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주변인물들(67)고종-9-몽고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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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2-26 21:38 조회1,894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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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과 고려군의 처음 만남은?
▶ 고려ㆍ원 양국관계의 성립은 고종5년(1218) 이후의 일이지만 양국이 처음으로 접촉하였던 것은 훨씬 이전이었다. 희종7년(1211) 몽고는 금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때 금나라에 파견하였던 10여명의 고려사신이 몽고군의 습격으로 몰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금나라에 파견된 사신일행의 유골만이 고려에 돌아온 이 최초의 대몽접촉 경험은 이후 몽고군의 극렬한 정복전쟁 확대와 함께 고려측에 경각심을 일으켰을 것이다. ▶ 몽고군은 고종5년(1218) 말 금에 반기를 들고 ‘동진’(東眞) 포선만노(蒲鮮萬奴)가 동쪽으로 도망을 가자 이를 복속시키고 이어 고려에 진입하였다. 이때 고려에 진입한 몽고의 명분은 고려를 도와 영내에 들어와 있는 거란족을 함께 토벌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당시 몽고군은 사전의 계획에 따라 고려내부사정에 어느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고려경내로 들어왔던 것이다. |
▣ 김항용 -
▣ 김주회 -
▣ 김태영 -
▣ 김윤만 - 국제정세가 국내문제에 미치는 영향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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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ㆍ12세기 몽고고원에는 몽고족들이 여러 부족들이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부족들은 상호 양육강식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그 생존을 영위하였다. 13세기 몽고족의 흥기는 테무진(鐵木眞)이라는 등장하여 분열된 몽고고원의 통일을 이룩하고 오난강 상류에서 개최된 쿠릴타이에서 징기스칸(成吉思汗)으로 추대된 1206년(고려 희종2) 봄이 그 시발점이 되었다.
▶ 몽고의 지속적인 정복전의 전개는 전쟁자체가 노획물의 분배에 의한 재산증식의 공동사업이라는 경제적 욕구가 큰 활력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몽고의 대외전쟁도 처음 징기스칸 시대의 약탈적 전쟁으로부터 점령지역의 지속적 지배를 의도한 정복전쟁으로 변천하였는데, 13세기 몽고의 고려침입은 이러한 몽고의 세계 정복전의 일환이었다.
▶ 몽고의 발흥으로 인해 국제관계가 급격히 변화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동북의 만주지역에서는 지배세력 내부의 해체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금나라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거란족에 의해 주도되었다. 거란인 야율유가(耶律留哥)는 몽고가 금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던 1211년 융안(隆安)에서 군사를 일으켜 요왕(遼王)을 자칭하고 함평(咸平)에 도읍을 정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