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을 창제한 강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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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3-12-01 23:10 조회1,568회 댓글0건본문
훈민정음을 창제한 강희안
1417(태종 17)~1464(세조 1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 지돈령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강 희맹의 형이기도 하다.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소박하고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많지는 않는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그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가 사신으로서 중국을 다녀와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6(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1458년 호조 참의가 되었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하였다. 신도비 선생은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ㆍ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로운 싫 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부귀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오해를 받은 바 있었다. 부인은 고성 이 씨와 언양 김씨로 슬하에 딸만 넷을 두어 후사가 없자 사후 12년 만인 성종 17년(1476)에 양자 문제를 조성에서 논의해 희맹의 2남 학손(鶴孫)을 양자로 입적케 하라는 결정이 내려 졌다.
사후 537년만인 2000년 10월에 경기도가 ‘이달의 인물’로 선정했고, 아울러 진주강씨 문양공파종중에 의해 한글창제비(글씨 : 한갑수)가 세워졌다. 본래 장단군 낙화창(落花 倉) 판원촌(板院村)에 있다가 1987년 5월 선생의 아우 강희맹의 묘가 있는 시흥시 하상동 산2(연꽃마을)로 이장되었다.
묘역에는 소양당(素養堂) 김수녕(金壽寧)이 선생의 행장을 엮은 묘갈이 있었다.
▣ 김윤만 - 많은 곳에 선조님들의 필적이 있군요.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시흥시 하상동 연꽃마을에 있는 김수녕 찬 강희안 묘갈!!! 기억하겠습니다.
▣ 김태서 - 시흥시 하상동에는 강희안 뿐 만 아니고 강희맹묘소와 성자동자 할아버지 묘소도 있습니다. 연꽃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강희맹할아버지가 가지고 왔다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 김태완 - 문정공 김질의 4째 아들 성동은 강희맹의 사위입니다.위세가 등등했던 양반가의 혼사이며 시흥시 하상동에 묘소들이 있습니다
▣ 김발용 - 12월 14일 휘 성동 선조님 묘역 참배시에 친견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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