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170)요즈음 정치인 백범 반만( 1/10만이라도)닮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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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2-20 19:37 조회1,432회 댓글0건본문
요즈음 정치자금 문제로 나라가 들썩들썩합니다. 이런 위기엔 꼭 생각나는 분이 백범선생님이십니다.
“요즘 정치인들 백범 반만 닮았으면…”
=[오마이뉴스와 함께] 김구선생의 ‘민초사랑’…
정치후원금으로 세운 광주 전재민촌=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광주천 근처엔 아직도 ‘전재민촌(戰災民村)’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지난 1947년 겨울. 당시엔 약 200여가구가 흙벽에 이엉을 얹은 집에서 살며 막일과 밭일로 생계를 꾸렸다. 지금은 도로가 나고 아파트가 들어서 전재민촌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순 없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약 30가구가 사연을 이어가고 있다. 애초 입주했던 전재민들은 이미 고인이 됐거나 살림살이가 나아져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가난에 힘겨운 이들이 이 마을로 찾아들고 있는 것이다.
홍용례 할머니(78)는 여태 이 마을에 살고있는 유일한 전재민이다. 홍씨 할머니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에서 돌아왔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을 따라 광주에 왔다. 그러나 돌아온 남편의 고향엔 머무를 곳조차 없었다.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백범 김구 선생님이 우리같은 전재민들을 위해 집을 지었다는 말을 듣고 그해(47년)에 이곳으로 오게 됐지요. 여기서 3남매 다 낳고 영감 초상까지 치렀지요”한남수 할아버지(73)도 47년 겨울에 전재민촌에 입주했다. 한씨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돌아온 경우. 지금도 전재민촌을 멀리 떠나지 못하고 바로 옆동네에서 살고 있다.
“큰방 하나, 작은방 하나, 부엌이 있었어. 백범 선생이 자기한테 들어온 후원금하고 쌀같은 거 팔아서 만들어준 집이야. 그때 여기 산 사람들 전부는 해방되고 나서 일본이나 만주서 온 사람들이었어”그렇다. 광주 학동 전재민촌은 백범 김구 선생의 정치자금으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전재민이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만주로 징용을 끌려갔거나 생계를 위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쟁의 재난을 당한 백성들’이란 뜻이다.
46년 9월 백범은 광주를 비롯한 여수·순천, 보성·함평 등을 여행한다. 백범의 발이 닿는 남도의 땅마다 환영회가 열렸고 특히 그가 가는 곳마다 호남인들은 그에게 정치후원금품을 앞다퉈 내놓았다. 백범은 이 후원금품을 서민호 당시 광주시장에게 건네며 전재민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백범의 청과 금품을 받아든 서민호 광주시장은 광주천변 공터에 전재민촌을 건설했다.
공사기간은 약 1년여가 소요돼 전재민들은 47년 겨울에 입주할 수 있었다. 한씨 할아버지는 “그때 입주했던 전재민들이 백범 선생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며 “백범 선생 은혜를 봐서라도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곤 했었다”고 회고한다. 친인척의 곁방을 전전하고 심지어 노숙까지 해야 했던 전재민들로선 백범의 지원으로 세워진 작은 집이 세상 어느 저택에 부럽지 않은 안식처였던 것이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전재민에 대한 백범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백범은 광주 방문이 끝난 후인 11월1일 ‘식량문제와 전재민 원호에 대해 소신’을 피력한다. 46년 11월3일자 ‘조선일보’는 당시 백범의 소신을 지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전재민들의 절대다수가 아사와 동폐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세인은 언필칭 애국을 위하여 독립운동도 하고 근일에는 입법의원 경선에도 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전에 아사와 동폐에 빠지고 있는 절대다수의 동포가 죽은 뒤에 독립운동은 누구를 위하여 하며 입법은 누구를 위하여 하겠는가”기업의 비자금으로 검은 뒷거래나 일삼고 치부에나 열중하고 있는 오늘날의 ‘입법의원’들을 낯부끄럽게 만드는 일갈이다. 한씨 할아버지는 “백범 선생을 생각하면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도둑놈일 뿐이여” 한다. 유력한 현실정치인이었던 백범에게도 정치자금은 막대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범이 뛰어난 현실정치인을 넘어서 위대한 민족지도자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겨레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겨레의 앞날을 염두에 두고 처신했던 ‘흰 호랑이’다운 무거운 행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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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동 전재민촌전경; 백범이 정치후원금품을 제공해 1947년 건설된 이곳은 당시 200여 세대의 전재민이 모여서 살았으며 지금은 영세민 30여 세대가 살고 있다.
〈이주빈기자 clubnip@ohmynews.com〉
ⓒ[경향신문 11/04 18:50]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주회 -
▣ 김항용 -
▣ 김윤식 -
▣ 김윤만 - 백범 선생님의 그 위대함에 삼가 머리가 숙여집니다.
▣ 김영윤 - 백범의 애국 애민의 1/10도 못 따르는 정치인은 퇴출이 가한줄 아뢰오(1/10 이 안된다는 구차함 보다는 1/10 이라도 본 받으려는 노력을 보여줄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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