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서의 소현세자 ---김번 선조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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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16 00:28 조회1,507회 댓글0건본문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01.3-11쇄, 이덕일,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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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난국을 타개하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동생인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함께였다.
이들이 끌려간 곳은 당시 만주에 있던 청나라 수도 ▲심양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이곳에 ▲심양관소를 지어서 머물렀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이곳을 심관 또는 심양관이라고 불렀다.
소현세자는 봉림과 인평 두 동생을 비롯한 판서 남이웅, 좌부빈객 박황, 우부빈객 박노, 보덕 이명웅, 필선 민응협 등 300여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심양관에 머물렀으므로 서울의 동궁(東宮)이 심양으로 이주한 셈이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관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모든 일을 처리했으므로 사실상 주청(駐淸) 조선대사였으며 심양관은 조선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청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려 하였고, 인조 또한 청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웠으므로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청에 관한 일들을 미루었다.
▲중국으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있던 심양관 자리 입구. 지금은 심양시 소년아동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심양생활은 소현세자에게 미래가 불투명한 위기였으나 역으로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비단 소현세자 개인뿐만 아니라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조선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조차 끝나가는 성리학과 명분론을 금지옥엽으로 붙들고 있는 조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를 깨닫고, 국제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을 깨우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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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다. 세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중요한 것은 성리학이 제공하는 명분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현실 인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심양과 북경에서 이런 현실 인식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현실 인식은 청이 아니라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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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 와서 세자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성리학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심양에서 소현세자는 중원의 대세가 이미 청으로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만주에서 흥기한 청이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이미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국가 생명의 사이클로 따지면 이미 쇠퇴기를 지나 소멸기에 접어든 국가가 명나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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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심양에 잡혀온 지 7년 째인 1644년(인조22) 4월 청의 구왕이 이끄는 청나라군과 함께 북경으로 향했다. 하루 평균 120-130리에 달하는 빠른 속도였다. 세자는 구왕이 이끄는 청군이 파죽지세로 북경을 손에 넣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북경을 청이 차지한 것은 대세가 결정되었음을 의미했다.
세자는 북경에서 ▲문연간(文淵閣)이라 불리던 명 목종의 부마 후씨(侯氏) 집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 20여일 만에 ▲심양으로 되돌아 왔다가 그해 9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다시 ▲북경에 들어가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 청나라 황제는 북경을 청의 수도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소현세자를 대동한 것이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아주 중요한 한 인물을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세례를 받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1591-1666)이다. ---아담 샬은 북경 남문인 ▲선무문(宣武門) 내에 선교사 마테오 릿치가 세운 남천주당(南天主堂)에 자주 머물렀는데, 소현세자는 ▲동안문 내 아담 샬의 거주처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이 벽안의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숙소인 문연간은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운 ▲동화문(東華門) 안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10/07 14:41 (from:211.114.248.22) 조회 : 68
괴산 능촌리의 안주공(휘 繁) 묘역 사진 촬영
●안주공(安州公) 휘 번(繁) : 1604(선조 37)--1671(현종 12)
양덕공(陽德公, 諱 時說)의 二子. 무과(武科)급제.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췄다. 병자호란(丙子胡亂)시 장사(壯士)로 추천되었고, 선전관(宣傳官) 겸 세마(洗馬)를 제수 받았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심양(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곳)으로 모시고 가서 8년간 모셨다.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자 귀양을 갔다. 그 후 효종께서 <南山歌>(현재 不傳)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이다.
▣ 김윤만 - 8년간 심양에 같이 머문 형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었으나 소현세자는 현실을 바탕으로 친청의 방향으로 봉림대군(효종)은 명분을 바탕으로 반청의 방향으로 나아갔으니 사람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점이 사믓 다른듯 싶습니다.
▣ 김항용 -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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