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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우리가문 어영대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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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24 18:17 조회1,4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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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청은 훈련도감과 같이 수도 방위는 물론 왕권 호위(護衛)를 전담하는 관영이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가문의 어영대장을 찾아 보니 김응해, 김중기, 김흡 세분이 있는데 모두 부사공파입니다.





■ 金應海



◇新完譯 大東奇聞 上,中,下 (2000, 이민주 역, 명문당)

中 p242 金應海는 아홉 화살이 가슴을 뚫었어도 다시 살아났다.



김응해는 응하의 아우이니 丙子에 원수의 천거로 별장이 되어 정방산성을 지켰다. 12월에 청나라 군사가 바로 한성으로 달려가자 응해가 輕騎 3백을 거느리고 대로를 막고 싸우니 청나라 군사가 두어 겹을 포위하였다.

응해는 스스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크게 외치기를 "심하 싸움에서 버드나무 밑에서 눈을 부릅뜨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던 자가 곧 내 형님이다. 이제 내가 힘이 다하여 능히 너를 섬멸하지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우리 임금께 보답하며 죽어서 내 형을 본단 말이냐?" 하고 드디어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쳐서 죽인 것이 몹시 많았다.

이에 스스로 목을 찌르니 적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비로소 물러갔다. 그러나 偏稗(편패)가 어지러운 시체 속에서 그를 찾으니 아홉 개의 화살이 가슴을 뚫었다. 이미 다시 살아나서 임금이 그를  奬(포장)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벼슬이 ●어영대장에 이르렀고 70세에 글을 올려 물러날 것을 빌었다. <명장전>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 2003/06/02 13:20 (from:61.40.36.147) 조회 : 62

김응해장군신도비(번역문)



공(公)의 이름은 응해(應海)요 자(字)는 군서(君瑞)이다. 심하(深河) 싸움에 손에 큰 활을 들고 갑옷입은 철기(鐵騎) 수십만을 거느린 유하장군(柳下將軍) 응하(應河)의 아우이다.

만력(萬曆) 병진(丙辰)에 무과(武科)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그 형의 장열(壯烈)했던 것으로 해서 차서가 없이 발탁해서 썼는데 가있던 관청마다 염결(廉潔)로 일컬어졌다.



병자(丙子) 난리에 원수(元帥) ★자점(自點)이 위에 청해서 공으로 ♠별장(別將)을 삼았고, 十二월에 오랑캐가 바른 방향을 엿보지 않고 바로 중국 서울로 달려오자 공은 어영군(御營軍) 三백명을 거느리고 적의 길을 가로막고 수십합(合)을 서로 싸워 이기고 지는 것이 서로 같았는데 우리에게는 구원병이 없고 적이 오는 것은 날로 늘어났다. 이에 공은 뜻을 결정하고 성을 등지고서 말 하나를 빌려 탔더니 문득 오랑캐의 화살에 맞고 쓰러진다.



이에 공은 도보(徒步)로 동선암(洞仙巖)에 의지하여 활을 당기고 서있으려니 이때 다섯명의 적이 공의 앞으로 돌아서 나오고 있었다. 공이 세사람을 쏘아 죽였더니 그 중의 한 적이 소리치고 뛰면서 칼이 거의 공의 몸에 닿는 것을 공이 칼을 빼어 마침내 그 적을 죽였다.



그러나 공은 기운이 다해여 능히 힘을 낼수가 없게되자 적들이 그 틈을 타서 쳐들어오니 공은 스스로 헤아리기에 능히 벗어날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미 칼을 빼어 스스로 목을 찔렀다. 이윽고 적이 물러간 뒤에 편비(偏裨)들이 어지러운 시체 속에서 공을 찾았는데 오히려 눈을 감지않고 노한 기운이 싱싱했다. 이에 떠메어 가지고 성으로 들어와서 만금양약(萬金良藥)을 써서 구원해 놓고 그 도포와 갑옷을 살펴보니 아홉화살이 거의 가슴을 뚫어서 그 나머지는 화살촉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아 아! 형은 심하(深河)에서 죽고 아우는 동선(洞仙)에서 죽었으니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은 것이 비록 다르나 그 마음으로 천지에 맹세하고 삶을 버려 의리를 취한 것은 가위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하겠다. 안평원(顔平原) 이후 천여년에 아우와 형이 함께 절개를 지킨 것이 몇사람이나 되는가. 우리나라로 하여금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 무겁게 만든 것은 누구의 힘이었던가.



정축(丁丑) 八월에 ♠부총관(副總管)에 제수했고, 조정에서 비로소 큰상처 나은 것을 살펴서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내보냈다가 이윽고 ♠우병사(右兵使)로 옮겼고 신사(辛巳)에는 ♠평안병사(平安兵使)에 배하고 갑신(甲申)에는 ♠통제사(統制使)에 승진 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어영대장(御營大將)겸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제수 되었으며 그해 여름에 특별이 ♠총융사(摠戎使)에 임명 되었다.



신묘(辛卯)에 ★자점(自點)의 옥사(獄事)로 일어나서 공의 이름이 적의 입에서 나오자 드디어 죄를 다스렸으나 공사(供事)가 순박하고 정직해서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조사한 서류가 위에 올라가자 임금은 말하기를 “응해(應海)의 충절(忠節)이 그 형만 못하지 않으니 적의 말은 거짓이니 즉시 석방하라.” 하고 즉시 ♠북병사(北兵使)에 배하니, 공의 순충(純忠)함이 여기에서 더욱 널리 나타나서 크게 울렸다. 그뒤에 ♠총융(摠戎), ♠대장(大將), ♠중추(中樞)의 명령이 해마다 계속 되었고 ♠춘천부사(春川府使)에 이르러서는 힘쓴 것이 전보다 더하였다. 계묘(癸卯)에 ♠부총관(副總管)으로서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계속해서 선인(先人)의 묘소(墓所)에 성묘할 것을 청하고 드디어 철원(鐵原)으로 돌아갔다.



대개 공의 뜻은 나이가 七十이 넘었고 국가가 조금 편안한지 옛신하가 이 때에 돌아가 쉬지않는다면 무엇을 기다리랴 하고 짐짓 한번 누어서 딴일을 돌아다 보지 않았으니 공은 가위 어진 것이 보통사람과 많이 달랐다. 애가 ♠통제사(統制使)의 사람됨을 보건대 입으로 능히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오직 그 충실한 마음이 낯과 등에 넘쳐 흘렀다. 병오(丙午) 二월 十五일에 병이 없이 세상을 떠나니 선영(先塋) 곁에 장사 지냈다.



공의 계통은 안동(安東)에서 나왔으니 상락공(上洛公)의 자손이다. 조부의 휘(諱)는 인이니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아버지의 휘(諱)는 지사(地四)이니 증참판(贈參判)이다. 우후(虞侯) 선산(善山) 김충로(金忠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무자(戊子)에 공을 나았다. 공은 난지 겨우 六세에 양친(兩親)을 모두 잃고 오직 형제가 서로 의지 하면서 자랐다. 공의 부인은 동주최씨(東州崔氏) 낙후(洛厚)의 따님으로 一남一여를 낳았으니 남(男)은 극련(克鍊)이요, 딸은 진사(進士) 심구(沈絿)에게 출가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기운은 전일(專一)하고 용맹은 깊으며

세운 것은 공손하고 마음은 조심했네.

조심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 있으니

창자에 가득한 빛나게 붉은 충성 이었네.

의리에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요행으로 나는 것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았네.

확실하게 돌보다 더 단단하게 마음을 지켰으니

이것이 위로 푸른 하늘에 이르렀네.

부절(符節)을 차고 절개를 세웠으니

어느곳에 빙벽(氷蘗)을 쓰지 않으랴.

그 길이 빛나 돌에 새겨 드리우네.



판중추부사 용주 조경 찬







■ 金重器



◇작성자 :태영/문 작성일 : 2002/07/08 22:26 (from:211.201.5.68) 조회 : 32

Re:시군지순례 26-4.(철원군 : 인물. 유적목록) 중 휘重器 할아버지



?-朝鮮 英祖 11년(1735)

조선 영조(英祖) 때의 무신. 자는 대기(大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고, 숙종(肅宗) 29년(1703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숙종 32년(1706년)에 는 ♠총융사(摠戎使)로서 북한산성의 축성을 건의하였다. 경조(景宗) 대(代)에는 ♠한성부 좌윤(左尹), ♠포도대장, ●어영대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나, 영조(英祖) 즉위 초에는 소론(小論)이라고 하여 면직되기도 하였다. 영조(英祖) 3년(1727년)에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영조(英祖) 4년(1728년)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총융사(摠戎使)로서 수원(水原)에서 난군(亂軍)을 토벌할 때 미온적으로 난군에 대처하였다고 하여 파직 당한 후 안치(安置)당하였다. 그후 의금부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다.







■ 김흡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흡(金#흡04)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1723년(경종 3) ♠남병사(南兵使)를 거쳐 1727년(영조 3)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 1729년 우의정 이태좌(李台佐)의 신임을 받아 조현명(趙顯命) 등과 함께 《군공별록 軍功別錄》을 다시 수정하기도 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취임하였다. 그뒤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하여 1733년에는 ♠우포도대장이 되고, 2년 뒤에는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1737년 ●어영대장에 올랐으나 4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광해군 때의 명장이었던 응하(應河)의 후손으로 비록 문음(門蔭)으로 시작하였으나 대장까지 올랐다. 기강문란은 용서하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근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金昊鍾〉







■ 어영청지(御營廳址)



어영청(御營廳)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현재 종로구 인의동 48번지 2호의 서울 전매지청(專賣支廳) 자리가 된다. 어영청은 훈련도감과 같이 수도 방위는 물론 왕권 호위(護衛)를 전담하는 관영이었다.

어영청이 설치된 것은 인조 원년(1623)으로 인조가 반정에 성공하자 후금(後金)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펴면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친정(親征)하려는 계획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어영청이 독립된 군영으로 정비된 것은 인조 6년(1628) 이후이다. 또한 어영청이 크게 확대된 것은 효종 3년(1652) 이완(李浣)이 어영대장(御營大將)을 맡으면서 북벌계획의 본영(本營)이 되었고 이 때부터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註]

어영청도 훈련도감과 같이 도제조(都提調) · 제조(提調)의 군사 자문 밑에 어영대장을 정점으로 중군(中軍) · 별장(別將) · 천총(千摠) · 기사장(騎士將) · 파총(把摠) 5명, 초관(哨官) 41명, 훈련전담의 교련관 12명, 기패관(旗牌官) 11명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그 예하에 숙위(宿衛) 임무를 직접 담당하는 군사가 편제되어 있었다. 특히 기사장의 지휘 아래 기병 등의 군사와 향군(鄕軍)의 교대 번상(番上)이 있고 지방에 겸파총(兼把摠)을 두어 향군들이 지방에 내려가면 이들의 훈련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 김항용 - 잘 정리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 솔내~~~~~~~ -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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