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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 안동김씨 03---청풍군수, 청풍문화재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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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31 07:00 조회1,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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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3/10/08 18:53 (from:220.70.61.159) 조회 : 32

판돈녕부사 김구덕(金九德)의 졸기(卒記)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졸(卒)하였다.

--구덕은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이니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여러번 사헌 규정(司憲糾正)으로 천전(遷轉)되어 잡단(雜端)과 형조 의랑(刑曹議郞)을 거쳐 나가서 단양(丹陽)·★청풍(淸風)·한주(韓州)의 세 군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전직되어 지사간(知司諫)으로 옮기고, 또 해주(海州)·광주(廣州)·청주(淸州)의 세 주(州)의 목사(牧使)와 연안 부사(延安府使)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다.

--딸이 태종전(太宗殿)으로 뽑혀 들어와 명빈(明嬪)이 되었으므로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승진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조금 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졸(卒)하매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안정(安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화합함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사람들을 예(禮)로서 대접하고 평소에 사장(詞章)을 좋아하여 시(詩) 읊기를 폐하지 않았다.

--아들은 김오문(金五文)이었다.

≪출전 : 세종실록 39권 세종10년 3월10(임진)≫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9세에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지냈고,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郎)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현재의 堤川)·한주(韓州: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광주·청주목사를 지냈다. 이어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1401년 태종 11)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1414년) 다시 한성부윤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예로써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시호는 안정공(安靖公)이다.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3/04/24 00:20 (from:61.75.59.154) 조회 : 60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안동김문 제 선조님(2)

제2권 p452<★청풍군 명환(名宦) 본조(本朝) ; 김연수(金延壽)>

--신증 김연수(金延壽) : 정치에 맑고 간략한 것을 숭상하였다. 처음에 고을 사람이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를 얻자 신(神)이라 하여 매년 5, 6월 사이에 객사 대청에 받들어 두고 크게 제사를 벌리니, 온 경내가 모두 모여 들어서 폐단이 된 지가 오래었다. 연수가 관에 부임하매 곧 무당과 그 일을 시초한 자를 잡아서 곤장을 때리고, 드디어 그 나무 허수아비를 불태우니 요망한 제사가 끊어졌다.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 2003/10/23 10:07 (from:211.239.250.199) 조회 : 47

청당 김양공외 5위분



3. 김경(金坰) [1583 ~ 1646](선조16~인조24)

자:숙평(叔平) 초휘:균(均) 성균관 생원

정축(丁丑) 문과급제 형조정랑(刑曹正郞),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청풍군수(淸風郡守)등 역임. 贈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墓碑銘: 外贈孫 이조판서(吏曹判書) 박권(朴權) 書

配: 전주이씨(父: 郡守 李培達)



★청풍군수 김경(金坰)이 중수한 응청각(凝淸閣)에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응청각기(凝淸閣記)를 지었다. (청풍문화재단지)



김경(金坰)을 낭천현감(狼川縣監)으로 삼았다. 김경은 상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친구이므로 은총이 매우 융숭 하였다.<인조실록 6년2월14일(병오)>







■ 제천 청풍 응청각

유 형 : 도지정유형문화재

한 자 : 堤川 淸風 凝淸閣

지정일 : 1981.5.1

시 대 : 조선시대

전 화 : 043-640-5711

관 리 : 제천시 문화관광과

주 소 :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청풍문화재단지내)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90호



19C초의 건물로 추정되며 관아의 부속건물로서 부사가 휴식을 취하고 공무차 내려온 중앙관속들이 객사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창건 연대 미상으로 19세기초의 건물로 추정되며 관아의 부속건물로서 부사가 휴식을 취하고 공무차 내려온 중앙관속들이 객사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상층은 우물 정자 마루를 깔고 주위에 난간을 돌렸으며 남동쪽으로 3단의 목조를 두었다. 하층은 기둥사이에 흙벽을 쳐서 창고등으로 사용한 듯 한데, 어간과 좌측 협간 내부에는 토석이 가득 쌓여 있었다.

평면은 3칸, 측면은 2칸 전면은 칸 사이가 등 간격이나 측면으로 보아 전면칸은 후면칸보다 약 1/2이 적어졌다.

참고/관련자료 : 응청각설명판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02/28 19:44 (from:211.57.153.114) 조회 : 59

청풍한벽루 (충북제천)을 노래한 시



제영堤詠 (1996, 내제문화연구회, 이종○ 편역) 이라는 책은 충북 제천지역을 노래한 시를 모아 번역하여 놓은 향토사 자료입니다.

이 책에 보면

金忠甲 공의 시 2수 (한벽루, 청풍부)

金時讓 공의 시 3수 (한벽루, 서도중운, 청풍운) 이 실려 있습니다.



●寒碧樓 ---金忠甲

寒碧樓前水泊天 一春光景自風烟

江山勝處逢佳友 還把難盃惜共傳

渡江西下 微風 ○○飛欄府半空

水色山光凝碧處 魚舟來往淡姻中

한벽루 ---김충갑

한벽루전수박천 일춘광경자풍연

강산승처봉가우 환파난배석공전

도강서하양미풍 ○○비난부반공

수색산광응벽처 어주래주담인중



한벽루 앞엔 물도 하늘도 맑아

봄 한철 아름다운 광경은 자연의 풍인이요

산수 좋은 곳에서 좋은 벗을 만나

헤어짐의 술잔을 잡으니

맑은 강은 서쪽에서 부는 미풍에도 파도가 이니

고요하고 아늑하게 날아 반 공중에 엎드린 듯

물빛 산빛이 푸르게 엉킨 곳에

고깃배 오락이니 엷은 안개 속이네

*金忠甲 : 참고할 기록이 없다.



● 淸風府 ---金忠甲

陜中遊興晩來夕 雨後春光(삼수변張)碧波

扁舟綬(열십변悼)滄州暮 隔岸人烟有幾家

청풍부 ---김충갑

협중유흥만래석 우후춘광장벽파

편주수도창주모 격안인연유기가



좁은 골 가운데 노는 흥이 저녁 늦으막에 오고

비온 뒤의 봄 빛에 푸른 물결이 넘치니

느린 돛대로 가는 쪽배는 창주길이 저문데

막힌 언덕에 연기 어리니 몇 집이나 있는지―



● 寒碧樓 ---金時讓

眞偶遂碧溪流 行盡山川第一洲

千里遠裝仍不寐 五更殘月獨登樓

江城春晩花如海 極浦風來水蕩舟

直欲吹(죽머리肅)從羽客 不知何處是瀛洲

한벽루 ---김시양

진우수벽계류 행진산천제일주

천리원장잉불매 오경잔월독등루

강성춘만화여해 극포풍래수탕주

직욕취○종우객 부지하처시영주



우연히 참됨을 찾아 푸른 시내의 흐름을 따르니

두루 산천을 다녀 봤어도 이 곳이 제일 좋은 곳이네

천리 갈 갈 행장에 잠이 오지 않아

달지는 오경에 홀로 루대에 오르네

늦은 봄 강성에는 꽃이 어우러져 바다와 같고

극포에 부는 바람은 물에 배가 흔들려도

퉁소를 불고 싶어 손을 쫓으니

어느 곳이 영주인지 알지 못하네



● 西道中韻 ---金時讓

匹馬辭金關 秋風客路長

黃花初扶路 白露欲爲霜

海近雲烟暗 山(禾+周)草樹荒

鄕關何處是 回首更茫茫

廣程空館夜 ○枕意何長

惟伴燈前影 西風排戶冷

秋草滿庭荒 月下思歸 

 音意○茫 地接滄溟盡

天運(초두머리尉)島長 風來凝下雨

天冷歎飛霜 池面蓮將倒

階邊菊己荒 秋依兼別恨

江樹自微茫 客窓秋欲暮

公館漏初長 月白 鳴夜

風高○(口+斗)霜 千山愁外遠

三○夢中荒 驛路休四首

都心正(木+日)茫



서도중운 ---김시양

필마사금관 추풍객로장

황화초부로 백로욕위상

해근운연암 산주초수황

향관하처시 회수경망망

광정공관야 ○침의하장

유반등전영 서풍배호냉

추초만정황 월하사귀근

공음의○망 지접창명진

천운○도장 풍래응하우

천랭탄비상 지면연장도

계변국기황 추의겸별한

강수자미망 객창추욕모

공관루초장 월백공명야

풍고○○상 천산추외원

삼○몽중황 역로휴사수

도심정○망



말머리 돌려 금관에 사례하니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길은 먼데

들국은 피어 갈 길을 붙드네



이슬은 서리가 되어 내리려 하는데

바다 가까이엔 서려 있는 구름 안개에 어두워지네



산은 첩첩한데 풀과 나무는 추색을 띠니

고향은 어느 곳인가?



머리를 돌리면 망망할 뿐

사방으로 난 넓은 길에 여관은 비었는데

베게가 정이 가는 것은 무슨 뜻일까?



등불과 짝을 하니 앞에 그림자만 길고

누가 내 귀밑의 서리를 보고 측은타 하리



가을 바람 문 밀고 들어와 방은 차갑고

가을 풀 뜰에 가득히 풀기 잃었네



달 밝으니 마음은 간절한 고향을 가고

삼 삼는 지렁이 소리에 뜻은 어찌 아득할까?



땅은 바다와 닿으면서 끝이 나고

하늘은 위도에 접해서 멀구나



바람소리에 비오는 줄로 속으면서

날이 차니 서리도 내리겠구나



연못에는 연꽃이 이울고 뜰에는 황국이 지는데

쓸쓸한 가을에 헤어짐의 한을 겸하니 강가의 나무들도 쓸쓸하네



공가에도 처음으로 길게 집이 새나니

달 밝아 지렁이도 우는 밤인데

바람은 차고 기러기 울어예니 서리도 내리겠네



많은 산은 시름 밖에 멀리 서 있고

깊은 밤에 꿈은 거칠어

역마길 일년 내내 쉬고 있으니

고향으로 달리는 마음 아득하구나

*金時讓(김시양) : 淸風韻 참조할 것





● 淸風韻 ---金時讓

--- 추후 보완 예정 ---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02/28 19:45 (from:211.57.153.114) 조회 : 34

Re:청풍한벽루 (충북제천)을 노래한 시



종 목 보물 528호

명 칭 ●청풍한벽루 (淸風寒碧樓)

분 류 누(정).각 수 량 1동 지정일 1971.01.08

소재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시 대 조선 인조 소유자 국유 관리자 제천시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올려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 위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다.

구조는 앞면 4칸·옆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옆면 1칸의 계단식 익랑건물이 이어져 있다.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명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

이 건물(建物)은 고려(高麗) 층숙왕(忠肅王) 4년(1317)에 청풍현(淸風縣)이 군(郡)으로 승격되자 세운 관아(官衙)의 부속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누(樓)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중층(重層) 팔작집으로, 서축의 누에 오를 수 있도록, 정면 1칸 측면 3칸의 측랑(側廊)이 부설돼 있다. 누의 공포(包)는 이익공(二翼工)이고 측랑(側廊)은 초익공(初翼工)이며, 누는 부연(浮椽)이 있는 겹처마이나 측랑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동측 합각 밑을 가리기 위해 우물천장을 일부 가설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6년(1406)에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重修)하고, 고종(高宗) 7년(1870)에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하였으며, 1972년 8월 19일 수해 때 붕괴된 것을 1976년 4월에 다시 복원(復元)하였다.







▣ 김발용 - 늦은시간에 잘 보았습니다. 별고 없으시지요.

▣ 김윤만 - 청풍 문화재단지도 우리와 연관이 많군요.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솔내 - 이번(시제때) 눈여겨 보아야 겠습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식 -

▣ 김은회 -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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