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속의 선조님 숨결을 찾아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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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3-12-21 19:49 조회1,502회 댓글0건본문

349번 지방도로를 타고 일영역을 지나 좌회전하여 일영유원지로 진입하면 청주한씨묘역을 알리는 표석이 보입니다. 200여미터를 더 지나 이곡교를 건너면 청주한씨 묘역이 자리한 산자락이 보입니다.

이 부근이 동고공(東皐公) 휘 노(諱 魯) 선조님이 서(書)하신 공서(公瑞) 한세환(韓世桓)의 묘소 및 신도비가 있는 곳입니다.
1470(성종 1)∼1522(중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서(公瑞). 아버지는 첨정 운(運)이며, 어머니는 이신(李愼)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사마시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1)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지평·병조정랑·승문원부응교·의정부검상과 사인 등을 거쳐, 1499년 봉교로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1년 질정관(質正官)으로 천추사(千秋使)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돈녕부정이 되었다. 연산군의 난정이 심해지자 직언을 자주 하여 왕의 미움을 받아 승진되지 못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1507년(중종 2)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동부승지·도승지·이조참의가 되었다.
그뒤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기근에 허덕이는 도민을 구휼(救恤)하였고, 돌아와서 한성부우윤을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뒤 이조판서 겸 도총관을 지내고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518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좌참찬 겸 지춘추관사가 되었으며, 1520년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1522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중국사신을 접대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품성이 온순·겸각(謙恪)하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묘역 옆의 재실을 찾아 문을 두드리니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찾아온 연유를 말씀드리니 부근에 집안 산소가 너무 많아 모른다며 어르신이 출타중인데 7시 이후에나 돌아오신답니다.
어느덧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고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립니다.
양주문화원 제공 양주향토자료총람에 보면, 한세환 신도비의 내용 및 사진은 아래와 같습니다.
[원 문]
有明朝鮮國資憲大夫吏曺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恭簡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成均館事李荇 撰
及第金魯 書
公姓韓氏諱世桓字公瑞系出淸州遠祖諱蘭佐麗祖開國位極大尉階重大匡九世祖諱康都僉
議中贊修文殿
(後略)
[번역문]
유명 조선국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공간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 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이행(李荇)은 글을 짓고,
급제 김노(金魯)는 글을 쓰다.
공의 성은 한씨(韓氏)요 이름은 세환(世桓)이며 자는 공서(公瑞)다. 그 본관은 청주(淸州)에서 나왔다. 원조(遠祖)의 이름은 난(蘭)인데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었고, 벼슬은 최고로 올라 태위(太尉)가 되었으며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이었다.
(후략)

높이 : 183cm
넓이 : 71cm
두께 : 18.5cm
위치 : 장흥면 삼상리

신도비 탁본 일부
▣ 김태완 - 부지런한 발용님 님은 우리가문의 현대사를 꾸미는 보배이십니다 ▣ 김윤식 - 전에 말씀하신 바로 그 형식이군요. 차근차근 지도에 표시해 나가면 한눈에 보는 선김 유적지도가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 김항용 - 지도 제작법을 이제 원숙하게 익히셨습니다. 동고공의 필적은 다음에 산행을 겸해 함께 보러 가십시다. ▣ 김윤만 - 수고하셨습니다. ▣ 김태서 - 수고하셨습니다. ▣ 김주회 - 부지런 발걸음!!! 귀한 자료!!! 눈이 번쩍번쩍 뜨이는 사진과 선조님 필적!!! 행복합니다. 감사드립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 솔내 - 감사합니다.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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