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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주변인물들 (59)고종(高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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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1-25 17:16 조회1,4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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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1192(명종 22)∼1259(고종 46). 고려 제23대왕. 재위 1213∼1259.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철($철02), 초명은 진($진02)·질(#질11), 자는 대명(大命)·천우(天祐). 강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柳氏),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 유씨(安惠太后柳氏)이다.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46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崔氏)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하였다.
1218년, 당시의 최고실력자 최충헌(崔忠獻)이 70세로 치사하려고 하자 궤장(#궤02杖)을 주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이듬해 왕씨(王氏)의 성까지 주었다.
같은해 최충헌이 궤장과 사성을 반납하고 죽자, 그의 아들 우(瑀)가 실권을 잡고 정방(政房)을 통하여 백관의 인사를 전단(專斷)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의(#의26)를 살해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으나, 실권은 여전히 김준과 임연(林衍)부자에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즉위 초기인 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특히, 1231년부터 30여년간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江都: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왔다.
그리고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이 소실되고, 1235년 경주의 황룡사구층탑이 소실되는 등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다. 그
리하여 고종은 여러 차례의 강화교섭 끝에 1259년 몽고와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태자 전(#전02:뒤의 元宗)을 몽고에 보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몽고병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같은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편, 1236년 몽고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으며,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監修國史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으로 하여금 《명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능은 홍릉(洪陵)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1310년(충선왕 2) 충헌(忠憲)이 증시되었다.

(충렬공)

1212(임신)  1세 안동대도호부 회곡리에서 탄생
 1227(정해)  16세

음보로 양은사동정에 선임. 이어서 대정, 태사부견룡과 산원겸식목록사, 별장과 랑장감찰어사 등을 역임.

 1247(정미)  36세

몽고병이 침공함. 서북면 병마판관에 피명. 북계에 들어가서 위도에 축제하여 난민을 득식이활케 함.

 미상  

견룡행수, 좌금중지론섭장군 겸급사중어사중승, 대장군, 지합문형부사, 지어사대사겸 선군별감 등을 역임하면서 강도에 거함.




▣ 김윤식 - 감사합니다. 고종이 태자로 책봉되던 해에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탄생하신 거네요.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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