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충렬공의 주변인물들- 무신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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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1-06 19:49 조회2,006회 댓글0건본문
● ● ● 무신정권(武臣政權) ● ● ●
개요
[성립과 변천]
[사회와 문화]
참고문헌
고려시대 무신들에 의하여 정치권력이 행사되던 시기의 특수한 형태의 정권. 1170년(의종 24)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1세기간 존속하였다.
[성립과 변천]
(1) 성립배경
무신정권은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한 무신란(武臣亂)의 결과 성립되었는데, 그 배경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 전기 사회는 문벌귀족들에 의하여 문신 중심의 정치가 행해져 같은 양반이면서도 무신은 문신보다 지위가 낮았다. 그리하여 무신은 정3품인 상장군(上將軍)이 최고관직으로 2품 이상의 재상직(宰相職)에는 올라갈 수 없고 그 자리는 문신에 의하여 독점되었으며, 군사작전에 있어서도 최고지휘권은 문신에 의하여 장악되고 무신은 그 지휘를 받았다. 둘째 무관 지휘하에 있던 군인(일반 사병)들도 천대를 받아 평화시에는 토목공사 등 사역에 동원되었고, 병역의 대가로 받는 군인전(軍人田)의 지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렇게 무관과 군인들은 문신귀족정치 아래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음으로써 그들의 불평과 불만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갔다. 그러나 그 반면에 거란(契丹)의 침입과 여진(女眞)의 정벌 등 군사적 위치가 중요시됨에 따라 무관과 군인의 지위도 상승되어 가고 있었다. 또 비대하여진 문신귀족정권에 있어서 문신귀족 상호간 또는 문신귀족과 국왕과의 사이에 권력에 대한 마찰과 갈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제요소는 문신귀족정치를 구현하여 오던 고려 전기사회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그 결과 무신란을 가져오게 하였고, 더 나아가 무신정권의 수립을 가져오게 하였다.
(2) 무신란
고려시대에 무신란이 일어나고 그것으로 무신정권이 수립된 것은 1014년(현종 5)에도 있었으나, 그것은 1년도 못되어 붕괴되고 그 특징도 뚜렷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은 그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성립된 무신정권은 1세기간 지속되면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대외관계에 있어서 특색을 지니는 것이었다. 1170년에 의종은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長湍)의 보현원(普賢院)에 유흥차 행차하였는데, 그때 왕을 호종하던 대장군 정중부와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 · 이고(李高)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수행하던 문신들을 학살하고, 그날 밤으로 개성에 들어와서 요직에 있던 문신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들의 외침은 “문관(文冠)을 쓴 자는 문관은 물론 서리(胥吏)라 할지라도 종자를 남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문신세력을 압도하고 3일째 되는 날에 의종을 거제도로 추방하고 그 아우 익양공(翼陽公)을 왕으로 세워 그들의 괴뢰로 삼았는데, 그가 곧 명종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문신귀족정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무신정권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3) 성립과 변천
1170년 정중부 등에 의한 무신란의 결과 성립된 무신정권은 1270년까지 1세기간 존속되었는데, 그 변천과정을 성립기와 확립기, 붕괴기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성립기라 함은 무신정권이 성립된 1170년부터 이의민(李義旼)이 타도된 1196년(명종 26)까지로서, 이 시기는 무신정권이 정착하기 위한 진통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쿠데타 동지들끼리 세력쟁탈전이 벌어져 그 가운데 정중부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179년에 정중부가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에게 제거를 당하였고, 경대승이 4년 만에 병사하자 이의민이 정권을 장악하여 횡포를 자행하다가 1196년에 최충헌(崔忠獻)에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확립기라 함은 최충헌이 집권한 1196년부터 최씨무신정권이 몰락한 1258년(고종 45)까지로서, 이 시기는 최씨에 의하여 4대 60여년간 독재정치가 행해지는 한편, 최씨무신정권에 의하여 집권체제가 수립되어 그 특색을 분명히 들어내던 시기였다. 또 몽고(蒙古)에 대하여 40년간 굳센 항전을 전개한 것도 바로 이 시기가 정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붕괴기라 함은 최씨정권이 몰락한 1258년부터 임유무(林惟茂)가 제거된 1270년까지로서, 이 시기는 무신 김준(金俊) · 임연(林衍) · 임유무 등이 차례로 최씨정권 이래 무신집권자가 지니던 직책인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어 실권을 행사하던 시기였으나, 이들은 능력과 조직이 뒤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회와 문화]
(1) 정치
무신정권기의 정치를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그 특징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전기라 함은 무신정권 성립 이후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이 정권을 오로지 하던 27년간을 말하며, 후기라 함은 최씨무신정권과 그 후 임유무가 제거되어 무신정권이 몰락하기까지를 말한다. 그 특징은, 전기는 무신정권으로서 아직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추지 못하고 전대 이래의 왕권체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무신집권자로서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일종의 과도적인 무신정권기였다. 예컨대 정중부는 왕권체제하의 관직인 평장사를 거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고, 이의민은 좌복야를 거쳐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었는데, 그들은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하여 문관 · 무관을 위압하였고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의 초월적인 권력은 왕권체제하의 정치기구인 중방(重房)을 배경으로 행사되었다. 중방은 원래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의기관이었으나, 무신정권이 성립되고 나서는 무신집권자들이 그것의 보호를 받기고 하고 또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무신정권 전기의 정치는 중방을 구성하는 무신 전체가 정치에 참여하였으므로 그 정치의 형태를 중방정치라 하는데, 이러한 중방정치는 무신들에 의한 일종의 합의제 정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합의제 정치가 행해진 것은 무신집권자들이 아직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추지 못한, 다시 말하여 무신정권으로 확고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과도적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기의 특징은 후기에 해당되는 최씨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그 면모가 크게 달라졌다. 즉 최씨정권은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추고 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무신집권자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1인 독재체제의 확립은 곧 무신정권의 확립을 뜻하는 것으로, 그 정비는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아들 최우(崔瑀)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최충헌은 우선 그의 집정부에 해당되는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였다. 이 교정도감은 1209년(희종 5)에 정적을 숙청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는데, 뒤에는 비위의 규찰, 인사행정, 세무행정 기타 서정(庶政)을 처리하는 초월적 기능을 발휘하는 최씨정권의 집정부가 되었다. 교정도감의 장(長)을 교정별감이라 하여 역대 무신집권자들은 이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그 직책을 가지고 정치를 좌우하였다. 교정별감은 최충헌이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그 장인 교정별감이 된 것으로부터 비롯하여 그 뒤의 최우 · 최항(崔沆) · 최의(崔의)도 이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일국의 정치를 좌우하였다. 그리고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에는 김준과 임연 · 임유무도 또한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실권을 행사하였다.
최씨무신정권에 있어서 교정도감에 버금가는 권력기구로 정방(政房)이 있었다. 정방은 1225년에 최우가 그 사저에 설치한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최씨정권 전기간은 물론 그 후에도 존속되다가 고려말 창왕 때 상서사(尙瑞司)로 개편되었다. 이 정방에 대하여 《고려사》 최이전(崔怡傳)에는 “백관이 최우의 사저에 가서 인사문서를 올리면 최우는 마루에 앉아 이것을 받고, 그때 6품 이하의 관리는 마루 아래에 재배하고 땅에 엎드려 감히 올려보지를 못하였는데, 최우는 이로부터 정방을 사저에 설치하고 문사(文士)를 뽑아 이에 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필도치(必도赤)라 하고, 백관의 인사를 처리하여 그 문서를 왕에게 올리면 왕은 다만 이를 결재하여 내릴 뿐이었다.”라 기술하여 정방이 일국의 인사행정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신정권의 사적 무력집단으로 도방(都房)과 삼별초(三別抄) · 마별초(馬別抄)를 들 수 있다. 도방은 경대승이 처음으로 설치한 신변 호위를 위한 사병집단이었는데, 경대승이 죽은 후에 폐지되었다가 최충헌에 의하여 부활되어 크게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정권을 지탱하는 중요한 무력적 지주가 되었다. 최충헌은 1200년(신종 3)에 그의 사병집단을 6번도방이라 하여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의 하나로 제도화하였다. 이 도방은 최우 때 내외도방(內外都房)으로 개편, 강화되었는데, 내도방은 최우 자신과 그의 저택을 호위하게 하고 외도방은 그의 친척과 기타 외부의 호위를 맡게 한 것 같다. 이 내외도방은 최항 때 다시 도방36번으로 개편,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강화는 그 당시 몽고와의 전쟁이 절정에 달한 데 대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신정권의 또 하나의 무력기반인 삼별초는 최씨정권 때 조직된 사병집단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임무도 수행하던 반관반민의 특수군대였다. 삼별초는 최우가 밤에 도둑을 단속하기 위하여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였으나, 뒤에 이를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누고 거기에 몽고에 잡혀갔다가 도망온 자들로서 편성한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삼별초라 하였다. 이 삼별초는 도둑을 단속하는 것 이외에 경찰에 관한 각종 업무와 군사에 관한 각종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으로 마별초가 있는데, 이 마별초는 최우가 몽고 기병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기병대로서 최씨정권의 호위와 의장대의 역할을 하였다. 무신정권의 특수한 권력기구로서의 서방(書房)은 최씨정권 때 최우가 설치하여 문객 가운데 문사(文士)들을 3번으로 나누어 이에 속하게 하였는데, 그 목적은 이들 문사들은 고사(故事)에 밝고 식견이 높아 정치고문으로 하고자 한 데에 있었고, 한편으로 문사들을 우대 포섭하고자 하는 뜻에도 있었던 것이다.
(2) 사회 · 경제
무신정권이 수립된 뒤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다. 농민의 반란은 무신정권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신정권이 성립된 뒤에도 더욱 격화되었고, 거기에 천민들도 가담하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발전하여 사회는 매우 혼란하였다. 이렇게 무신정권기로 접어들면서 민란이 격화된 것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무신란으로 인한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받아 일어난 것이다.
1172년 서북의 창주(昌州:지금 창성) 등지에서 일어난 민란은 차츰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쳐 1175년에는 남쪽 도둑 석령사(石令史)가 반란을 일으켰고, 1176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 · 망소이(亡所伊) 등의 반란 등 꼬리를 물고 일어났는데, 특히 동경(東京:지금의 경주)을 중심으로 경상도에서 일어난 반란 가운데는 신라의 부흥을 외치고 일어난 것이 주목을 끈다. 그리고 그 반란은 전과 후의 양상이 달라, 전기에는 대개 단독세력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나, 후기에는 반란세력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그 규모와 세력이 비대화된 것이 특색이다. 또 최씨정권기의 반란 가운데 사노(私奴) 만적(萬積)이 신분해방을 외치고 반란을 도모한 것이 크게 주목을 끌며, 서울과 지방의 사원(寺院)들이 무신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또한 크게 주목을 끈다. 그러나 최충헌과 그 뒤를 이은 최우는 이들 반란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써서 토벌을 강행하는 한편, 관직을 주고 천민을 해방시키는 등 회유책을 써서 반란을 진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무신정권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문란하였지만, 무신정권기에 들면서는 그것이 더욱 심하였다. 권세를 잡은 무신들은 닥치는 대로 토지를 겸병하였고, 그밖의 권세가와 호족, 사원들도 혼란한 세태를 틈타 마구 토지를 겸병하여 거대한 농장(農莊)이 출현하게 되었다. 때로는 한 집안이 소유하는 토지가 주(州)에서 군(郡)에 걸치는 광대한 것이었고, 한 토지에는 지주가 2, 3명이 나타나 농민에게 이중, 삼중으로 조세를 부담케 하는 상태였다. 여기에서 국고수입은 감소되어 극심한 재정난을 치러야 하였고,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져 빈곤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사회는 피폐하여져 민란이 일어나는 한 요인이 되었다.
(3) 문화
무신정권이 성립되자 문인 · 학자들이 출세를 단념하고 산촌(山村)에 묻히거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자가 많았다. 그러다가 최씨무신정권기에 들어 최충헌과 최우가 문사를 우대하고 정방과 서방을 설치하여 문사를 등용함으로써 문인 · 학자들이 활로를 찾아 출세하는 자가 많았고, 이인로(李仁老) · 이규보(李奎報) · 최자(崔滋)와 같은 저명한 문인도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최씨정권에서 많은 문인 · 학자를 등용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을 등졌거나 출세를 하였거나 간에 서로 공통되는 일면이 있어 이들은 서로 얽혀서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이룩하였는데, 거기에서 나타난 것이 패관문학이라 하는 수필문학이었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 이규보의 <백운소설 白雲小說>,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이제현(李濟賢)의 <역옹패설 <력翁稗說> 등이 있다.
무신정권기에 불교에 있어 크게 주목되는 것은 조계종(曹溪宗)의 성립이다. 종래의 선종(禪宗)은 무신정권이 성립될 무렵 그 이름을 조계종이라 하고 그 중흥을 꾀하였는데, 그것을 크게 떨치게 한 이는 지눌(知訥)이었다. 그는 무신정권기에 송광사(松廣寺)를 중심으로 활약하여 <정혜결사문 定慧結社文> 등의 저서를 내어 선학(禪學)과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게 하였는데, 이 지눌에 의하여 확립된 조계종은 무신집권기에 성립된 고려 불교의 특이한 존재로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조계종은 종래의 교종(敎宗)과 달리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심성(心性)의 도야와 불교의 내면적 발전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무신정권의 일정한 보호를 받았다.
(4) 항몽투쟁
무신정권기에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자아의식과 민족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그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최씨무신정권의 항몽투쟁을 들 수 있다. 몽고와의 40년간의 항전은 실로 무신정권, 특히 최씨정권이 주축이 되어 수행하였다. 최우가 집권하고 있던 1231년에 몽고가 처음으로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침범은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어 일단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물품과 인물을 요구함으로써 최우는 몽고와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고 1232년에 강화천도를 단행하였다. 이것은 몽고에 대한 노골적인 선전포고가 되어 1258년 최씨정권이 몰락될 때까지 치열한 항전이 반복되었으며, 최씨정권이 몰락된 후에는 김준 · 임연 등 무신실권자들에 의하여 항몽태세가 이어지다가 1270년에 삼별초의 항전까지 일어나게 하였다. 이러한 무신정권의 항몽투쟁은 자기 정권의 유지책에도 있었지만, 원래 무신정권이 지니는 주체적, 민족적 의식이 보다 큰 작용을 하였다 할 것이다.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한국사 7(國史編纂委員會, 1973)
◈ 高麗時代史下(朴龍雲, 一志社, 1987)
◈ 高麗武臣執權時代에 대한 一考(閔丙河, 史學硏究6, 1959).¶
(디지탈한국에서 인용)
▣ 김주회 - 무신정권 100년 (1170-1270)과 충렬공 先系와의 관계!!! 찾아내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 김윤만 -
▣ 김항용 -
▣ 김은회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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