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재영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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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3-12-12 17:55 조회1,479회 댓글0건본문
弘毅齋營建記<?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新羅敬順王의 九世孫인 高麗推忠靖難功臣匡靖大夫三重大匡 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 上洛郡 開國公 食邑一千戶 食實封三百戶 追贈宣忠協謀靖亂定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高麗局度之師 諡忠烈 諱方慶公의 十世孫인 義禁府都事의 諱는 彦弘이요 字는 毅卿이니 西紀一四六九年 成化己丑에 出生 西紀一五三O年庚寅에 壽六十二에 卒하시다. 公의 祖父되시는 典農寺主簿公 諱哲내(향내내字)는 讓寧大君 剛靖公의 壻郞이 되시는 緣由로 公의 墓所를 爲始하여 公의 生考되시는 掌隷院司議 贈左承旨公 諱壽享 墓所와 公의 子 正言公 諱익(솔귀익字)의 墓所등 四代位墓所가 京畿道 始興郡 羌笛洞(現서울시관악구상도동) 讓寧大君陵所域內에 나란히 安葬되어 四百四十餘年間을 내려오다가 西紀一九六O年頃부터 서울시 봉천동一帶가 住居地로 擴張一路에 있어 不得己 四代位墓所를 移安하게 되어 西紀一九六八年戊申에 典農寺主簿公 諱哲내墓所와 左承旨公墓所는 忠南天原郡竝川面栢田으로 移安하고 都事公 諱彦弘墓所와 正言公 諱익墓所는 이곳 山淸郡生草面月谷里 籠岩寺로 各各移安 하였다. 都事公 彦弘께서는 提學公 諱益達의 六世孫으로 學文과 道德이 鳴世하고 宦路에 出仕하신 後 淸廉潔白하여 累遷하여 義禁府都事가 되신후 公事를 嚴正히 處理하시고 法과 義에 어긋나는 일은 秋霜熱日과 같이 다스려 國事를 바로 잡아가니 때에 罪를 犯하는 者가 날로 줄어들어 公의 治積과 名聲이 온 世上에 널리 떨치었다. 正言公 諱익의 字之君擧니 西紀一四八六年丙午에 出生 一五一六年正德丙子에 進士가 되시고 一五一九年己卯에 賢良科에 及第하여 벼슬이 正言에 오르고 學文이 卓越하여 靜庵趙光祖와 더불어 性理學에 밝으셨다. 또한 正言公께서는 西紀一五八O年 萬曆八年 宣祖十三年庚辰에 우리 安東金氏 姓譜를 編纂하시다가 不幸히도 끝을 마치지 못하시고 逝去하신 後 三十餘年間을 지내오다가 正言公의 孫子되시는 奉常寺正公 諱昉께서 天安郡守로 在任時에 祖父任의 거룩한 뜻을 繼承하여 이 일을 成就하기 爲하여 京鄕各地의 僉宗들에게 널리 通文을 내고 糾合商議하여 마침내 庚辰譜發刊의 대役事를 完成하기에 이르렀다. 庚辰譜는 우리 安東金氏의 가장 오래된 最初의 族譜이다. 鳴呼라 都事公과 正言公 두 先祖님의 墓所를 이곳 籠岩寺로 移安한후 於焉十三年의 歲月이 經過하도록 이곳에 卜居하는 後孫들이 自古로 貧寒한 所致로 齋室을 營建치 못하고 恒常 悚懼之念과 罪責之感을 禁치 못하고 내려오던중 今般 都事公의 十五代宗孫인 俊會氏와 十四代孫相寬, 相宜氏等을 爲始하여 여러 後孫들이 뜻을 모아 熱과 誠을 다하여 이곳에 精誠껏 齋室을 세우고 弘毅齋라 命名하였다. 弘毅齋라는 뜻은 이곳에 移安한 都事公 諱彦弘의 弘字와 公의 字毅卿의 毅字를 따서 弘毅齋라 하였다. 또한 弘毅이란 마음이 넓고 굳세다는 深奧한 뜻도 辭典에 있다. 西紀一九八一年辛酉五月三十一日에 京鄕各地의 여러 後孫들과 地方有志들이 모여 竣工式을 盛大히 擧行하고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그려오던 追慕之情을 풀었다. 이에 敢히 右와 如히 大略을 記述하여 삼가 계懸하노라.
西紀一九八一年辛酉五月三十一日 忠烈公 二十五世孫 崙會 謹識幷書
<산청군청발행: 산청누정기>
▣ 김주회 - 京畿道 始興郡 羌笛洞(現서울시관악구상도동) 讓寧大君陵所域內에서 1968년 山淸郡生草面月谷里 籠岩寺로 이안한 김언홍, 김익 선조님 묘와 재실 홍의재!!!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산청누정기> 책자는 어디에서 구할 수 있나요?
▣ 김항용 - 귀한 자료와 내용을 보았습니다. 산청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만 농암사도 홍의재도 몰랐습니다.
▣ 김윤만 - 계속되는 귀한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 김영윤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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