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장 가족의 우여곡절 ▶ 원나라가 고려 영토를 침략했을 때 고려사람들은 원의 포로로 많이 끌려갔다. 명주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중에는 호장(豪長) 김종연의 아내와 둘째아들 덕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종연은 아내와 작은 아들을 잃고는 낙심하여 한숨으로 지내었지만, 그나마 큰 아들 해장이 다행히 화를 면하여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효자인 해장은 낙담한 아버지를 위로하며 언젠가는 어머니와 동생을 찾아오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들려온 소문은 절망적이었다. 몽고군에게 잡혀가던 여인들과 아이들이 거의 다 길에서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세월은 빨라도 흘러 14년이 지나 원종10년(1269)이 되었는데, 김해장도 서른의 나이가 되고 아버지도 완전히 노인이 되었다.
▶ 그러던 어느날 명주장터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김해장을 찾았다. 그때 김해장과 잘 아는 김순이란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말을 듣고는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들었다. 김해장을 찾는 사람은 동경에 갔다가 고려사람인 한 노인을 만났는데 명주사람이고 김해장이란 아들을 찾아보고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이들을 찾았다. 김순은 그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들고는 김해장 집으로 불이나케 달려갔다. 김순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김종연 부자는 그것을 읽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내 아들아... 나는 지금 종살이를 하며 그나마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도 배가 고프고 일이 힘드는구나. 너와 고향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돈을 마련하였다. 이들의 사정을 불쌍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한푼두푼 마련해주었고, 마을 부자가 선뜻 큰 돈을 보태주어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개경으로 가 정부에 사정을 얘기하고 국경을 넘기를 청원하였지만, 정부는 이를 매정하게 거절하였다. 맥이 빠져 돌아서는 김해장은 고향으로 돌아와 때를 기다렸다.
▶ 충렬왕이 즉위하자 김해장은 다시 기대에 부풀어 개경으로 올라갔다. 왕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으니 뭔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김해장의 청원을 기각해 버렸다. 깊은 낙심에 빠진 김해장은 낙향하는 길에 우연히 효연이라는 중을 만나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얘기하며 신세한탄을 하였다. 이 얘기를 들은 효연은 자신의 형이 고위관리인데, 얼마후 동경에 갈일이 있으며 그 수행원 중 하나로 가장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김해장은 뛸 듯이 기뻐하며 좋아했고, 그 스님에게 백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동경에 들어간 김해장은 현지에 가서도 공명이란 스님의 도움을 받아 북주천로새라는 곳에 사는 요좌라는 사람의 집에서 자신의 어머님과 동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몸도 마르고 대도 꼬질꼬질하여 해장은 어머니와 동생을 처음에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의 마음은 더욱 마음이 찢어졌다. 두 모자는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그런데 김해장이 마련한 돈은 한사람 몸값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은 젊어서 괜찮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고 하였다.
▶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김해장과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고려로 돌아왔다. 몇 년 후 동생 덕린이 주인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어머니마저 떠난후 병을 얻은 덕린은 주인에게 고향에 가면 자신의 몸값을 후하게 쳐줄 것이니 풀어달라고 호소하자, 주인도 덕린을 붙들고 있어보았자 일도 제대로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말대로 하기로 하여 자신의 아들을 딸려 보냈다. 김해장은 여기저기서 돈을 겨우 마련하여 주인 아들에게 동생몸값을 주고는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김해장과 덕린은 열심히 일을 하여 몸값을 갚아 나갔다. 결국 김해장의 식구들은 불행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행복하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