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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祉(김지)의 활동 및 교유관계.(주관육익. 선수집 편자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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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3-11-04 04:49 조회2,3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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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활동 및 교유관계


  공민왕대 이후에 사대부들은 점차 정치 세력화하면서 새로운 국가 운영을 모색해 가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공민왕 16년에 성균관 중영을 계기로 자신들의 인적 결합을 공고히 해가고 있었고, 국가 운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해 갔다. 그런 가운데 이들은 유교 경전이나 역사 책 등에서 자신들의 개혁방식을 찾아내려 했었다.
  김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가 공부했던 곳은 여택재이다.(자료A) 여택재는 고려 중기인 예종 4년 7월 국학에 두었던 7재중에 하나이며, 『주역』을 강론한 곳이다.20)
  그는 이곳에서 경서에 대한 기초지식을 습득하였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주례』에 대해서도 유의했을 것이다. 이 점은 고려 후기 이후에 ‘고제’의 운영 원리에 입각한 개혁 방안의 모색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그 제도 원리로써 이 책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원 간섭기 이후에 고려 유지들은 원나라 문인들과 활발한 교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21) 양자의 교우가 주자학의 수용에서 큰 역할을 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원나라 문인들은 이 『주례』를 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주례』를 『주관』이라고 많이 불렀다.22) 그보다 앞서 이 책은 송대에도 왕안석에 의해 제도개혁의 근거로서 주목받기도 하였다.23)
  따라서 김지가 이 책에 주목했던 것은 당시 사대부들의 국가 운영에 대한 위기의식의 고양속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경우는 과거에 급제한 해가 공민왕 11년이다. 이 때는 홍건적의 침입을 겪고 있으므로 집권자들 사이에서의 위기의식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정은 그 해 좌주가 되었던 홍언박과 류숙에 대한 재추들의 태도에서 이해된다. 당시 재추들이 좌주가 된 이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그 이유는 신하들이 그들에게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24) 관료들이 이들에게 기대한 바는 인재 등용을 통한 현실위기의 극복이었을 것이다.
  김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당시 급제자는 을과 3인, 병과 7인, 동진사 23인으로, 김지는 을과에 합격하였다.25) 여기서 그의 동년들의 명단에 주목해 보면, 병과에는 이숭인이, 그리고 진사에는 설장수, 정도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후에 정치적으로 크게 활약하는 인물들이다. 고려 후기 좌주문생과 동년관계를 고려해 볼 때, 김지는 이들과 인적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급제한 이후에 출세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처지에 대해 이색은 「증김경숙비서서(贈金敬叔秘書序)」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C)궁벽한 땅에 거처하고 용직에 있어 거의 錢財(전재)가 없기에 구입하기도 어렵고 시장도 없어 (책)을 구경하기도 어려운데 모아놓은 것이 많아 수 백권에 이르는 사람은 오직 敬叔(경숙) 뿐이다. 경숙은 임인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뜻이 문학에 돈독하고 楷書(해서)를 잘 쓰므로 뽑혀서 일찍이 表章(표장)을 썼는데 공민왕이 보고는 매우 칭찬하였다.26)

  과거 급제 이후 그는 한직인 비서랑에 있었다. 이는 전교사 정8품의 낮은 관직이다. 또한 그의 사회·경제적 처지도 위와 같이 열악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책 수집을 통해 학문적 열정을 발휘하고 있었고, 표장과 같은 문장 작성에도 능력을 보였다.
  여기서 그가 모았다는 수 백권의 책은 자신의 책인 『주관육익』『선수집』 편찬의 기초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관해

  (D)또 아무 벼슬에 있는 아무가 와서 말하길, “김경숙이 벼슬길에 나서서 그 뜻을 행하지 못하고 이제 늙어 버렸다. 이것을 나도 슬프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가 다행히 典章(전장)을 널리 구해 모아서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이것을 선생이 『주관육익』이라고 이름 지었다. 또 고금의 詩文(시문) 몇 권을 모았는데, 선생은 또 이것을 『선수집』이라고 했다.27)

  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출세하지 못했지만 많은 책을 수집하여 『주관육익』과『선수집』을 편찬한 것이다. 위의 자료에서 보이듯이 이 책들의 편찬은 김지의 학문적 열정의 소산만은 아닐 것이며, 김지의 어떤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생기는 한가지 의문은 김지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낮은 벼슬에만 머물렀던 점이다. 물론 이 시기에 김지처럼 능력이 있으나 크게 출세하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과거 동년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남는다는 점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공민왕도 칭찬할 정도의 표장 작성 능력과, 조준의 동서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에 상당한 의문이 생긴다. 더구나 김지는 조선 건국 후에 5개월만에 파직된다.

  사헌부에서 상언하기를, “쌍부감무 白天祐(백천우)는 글자도 모르고 그 직무에도 칭송이 없어서 암렴사 趙璞(조박)에 의해서 출척된 바 있습니다. 청컨대 백천우를 천거했던 예조의랑 金祗(김지)를 파직시켜서 후인의 경계가 되게 합시다”라고 하였다. 왕이 윤허하였다.28)

  이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번 등장하는 김지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서 나오는  金祗(김지)에 대해서는 앞선 연구에서 金祉(김지)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었다.29) 그 근거는 전장에 밝은 노숙한 학자가 예조에 등용되기에 알맞다는 점, 그리고 김지가 이색의 후원을 받았을 인물이라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선행연구는 백천우를 파직한 조박이 이방원의 동서이고, 개국공신 일등에 봉해진 인물이므로 이 사건은 조선왕조 개창에 이은 이색 계열의 숙청의 결과라고 보았다.30)
  당시 파면된 김지가 『주관육익』의 저자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그의 첫 이름이 金祗(김지)였다는 점, 둘째로는 자료 (B)의 태종 3년(1403)에 지어진 「이정 신도비」에 나오는 그의 관직이 ‘奉禮郞(봉예랑)’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봉예랑은 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담당한 통례원의 종6품직이다. 그런 점에서 이 관직은 예조에 소속된 예조의랑과는 차이가 있지만, 소속된 관서나 관품에서 비슷하다. 따라서 위에 등장한 김지가 『주관육익』의 저자일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필자는 김지가 이색과 같은 계열의 인물이기 때문에 숙청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가 이색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이색은 자료 (D)에서 보듯이 그의 책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그를 ‘자신의 친구(吾友)’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위화도 회군이후 사대부 계열의 정치적 분립 이전까지 지녀왔던 이색의 儒宗(유종)으로서의 지위를 고려해야 한다.31) 요컨대 김지와 이색과는 이 시기까지 대개의 사대부들처럼 우호적 관계였을 것이다. 아울러 정계의 핵심 인물이 아닌 김지가 이색과 인간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정도전·조준 계열에서 건국 후에까지 이를 문제삼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더구나 김지를 축출한 주체는 조박이 아닌 사헌부였다. 김지가 관직에서 물러난 이유는 이른바 수령 천거를 잘못한 것에 대한 연좌제에 결렸기 때문이다. 원래 수령 천거에 따른 擧主連坐制(거주연좌제)는 조준이 창왕 즉위년에 제시한 천거방안에서 제기되었다.32) 이 방안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6품 이상 관료들에 의한 수령 천거와 그 잘못에 대한 연좌제로 확정되었다.33) 김지의 백천우에 대한 천거는 이에 따른 결과이다. 그리고 백천우의 파출은 태조 원년 9월 각 도에 안렴사가 파견되자 예조전서인 조박이 양광도로 나가면서부터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때 김지의 탄핵은 ‘罪及擧主(죄급거주)’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이 규정은 원래 당율에서 유래된 것으로, 조선에서는 별도의 처벌규정이 없어 『대명율』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6품이상의 관원이 이로 인해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다른 관원들도 주로 收贖(수속)으로 처리되었다.35) 따라서 김지의 파면조치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렇다면 그의 파면사건은 신왕조 개창 이후에 새로운 법제 적용에 따른 본보기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가 높은 관직에 오르지 않은 것은 개인적 이유에서였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다음 자료를 살펴보도록 하자.

     淨書(정서)와 䕺錄(총록)의 빠르기는 神(신)과 같은데
     萬卷堂(만권당) 가운데서 또다시 봄을 지냈구려
     耳具(이구)는 총명하나 마음은 홀로 괴롭고
     形容(형용)은 말랐지만 기운은 오히려 떨치니
     조정에 (올린) 법제는 금옥과 같고
     臺閣(대각)에 (올린) 문장은 鳳鱗(봉린)과 유사하니
     이름이 서책 끝에 달렸으니 매우 다행이구나
     흰머리와 많은 병에 詞臣(사신)의 일까지 더해지는구나.36)

  이 시는 이색이 김지를 추억하며 쓴 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에서 그에 대한 몇 가지 시사를 받을 수 있다. 우선은 그의 연구와 저작에 대한 열정이다. 이 점은 앞서 나온 이색의 다른 글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위 시에서 보면 김지는 만권당에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만권당은 김지의 개인 서재이거나 관청 가운데에서 책을 모아놓은 곳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주관육익』과 『선수집』 편찬에 필요한 연구를 했을 것이다.
  또한 시의 마지막에서는 김지의 건강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흰 머리’와 ‘많은 병’이 있다는 표현은 나이가 들었다는 상투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김지가 병이 많았다면, 관직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 역시도 그의 출세와 관련된 장애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가장 유의할 점은 김지의 법제를 만들어내는 개인적 능력이다. 위 시가 시사하듯이 그는 법제 초안의 실무자로 활약했었다. 위 시에서 ‘조정에 (올린) 법제는 금옥과 같다’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사실은 그의 『주관육익』 편찬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의 법제에 관련된 능력은 1395년(태조4)에 나온 『대명률직해』 편찬작업의 실무책임자였다는 점에서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법제에 대한 능력으로 인해 태조 원년의 파면 이후에 다시 일을 하게 된다. 『대명률』의 번역에 대한 참여가 그것이다, 그는 『대명률직해』의 발문에서 이 책의 제작경위와 자신의 역할을 쓰고 있다.

  성상께서 이것을 중외에 반포하여 仕進(사진)들에게 전하여 서로 익히고 외워서 모두 법을 얻게 하였다. 그러나 문자가 통상적이지 않아 사람마다 쉽게 깨우치기 어려운데 허물며 우리나라에는 삼한 때에 설총이 방언문자를 만들어 이두라고 하여 토속으로 인해 나면서부터 익혀 능히 혁거할 수 없으니 어찌 집집마다 일러주고 사람마다 가르칠 수 있겠는가.마땅히 이 책을 이두로 읽게 하여 양능으로 이끌게 하겠다. 정승 평양백 조준이 이내 검교중추원 高士경(고사경)과 나에게 명하여 이 일을 위촉하였다. 우리들은 상세히 연구하길 반복하여 글자에 따라 직해하였다. 아아! 우리 두 사람이 먼저 초안을 만들고 삼봉 정도전 선생과 공조전서 唐誠(당성)이 후에 윤색하였다.37)

  그는 발문의 말미에 자신을 ‘尙友齌(상우재) 金祗(김지)’라고 밝혔다. 선행연구에서는 이 사람을 『주관육익』찬자인 金祉(김지)와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보았다.38)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김지의 법률에 관한 능력은 물론이고, 조준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양자는 동일인이라고 판단된다. 더구나 현재 자신의 관직을 적지 않고 ‘상우재’라고 적은 점도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태조 원년의 김지의 은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명률직해』 작업에서 주목할 점은 조준과 김지가 단지 인척관계로만 얽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준이 김지에게 이를 맡긴 것은 지금까지 법제 개혁에 관한 논의의 대상으로 여겨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울러 김지와 함께 작업한 고사경도 이색과는 관계가 있었다. 그는 우왕대 지인상서였다가 파면된 적이 있었다.39) 이색은 그러한 고사경을 불러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정도의 가까운 관계였다.40) 이는 이색과 김지와의 개인적 친분관계가 있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고사경에 대한 자료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김지처럼 법제적 실무능력으로 인해 선발되었을 것이다. 이는 『대명률직해』의 윤색자였던 당성의 능력에서도 확인된다. 졸기에 의하면 그는 중국 강절 출신으로 율령에 밝았으며, 중국관련 문서를 거의 담당했다고 한다.41) 결국 이 사실은 법제에 능력있는 인물들이 『대명률직해』 편찬에 실무자로서 참여했음을 말해 준다.
  조준의 지시와 정도전의 참여는 편찬에 관여한 정치세력이 누구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건국 이후에 주도권을 장악한 정도전과 조준 계열의 편찬의도와 목적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에 참여한 김지는 이들과 깊은 정치적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김지는 『대명률직해』의 간행 이후로는 기록상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조준과의 관련 속에서 마지막까지 실무자적 위치에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정도전·조준 계열과 일정한 연관이 있다는 점은 분명해 졌다. 따라서 『주관육익』의 편찬목적과 책의 성격은 이런 각도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겠다.

《출전 : 金祉(김지)의 『周官六翼(주관육익)』 편찬과 그 성격/김인호 : 연세대학교 사학과 강사/2001》




▣ 김윤식 - 대부님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 김태서 - 아저씨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솔내 -
▣ 김태영 - 관심있게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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