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부용당과 金公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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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07 16:06 조회1,459회 댓글0건본문
■ 황해도지 (1982.1)
**芙蓉堂 : 황해도청 뜰에 있는 海西 8경의 하나다. 조선조 연산군 6년 목사 尹哲과 판관 鄭子芝가 창건했고, 중종21년 목사 ★金公望이 개축하면서 堂을 연못 안에 지었다. 연꽃이 활짝 피는 여름에는 그 淸楚한 모습이 물에 비치어 더욱 아름답다.
도청앞 뜰안에 있는 芙蓉堂은 연산군 6년에 목사 尹哲, 판관 鄭子芝가 지었고 25년 후인 중종21년에 목사 ★金公望이 개건했다.
건축의 규모가 宏大(굉대)하고도 優雅(우아) 典麗(전려)하여 韓--- 부용당이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즉 왜란때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는 서울이 수복된 뒤에도 還都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해주에 들러 이 부용당에서 1개월 여 머루는 것을 비롯, 여기서 멀지않은 州民 집에서 선조의 손자 인조가 탄생하는 등 해주가 왕실, 정부와 깊은 인연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08/20 20:08 (from:211.57.153.114) 조회 : 58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11---양주김포파
♠芙蓉堂 : 堂在海州客館西 牧使★김공망改建 ★송시열撰記 (林下筆記 : 李裕元(1814~1888))
***林下筆記 奎4916 ★李裕元(1814~1888)이 隨意·隨錄한 것을 總集한 雜著. 筆寫本으로 著者의 여러 著述 중에서도 代表的인 것이다. 1871年(高宗 8)에 그의 寓居地인 天摩山 嘉梧谷 林下廬에서 脫稿하였다는기록으로 보아 이 책은 그가 宦海의 바쁜 생활속에서 틈틈이 써두었던 수록류를 한데 모아 이때에 와서 成冊한 것으로 보인다.
◇ 김공망 (金公望, 1482(성종 13) ∼ 1528(중종 23))
○1482(성종 13) ∼ 1528(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수(渭 馬 ). 환(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손(宗孫)이고, 아버지는 오위부장(五衛副將) 성(城)이며, 어머니는 임치(任治)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출신으로서 사림계(士林系) 인물(人物)이다.
○1506년(연산군 12)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된 뒤, 성균관 전적(典籍)과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을 두루 거쳐, 정언(正言) · 지평(持平) 등 사헌부 · 사간원의 요직인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중종 6년 (1511) 김공망(金公望)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지평 ★김희수(金希壽)와 정언 김공망(金公望)이 소격서(昭格署)와 문계창(文繼昌)·홍경주(洪景舟)·허지(許遲)·조현범(趙賢範)·조준(趙俊)·심의(沈義)·이성언(李誠彦)·강태수(姜台壽)의 일을 논하고, 김공망이 또 오결(吳潔)의 일을 아뢰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태수가 뒤에 공조 좌랑이 되었을 때 아무도 논한 자가 없었는데, 이는 세력의 융쇠(隆衰)가 있었음인지 국법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걸핏하면 법을 고치고 형세에 따라 상벌(賞罰)하니, 이는 동방 말세의 일이다. 슬프다.】
또 군직(軍職)의 쓸모없는 관원으로서 녹을 받는 자를 도태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중종 10년 (1515) ★김희수(金希壽)를 장령으로, 김공망(金公望)·채세걸(蔡世傑)을 지평으로, 최중연(崔重演)을 헌납으로, 이언호(李彦浩)·임추(任樞)를 홍문관 교리로, 민수원(閔壽元)·김인손(金麟孫)을 정언으로 삼았다.
조강에서 지평 김공망 등이 강릉의 풍속과 사치를 금하도록 아뢰다. 지평 김공망(金公望)이 아뢰기를,
“강릉(江陵)은 풍속이 강한하고 품관(品官)이 모두 강성하기 때문에 수령이 제어하지 못하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품관이 자기의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관노(官奴)·인리(人吏)들에게 징속(徵贖)하되 법대로 하여 자기 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진상하는 물건을 빼앗거나 역마로 사물(私物)을 수운하니, 풍속의 방자하고 사나움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새 관찰사가 배사(拜辭)할 때에 각별히 전교하시어 금하게 하소서.”
○중종 13년 (1518) 장령
○중종 14년 (1519) 판사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내자시 정이 되어서는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이어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인근 고을의 수령 중에서 사욕을 취하고자 하여도 김공망이 알고 있다면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5년간의 지방관 임기를 마친 후 신병(身病)으로 사직했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양주사곶(蛇串: 남양주 퇴계원면 퇴계원리 山74-1) 임좌이며, 묘갈은 이암 송인 문, 김이 서, 김무 전<대동금석서 대동금석속목 p51> 여성군 송인 찬, 자 이 서병전<안렴사공파세보>이다.
○배위 경주이씨(성현의 외손녀) 슬하에 4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순(淳)이시며 종사랑(從仕郞: 문관 주사)을 지내셨으며 앞서 세상을 떠나셨다. 차남은 곧 ★이(삼수변伊)이신데 현풍현감(玄風縣監: 현풍고을 원님, 면장)을 지내셨고, 三男은 ★서(삼수변筮)이신데 부사직(副司直: 무관직 소령)과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노동청 사무관)을 지내셨으며, 四男은 ★준(浚)이시며 벼슬은 만호(萬戶: 외관직 무관, 대령)이셨다. 따님 한 분은 습독(習讀: 훈련원 무관) ★조섬(趙金+舌)에게 출가하셨다. <김공망 묘갈명 (송인 찬, 김이 서병전)>
▣ 솔내영환 - 해주목사 김공망 선조님의 묘소가 퇴계원에 계시는것 처음 알았습니다.
▣ 김윤만 - 해주도청 부용당. 지금도 보존되어 있겠지요?
▣ 김항용 - 부용당, 퇴계원의 묘소, 감사합니다.
▣ 김항용 - 홈에 올리겠습니다.
▣ 김주회 - 1982년 간행된 황해도지 에는 흑백이지만 황해도청 앞 뜰안에 있는 연못 가운데에 멋들어진 부용당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현재도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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