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재 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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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작성일03-11-24 22:48 조회1,521회 댓글0건본문
허적의 이력을 소개합니다. 양천허씨 대종회에서 인용
1610년(광해군 2)∼1680년(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 또는 휴옹(休翁).
행오공 허한(杏塢公 許僩)의 아들이며 시조로부터 22세손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부수찬을 지내고,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하였다.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647년 일본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1655년 호조판서, 1659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으로서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에 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뒤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62년(현종 3)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4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이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을 거쳐, 167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하여
채택됨으로써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정권을 이룩하였다.
그뒤 집권한 남인 사이에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탁남의 영수가 되어 왕의 신임을 받아 청남을 밀어내고
집권자로 등장하였다.
1676년 사은 겸 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오도도체찰사가 되고,
1678년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하여 상평통보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다.
왕의 신임을 받아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80년 할아버지 잠(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帷幄)을 사용하여
조사 받던 중 서자 견(堅)의 모역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金益勳)·이사명(李師命) 등을 죽이고,
그의 관작을 추복하였다.
식견이 넓고 총명한 재질로서 선왕으로부터 탁고(托孤)의 명을 받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수상이 되어 자기에게 내리는 은사(恩賜)는 친구들에게 돌리고 녹봉으로 친구들을 구제하였다.
일찍이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당시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 병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인사행정에
부정이 있다고 탄핵,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주청하여 백관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남인으로서 서인의 송시열 등과 가까이 지냈다.
묘는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룡에 있고 신도비는 형조판서 정범조(丁範祖)가 지었다.
▣ 김항용 -
▣ 김영윤 -
▣ 김윤만 -
▣ 솔내영환 - 양천허씨와 우리 문중과는 많은 혼사가 있엇습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1610년(광해군 2)∼1680년(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 또는 휴옹(休翁).
행오공 허한(杏塢公 許僩)의 아들이며 시조로부터 22세손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부수찬을 지내고,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하였다.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647년 일본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1655년 호조판서, 1659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으로서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에 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뒤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62년(현종 3)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4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이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을 거쳐, 167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하여
채택됨으로써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정권을 이룩하였다.
그뒤 집권한 남인 사이에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탁남의 영수가 되어 왕의 신임을 받아 청남을 밀어내고
집권자로 등장하였다.
1676년 사은 겸 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오도도체찰사가 되고,
1678년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하여 상평통보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다.
왕의 신임을 받아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80년 할아버지 잠(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帷幄)을 사용하여
조사 받던 중 서자 견(堅)의 모역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金益勳)·이사명(李師命) 등을 죽이고,
그의 관작을 추복하였다.
식견이 넓고 총명한 재질로서 선왕으로부터 탁고(托孤)의 명을 받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수상이 되어 자기에게 내리는 은사(恩賜)는 친구들에게 돌리고 녹봉으로 친구들을 구제하였다.
일찍이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당시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 병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인사행정에
부정이 있다고 탄핵,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주청하여 백관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남인으로서 서인의 송시열 등과 가까이 지냈다.
묘는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룡에 있고 신도비는 형조판서 정범조(丁範祖)가 지었다.
▣ 김항용 -
▣ 김영윤 -
▣ 김윤만 -
▣ 솔내영환 - 양천허씨와 우리 문중과는 많은 혼사가 있엇습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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