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식 풍습의 만연 ▶ 원 직제의 영향으로 생긴 관직도 많았는데, 몽고식 기병이 야간 순찰을 돌게하는 순마소, 매잡는 일을 임무로 하는 응방,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쫓아 원나라에 질자(質子; 독노화禿魯花라고도 불렀으며 일종의 볼모 시종)로 되었다가 순번제로 숙위를 맡는 홀치(忽赤 또는 忽只), 몽고어를 습득케하는 통문관 등이 있었다. 그리고 관직은 아니지만 원 공주를 따라와 보필하는 임무를 겁령구(怯怜口; 사속인私屬人) 등도 관직 이상의 힘을 행사했다.
▶ 충렬왕은 원에서 생활하면서 변발과 호복을 입는 등 몽고 풍속과 문화에 젖어 있었다. 그는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맞이할 때 모든 신하들에게 변발을 강력히 권하였고 변발을 하지 않는 자는 회초리로 쳐서 환영식장에서 쫓아내었다. 이 때문에 고려조신들은 모두 변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원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온 이후에도 계속 몽고인 시종을 부리며 몽고어를 쓰고 풍속을 그대로 고수하였기 때문에 고려왕실에 몽고어와 풍속이 만연하게 되었다.
조혼의 유행과 정부의 결혼제한 정책 ▶ 충렬왕대에는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가 제대로 회복되기도 전에 원종15년(1274)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녀 140여명을 요구한 것이 공녀선발의 시초였다. 고려정부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하고 마을을 샅샅이 뒤져 그 인원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 충렬왕1년(1275) 원은 징기스칸이 13국을 정복한 이래 그 나라들이 미녀를 바치고 있다면서 고려도 여자를 바칠 것을 종용하였다. 고려는 계속되는 공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과부와 처녀를 색출하여 원에 보내기 위해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 원 세조의 딸로 충렬왕비가 되어 위새를 떨친 장목왕후가 측근들에게 양가의 여자로 나이가 14-15세인 자를 뽑아올리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 이에따라 순군(경찰)과 홀치(왕의 경호부대) 등에게 인가를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밤중에 침실로 돌입하거나 노비를 결박하여 자녀가 숨은 곳을 캐묻는 등 공녀선발은 인정사정없이 이루어졌다. 고려 사회는 그야말로 혼란에 휩싸였고 원망과 울부짓는 소리로 가득찼다. 공녀선발을 피하기 위해 딸을 가진 집에서는 나이가 어리더라도 일찍 혼인을 시키는 풍조가 생겨났다. 일찍 사위를 맞이하는 조혼의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원에서 요구하는 인원을 채우기 힘들어지자 고려정부는 혼인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충렬왕13년(1287) “양가집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다음에 혼인시켜라. 어긴자는 처벌하라”라는 왕명을 내리고 어린 여자들은 색출한다. 1307년에는 “나이 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자는 마음대로 혼인할 수 없게 하라”는 왕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