현(酒泉縣) 산골로 들어가 평생을 마치었다. 임진왜란 때 아들 유남(裕男)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호(豪)는 김덕수(金德壽)의 문인으로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1567년(명종 22) 무과로  진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미포(龜尾浦)·마탄(馬灘)·운무(雲霧) 등지의 작전에서 전공을 올려 적진(敵陣)을 여주에서 완전히 봉쇄했던 지장(知將)이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겸 경기·강원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북로(北路)의 왜군 토벌 임무를 맡고 김화(金化)로 진군 도중 적의 복병을  만나 포위되어 깊은 산 낭떠러지 끝으로 몰리게 되자 투신하여 살신(殺身)하였다. 적군은  호(豪)의 머리를 잘라 김화(金化) 고을 성문(城門)에 매어달고 <조선 군사와 백성이 모두 귀순했는데 원 호만이 우리에게 항거하였기로 이같이 벌을 준다>라는 글귀를 써붙여 놓았다. 특히 호는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은(銀)의 고장인 단천(端川)의 군수(郡守)로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은반지 하나를 사 낀 일이 있었다. 이를 본 호는 <은고지(銀庫地) 원으로서 은물건을 우리집에 두다니......>하며 아내와 물건을  사온 종을 매질하고는 은가락지를 빼앗아 버렸다.
 호의 아들 유남(裕男)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용력(勇力)으로 이름을 떨쳤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 3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유남과 함께 인조반정에 유공하여 정사  2등공신으로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던 두표(斗杓)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어영부사(御營副使)로  남한산성을 수비했고, 효종(孝宗) ㄸ 좌찬성(左贊成)·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그밖의 인물로는 목사(牧使) 명귀(命龜)의 아들 경하(景夏)가 영조(英祖) 때 이조 및 병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문장(文章)과 검소한 생활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계손(繼孫)은 시(詩)·서(書)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져 학문(學問)과 충절(忠節)을 지켜온 원주 원씨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남한에 총 24,538 가구, 102,7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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