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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績碑) -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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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4-01-15 03:08 조회1,6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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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績碑) (유적)
생민지본(生民之本)은 농업에 있고 농사의 근본은 관계에 있으므로 백성을 위한 정사(政事)는 농사짓는데 이로운 보(洑)를 막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흥해 고을은 바닷가에 있어 읍이 윤택하고 농사는 많이 짓고 있으나 수원(水源)이 딸려 읍민들이 걱정하고 있었다. 영조 임오년(1762) 통제사 김영수(金永綬)公이 흥해군수로 부임한 후 11개의 보를 막으니 太平, (?)洞, 枾木, 都, 德城, (?)재, 예(?), 城谷, 小長生, 大谷, 南(?)등이다.
군수 김 공이 보를 막을 때에 본인이 직접 현장에 나가 일을 시키면서 입을 옷과 신고 다니는 신발까지도 현장 가까운 곳에 가져다놓고 기숙하면서 새벽 일찍 공사장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며, 일하는 자 가운데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현전(縣錢)으로 상을 주며 쇠고기와 술대접을 해가면서 노고를 치하함에 마치 군대를 통솔하는 것 같이 하였고, 때로는 백성들이 여가를 가지도록 해가면서 일년에 보 11개소를 막았다. 농사를 다 지은 후에는 태평들에서 수세100석을 거두어 살기 어려운 김상철(金尙喆)등을 도와주고 10석은 민폐를 끼친 자에게 혜택을 주는 등 골고루 백성들에게 은혜를 미치게 하니 그의 공적은 보를 막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금은 소장생보와 대곡보가 없어졌으나 당시 공적은 백성들이 칭송했었다. 공은 본디 안동사람으로 무과 급제하여 여러 고을 수령으로 다니면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진력한 기록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러다가 죄가 있다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얼마 후 임금께 죄를 용서받아 통제사(統制使)를 제수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곧 남을 속이지 않았으므로 임금에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으리라, 이런 사실을 들어본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기를 원하지 않으리요. 애석하게도 당시 보를 막은 김공은 벌써 늙어버렸으니 흥해군수로 재직 당시 보를 막은 업적은 거의 기록이 없어졌다. 그로부터 20년후에 백성들의 간청에 의하면 공적을 특서(特書)하여 성상(聖上)에게도 알리고 흥해 백성들에게도 고하는 도다.
(원문생략)



正祖10年(1786)丙午 五月
郡守 昌寧 成大中 謹記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築堤監官 閑良 金信得
竪石都監 折衝 崔奎炯




▣ 김주회 - 쏟아지는 김영수 선조님 자료! 잘 보고 있습니다. 흥해는 현재의 어디인가요?
▣ 김주회 - 충렬공(김방경), 쌍계재(김뉴), 낙서공(김자점)에 이은 우리 가문의 간척과 수리관개 역사에 추가할 김영수 선조님의 수리관개 업적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그러게요. 김영수 선조님 자료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할아버지께서 대단한 열정가이심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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