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주변인물들(62)고종-4- 인물탐구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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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1-27 17:45 조회1,564회 댓글0건본문
이규보(1168-1241)
▶ 본관은 황려(黃驪=여주)이고, 초명은 인저(仁?)이고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다. 만년에는 시ㆍ거문고ㆍ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호부시랑을 지낸 윤수(允綬)의 아들이다.
9세때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하였고, 문재가 뛰어남을 보였으며, 14세때 성명재의 하과(여름철 절을 빌려 하는 과거시험준비 학습)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문사들이 그를 기재(奇才)라 하는 등 잘애가 촉망되었다.
▶ 명종19년(1189)사마시에 수석합격하고 이듬해 예부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렇지만 곧 관직에 나가지는 못하게 되자, 25세 되던 해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26세(명종23년)쯤 개경으로 돌아와 많은 문인ㆍ승려들과 교제하였고, 시잔 시절과 달리 빈궁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보냈다. 당시 무인정권하의 정치적 문란과 지방 곳곳에서 일어나는 농민ㆍ천민의 반란 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때 ‘동명왕편’을 지었다.
▶ 1196년 최충헌의 쿠데타는 고려 정치사상 일대 획기를 가져왔다. 최충헌은 새 정치세력으로 무관층을 흡수ㆍ정리하면서 문인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냉대를 받아오던 많은 문인들은 크게 환영하였다. 이에따라 이규보도 최충헌의 눈에 들어 오세재나 임춘과 달리 출세길을 달리게 되었다. 드러나 곧 좌천되었고, 이후 최이의 각별한 후원을 받아 최이가 최충헌 사후 최고의 권력자가 되자 그도 비로소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 그는 문필로서 양명하고 관리고 현달하고 그의 문집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었다.
그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문한(文翰)의 관직자이며 양심적이나 소심한 사람이고, 학식은 풍부하지만 깊은 생각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은 아니었다. 그는 최이가 요구하는 모근 것을 충실히 수행하여 보신과 출세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규보는 최씨정권하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것이다.
▣ 김항용 -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 김윤식 - 대부님 감사합니다.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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