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군 진서면의 검모포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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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3-12-01 01:09 조회1,910회 댓글0건본문
부안군 진서면의 검모포
김방경(1212~1300)은 고려 후기의 명장이고 충신이다. 시호는 충렬이고 자는 본연이며 안동인으로 어려서부터 뜻을 학문에 두어 소년시절에 급제하였으나 서북면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 싸운 이래 상장군이 되었으며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삼별초의 날을 평정하고 여몽동정연합군의 고려군 사령관으로 용맹을 떨친 충신이다.
홍다구로부터 수차에 걸친 모함을 받고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하고 귀향까지 갔었으나 나라에 충성을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그 조국을 괴롭힌 홍다구와 나라를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충성을 다한 김방경장군, 한번쯤 비교하여 봄도 뜻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원나라 세조(쿠비라이)의 빗발치는 독촉과 강압에 의하여 일본정벌의 준비를 마친 고려 조정은 1274년에 대장군 나유를 원나라에 보내어 준비가 완료되였음을 보고하는데 나유장군이 원의 중서성(최고의 의정기관)에 서면으로 제출한 보고의 내용에 변산과 나주의 천관산에서 함선을 건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 정월3일에 대선 300척을 타조하라는 조지(원의명령)를 복몽하와 곧 그 조치를 행하여 추밀원부사 허공을 전주도 변산에 좌복야 홍녹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보내어 재목을 준비하도록 하고 또 시중 김방경으로 도독을 삼아 관하 원장을 다 정련하고 소용되는 공장과 물자를 아울러 안팎에 준비토록 재촉하였나이다.
정월 15일에 이르러 모두 모여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5월 그믐에 이르러 일을 마치니 배는 대소를 아울려 900척을 완조하였고 합용의 물자도 원활히 비축하였으므로 삼품관의 능숙한 자로 하여금 회박을 분관케 하여 이미 금주(지금의 김해)로 향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제상국은 잘 부주하소서]이 때가 1274년 원종15년인데 6월에 원종이 죽고 원나라에 반 볼모상태로 가 있던 세자 심이 돌아와 즉위하니 이분이 충렬왕이다.
그러니까 여몽이 동정연합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일본을 침공한 것은 충렬왕 즉위 초전인 1724년 10월초이며 전라도 변산과 나주에서 건조된 수송함선이 김해에 집결하여 있다가 합포(지금의마산)에서 나유장군의 원나라 중서성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1274년 정월3일에 원나라로부터 대선 300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고려는 즉시 보안현의 변산과 나주 천관산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각기 책임자를 임명하여 정월 16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900척에 이르는 큰 선단으로 불과 넉달만에 완조한 것이다.
일본을 향해 출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방경 장군을 감독으로 삼아 고려군의 장병들을 조련시키고 그에 따른 공장,수수,역부등을 빈틈없이 동원 시켰으며 완성된 900척의 전함은 배를 능숙하게 잘 부리는 삼품관들로 하여금 운항관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그러면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전함들은 어떤 이유로 변산에서 건조하였으며 변산의 어디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배를 건조하였을까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조선소를 구체적으로 어디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그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당시의 모든 여건이나 정황으로 보아 보안현의 검모포(지금의곰소앞바다)에 있었던 검모포진영(수군의 기지)이 있었던 지금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곰소 동편의 구진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검모진포은 서해의 서남연안을 지키는 수군의 요충지로 수군의 진영이 되었다. 동지여지승람34권 부안현의 관망조에 검모포진영의 기록이 보인다."현의 남쪽 51리에 있다.수군 만호1명이다"라 하였다.
검모진영은 구진마을에 있었다.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검모포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이 당시 배를 만든 조선소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는 이를 뒷 받침하는 몇 가지의 근거가 있다.
첫째.당시 변산은 행정적으로도 보안현에 속해 있었다.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사 57권 지리 보안현 조에도 명확하다.(...별호를 낭주:浪州)라고 한다.변산이 있고 (위도가 있다).라 하였다
둘째, 변산반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 지형적인 여건으로 보아 조선소를 조선소를 설치하기에 검모진포만한 곳이 없다. 고창의 선운산 자락과 변산자락 사이에 넓고 길다란 만을 이루어 항시 잔잔한 물결과 깊은수심,그리고 널찍한 뻘판이 있다.
셋째,수군의 진영이 있는 곳이어서 함선을 건조하는 장소로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깊으며 관에서 하는 일을 추진하기에도 매우 편리하였을 것이다.
넷째, 검모포진영의 주변은 문물이 매우 활발하게 형성된 지역이라는 점이다.12.13세기의 우리나라 도자기 공예의 찬란한 문화를 피어나게 한곳도 검모포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연안이었다.세계적인 명품 상감청자도 검모포 연안에서 구웠다.따라서 고려시대에 문물의 발달이 활발하였던 곳은 부령현이 아니라 보안현이었으며,그 중심이 되었던 곳이 검모포지역이었다.
그리고 줄포항이 점차 매몰되어 가자 1938년에 구진마을 바로 옆의 곰섬과 범섬을 인공적으로 매립 연결하여 곰소항을 개설하였는데 이때 매립공사를 하면서 검모포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 입구의 갯벌속에서 수 백년동안 바다 뻘속에 묻혔던 아람드리 못탕목이 수없이 발굴 되었는데 이 못탕목 일부가 지금도 구진마을에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못탕목은 배를 건조할 때 밑에 까는 깔이목으로 이 못탕목 위에서 배를 건조한다.변산과 나주의 천관산에서 건조된 900여척의 함선에 몽고군 2만여명. 고려군 5천3백여명으로 연합군을 편성한 여,몽정군은 1274년10월초에 합포(지금의마산)를 출발 곧바로 대마도와 일지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일거에 무찌르고 규수의 비전국, 축전국 등을 점령 크게 분전하였으나 마침 큰 태풍을 만나 많은 전함과 병사를 잃고 철수하여 합포로 돌아오니 죽은자가 135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여,몽연합군의 제1차 일본침공이다. 고려왕의 호소에도 불고하고 원의 세조( 쿠비라이)는 일본침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고려로 하여금 전함,군수물자 등을 준비하도록 명 하였는데 이후 일본은 더욱 완강하여져 두 차례나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죽이고 규수의 하카다에 몽고방누의 성벽을 쌓는등 대비하였다.
그후 충렬왕 7년,즉 1281년 5월에 다시 편성된 여,몽연합군인 동로군은 중국남쪽의 만족으로 편성된 강남군까지 합하여 10만여의 대병으로 제2차 일본정벌에 나섰는데 이때도 고려에서 병선 900여척,초공 수수(배를 운항하는 인부)1만5천여명, 정군 1만명에 군량곡 11만석을부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병선은 그 건조한곳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역시 변산과 나주에서 건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2차의 일본침공도 일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딧쳐 60여일을 싸웠으나 7월1일 또 태풍이 내습하여 전함과 병사의 대부분을 잃고 돌아 오니 고려인은27,250명 중 생환자는 19,397명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일본침공 연합군의 수송함대의 선박을 건조한 구체적인 장소로는 당시 보안현 변산의 검모포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 이였을 것으로 보고 이 구진마을의 변천하여 온 연혁을 좀더밝혀 보기로 한다.
구진는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로 면사무소가 있는 곰소로부터 동쪽으로 1.5km쯤의 바닷가 마을이다. 검모포가 서남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여서 이곳에 수군의 진영인 검모포 진영이 설치되면서부터 진영마을로 생성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이렇게 본다면 마을의 시초는 백제때부터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을뒤에 작은 동산을 배산으로 검모포앞바다를 향하고 배산임수형의 남향마을을 이루고 40여호에 인구 109여명인데 지금은 어업보다는 농업이 주업된 마을이다.
마을 뒷동산 중턱에 남향으로 옛진영의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그 뒤로 석누를 쌓은 성벽의 자취가 지금도 완연하다 진영터의 동편으로 수백년된 몇아름드리 느티나무당산 신목이 용줄을 밑둥에 감고 마을을 굽어보며 수호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부안현의 관방조에 "관방일검모포병선박입"이라 하였으니 수군들의 진영이었음을 밝힌 것이다.좀더 구체적으로 구진의 연혁을 밝혀보자.
구진마을에 천여년 이상 있어 왔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모포진영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12년에 진영을 지금의 진서리초등학교 자리로 옮겼으며 만호1인,수구의 정원830명에 병선이 두 척이었다고 전한다. 수군 830명이란 정원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 절반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887년에 간행된부안지의 관방조에 의하면 "검모포영:재현남 51리수군만호1인 당우계유혁파"라 하였다.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진서면 구진부락에 왔던 검모포진 수군의 진영은 1812년에 진서리로 옮겨가 1873년(고종10년)에 혁파(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진영이라는 기관이 옮겨짐으로 해서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는데 새로 진영이 옮겨진 곳의 이름은 신진리(新鎭里)또는 진의 서쪽마을이란 뜻의 진서리(鎭西里)라 하고 옛 진영터의 마을은 구진리(舊鎭里)라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진서면(鎭西面)이란 면의 이름도 검모포진(黔毛浦鎭)에서 유래된 역사 문화적인 내용이 담겨진 화석(化石)된 명칭이다. 이와 같이 진서면 구진마을은 고려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서해를 지키는 요충지의 진영(鎭營)의 마을 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여,몽동정연합군 수송선단의 수백척에 이르는 배를 건조한 조선소의 마을이었으며 고려말 우왕(禑王)초에는 일본 해적 왜구들이 50척으로 내습하여 와 구진의 검모포진을 점령한 후 적현(호벌치)을 넘어 부령현까지 점령하고 동진교를 헐어 버린 왜구의 난을 가장심하게 겪은 마을 이기도 하다.그럼에도 오늘 구진마을은 화석(化石)하여 버린 부안역사 문화의 일부를 간직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한낱 구진(舊鎭)마을로만 남아 있어 안타깝다.
정말로 이 고장의 역사,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고장의 문화를 바르게 정립하려 한다면 겉치레 낯내기 문화행사,푸석하고 알맹이 없는 홍보적 행사는 이제 그만두고 구진마을 같은 (역사의 현장마을)하나라도 찾아 그 입구에 마을 연역비라도 세우는 것이 우리들의 가슴에 향토문화를 채워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 솔내 - 지난 봄 강진 시제후 검모포에 들려서 흔적이라도 있나하고 살펴보았습니다만...
▣ 김윤식 - 매립을 해서 지형이 변했군요. 지난 봄에 들렀던 구진마을이 맞긴 맞는 것 같습니다.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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