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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湖西士林과 우리가문 14 --- 송시열, 김응하장군묘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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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29 05:31 조회1,5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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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비(遼東伯金應河將軍廟碑)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105호

【소 재 지】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 9리 산 1-1



김응하[선조 13년(1580)-광해군 10년(1619)]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경의(景義)이다. 철원 출신으로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선조 37년(1604)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이항복(李恒福)에 의해 경원 판관(慶源判官)으로 발탁된 뒤 삼수 군수(三守郡守), 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에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정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휘하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하였다.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의 장렬한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조서(詔書)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封)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거북의 등에 귀갑문(龜甲文)을 새기고 확을 파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귀부(龜部)와 비신의 이음 부분에는 보수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비신의 재질은 오석(烏石)이고 귀부와 비갓은 화강암이다. 귀부의 크기는 218cm×275cm×100cm, 비신은 96cm×215cm×32cm, 비갓은 162cm×101cm×35cm이며, 귀부와 비갓의 상태는 양호하나 비신에는 여러곳에 총탄 흔적이 있다.



비문은 앞·뒤로 새겨져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썼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찬(篆)하여 숙종 9년(1683) 10월에 세웠다. 이 비는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강원대학교박물관·강원도 철원군, 1995, <<철원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비 고】1985년 1월 17일 유형문화재 제105호 지정









■ 국역 송자대전 9 (1982.9, 민족문화추진회)

p.357

조증요동백(詔贈遼東伯) 김장군(金將軍) 묘비(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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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조 때 장군의 아우 ★응해(應海)가 역옥(逆獄)에 연루되자 상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응하의 아우이다. 또 일찍이 노(虜)와 싸우다가 패전하자 자문(自刎)까지 하였으니,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바로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대개 의리(義理)가 꽉 막혔던 광해조를 당해서도 장군에게는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융로(戎虜)들까지도 탄복하였으며, 마침내는 황상(皇上)의 포총(褒寵)까지 있었는데, 우리 성고(聖考)의 덕음(德音)도 이와 같았으니, 이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숭정 정묘년(인조5, 1627)에 의론하는 자들이, 용만의 사당이 불편한 점이 있다고 하므로 그 비(碑)와 함께 철거하였다가, 금상 병오년(현종7, 1666)에 응교(應敎) ★김만균(金萬均)이 철원부의 수재(守宰)가 되어 처음으로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지금의 군수 ★세귀(世龜)와 병사(兵使) ★유비연(柳斐然)은 장군의 내외손(內外孫)인데, 풍비(豊碑, 공덕을 찬양하는 큰 비석)를 세우고 와서 글을 청하여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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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 기유년 6월 일에 쓴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깊고 넓으시니 따라 배우기 또한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비-송시열이 짓고, 박태유가 썼으며, 김수항이 찬. 잘 알겠습니다.

▣ 김항용 -

▣ 솔내 -

▣ 김발용 - 잘 보았습니다. 철원 김응하, 김응해장군 묘역을 다녀 올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 김태영 - 연락해서 같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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