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문온공파 사인공계 현감공 시제(충북 진천)

페이지 정보

김윤식 작성일03-10-28 12:08 조회1,990회 댓글0건

본문

문온공파 사인공계 현감공(휘 自均) 시제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04%2EJPG

현감공 묘비와 문인석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4%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23%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2%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3%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08%2EJPG

초헌관 창회 종손

현감공 시제

현감공(휘 自均)께서는 문온공(휘 九容)의 증손으로
진천 현감을 지내셨습니다.
현감공 시제는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입니다.
묘소 위치는 충북 진천군 이월면 신월리 뒷산입니다.
현감공 배위는 파평윤씨로 부사 윤홍(尹洪) 공의 따님이십니다.

현감공께서는
휘 석문(碩文 진사), 휘 의문(義文 생원), 휘 익문(益文 진사, 세마공), 휘 순문(順文) 등
아드님 네 분과 따님 한 분을 두셨습니다.
큰 아드님 진사공(휘 석문)이 바로 수안군 입향조이십니다.
진사공의 맏아드님(휘 觀) 후손은 충북 진천에,
둘째 아드님(휘 구)과 셋째 아드님(휘 峴)의 후손은 황해도 수안군에 각각 세거하며
남북 분단 이전까지 서로 왕래하면서 시제를 모셨다고 합니다.
현감공의 둘째 아드님(휘 의문)과 넷째 아드님(휘 순문)께서는 후사가 없으시며,
셋째 아드님 세마공의 후손은 그리 많지 않으십니다. 

진사공(휘 석문)의 묘소는 황해도 수안군 남면 문동산인데,
이번 시제에서 태욱 어르신의 증언으로 칼산이 문동산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곧 관련 자료를 찾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계획입니다.
그 동안 진사공 묘소 확인에
큰 격려를 보내 주신 종친 여러분께 머리 숙여 인사 올립니다.

아울러 진사공께서 수안으로 낙향하신
까닭을 밝혀 낼 수 있는 단초를 확인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좀더 시일을 두고 밝혀내야 할 사항으로
자세한 내용 검증이 끝나는 대로 별도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산신제와 현감공 시제 봉행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09%2EJPG

도장법으로 모신
현감공과 세마공 묘소(위)

산신제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05%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5%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6%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06%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9%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7%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8%2EJPG

아헌관 무묵 종친(큰 사진)과
종헌관 태국 종친(오른쪽 아래)

현감공 후손 중 종인 수가 가장 많은 곳은
황해도 수안군입니다.
그러나 6.25동란 당시 월남한 종인 수가 
40여 호에 지나지 않은 데에다
종인 수가 많지 않은 세마공 후손들은
진천에 거주하는 분이 거의 없고,
대부분 수도권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문에 요즈음에는 매년 시제에 모이는 종인 수가
불과 10명을 갓 넘을 정도입니다.

현감공 시제에는 종손이신 창회 종친께서 초헌관,
무묵(초명 무영) 종친께서 아헌관,
태국 종친께서 종헌관을 각각 맡으셨습니다.

세마공 시제 봉행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10%2EJPG

세마공 묘소와 문인석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01%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26%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28%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02%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22%2EJPG

옛 상석과 문인석이
잘 보존된
세마공 묘소(맨 위)와
제물 진설 및
시제 봉행 장면

현감공에 이어 세마공 묘소로 올라가 시제를 봉행하였습니다.
세마공 묘소에는 옛 상석과 규모가 상당히 큰 문인석이 좌우에 있습니다.
동자석 한 쌍은 안타깝게도 3년여 전에 몹쓸 손을 타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헌관은 세마공 후손이신 영광 종친을 비롯해 재명 종친과 창회 종친께서 맡으셨습니다.
세마공의 상석 규모나 문인석 크기 등은 차후에 자세히 조사할 계획입니다.

 

세마공 계열 할아버지 시제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31%2EJPG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시는
영광 종친과 창회 종손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29%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30%2EJPG

헌작 중인 원회 종친(아래 사진)과 영광 종친(가운데 사진)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33%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41%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37%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35%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39%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40%2EJPG

내년에나 만날 텐데...음복주 한 잔을 더 권하는 어르신들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36%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44%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45%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38%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03%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43%2EJPG

file_down.asp?redirect=%2Fdata%2F2003%2F10%2F28%2F03J46%2EJPG

산 속에
방치된
석물
흔적들

초계 정씨 종손 어른
(오른쪽 맨 아래 사진의
가운데)

세마공 계열 할아버지 묘소는
현감공 묘소가 있는 산 너머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분들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현지 사정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계획을 세워 조사할 예정입니다.
현감공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장법으로 모셨습니다.
위쪽 묘비가 있는 쌍봉이 아드님이십니다.

묘비 뒷면에 바위이끼가 앉아 탁본을 뜨지 않고서는
내용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간신히 뒤쪽 몇 글자를 읽어 보았더니
백곡(휘 득신) 할아버지께서 비문을 지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반가운 내용이었습니다.
병천 잣골이 지척이기도 하거니와
서로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옆쪽 산모롱이에 또 한 분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회 어르신 말씀에 따르면, 이곳은 고려시대에
중국(원나라) 어느 왕(또는 노국공주)의 적삼이 바람에 날려와서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 무덤을 썼던 곳이라 합니다.
원회 어르신께서는 아주 어려서 어른들 손을 잡고 이곳 시제에 따라오셨는데
그때만 해도 주위에 장군석과 문인석, 묘비 등이 서 있었으며
그 규모가 대단했다 합니다.

문인석뿐만 아니라 장군석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사 무덤이 아닌 듯한데
애석하게도 모두 도굴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합니다.
소나무숲으로 들어가 둘러보니
이곳저곳에 쓰러지거나 파묻힌 석물들이 제법 눈에 띕니다.

맨 마지막으로 시제를 모신 할아버지 묘소 옆에는
초계 정씨 선영과 바로 붙어 있었습니다.
초계 정씨 선영 맨 위쪽에 모셔진 어른의 배위가 우리 안동김씨라 하십니다.
그 외에도 이곳 초계 정씨 집안과는 혼사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초계정씨 측의 협조로 이곳에 묘소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 초계 정씨 종손 어른께서 시제 지내는 곳으로 찾아오십니다.
영광 종친과는 죽마고우이신 듯합니다.
서로 농도 건네며 "친구야!" 하고 부르고 화답하는 그 목소리가 정겹습니다.

우리 집안도 그 정겨운 목소리, 웃는 얼굴이
날마다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 문온공파 사인공계 현감공 시제 보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찾아가는 길은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1년 전 주회 대부님께서 안내 약도를 요청하셨는데 이제야 준비하고 있습니다.
▣ 김태영 -
▣ 김항용 - 잘 정리된 내용을 사진과 같이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잘 보고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상석 - 미려하고 섬세 한 자료 설명이 편집기술과 어우러져 마치 병풍을 대하는 듯 시원 합니다.
▣ 솔내 - 함께 하고 싶었는데... 사진과 글로라도 보니 좀 위안이 됩니다.
▣ 김주회 -
▣ 김발용 - ㅎ~ㅎ 정작 본인의 사진은 없지요. 그래도 뿌듯함은 충만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