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의 주변인물들(89)충렬왕-10-고려판 정신대-공녀에 얽힌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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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1-29 21:45 조회1,978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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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판 정신대,“공녀”에 얽힌 기막힌 사연들 ▶ 고려여인들은 전쟁기간에만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고종46년(1259) 강화가 성립되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또다른 형태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목생활을 하는 몽고족은 다른나라를 정복하면 그 지역의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으며 여기에는 사람, 특히 여성까지 포함되었다.
▶ 몽고인들이 고려여인을 탐낸 이유는 무엇일까? |
▣ 김주회 -
▣ 김항용 -
▣ 김계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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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태풍의 시대였다. 징기스칸에 의해 통일된 몽고가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수행해나감에 따라 사방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여파는 우리나라에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몽고군은 고종18년(1231) 마침내
고려는 오랫동안 저항한 대가로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속국의 처지였기 때문에 원나라의 간섭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원은 일본정벌을 단행하는데 드는 막대한 경비를 고려에게 대부분 전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배기간 내내 여러 가지 명목으로 특산물을 요구하는 등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정부는 금과 은, 사냥용 매, 인삼, 잣, 약재 등을 마련하여 보내느라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 원종15년(1274)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부녀 140명을 요구한 것이 공녀의 시초이다. 원에 투항한 남송의 중국인에게 처를 얻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고려정부는 결혼도감을 설치하고 마을 민가를 다 뒤져 그 인원을 채웠다. 당시 고려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찼다. 색출당한 고려여인들은 말은 처였지만 사실상 그들의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네 계절이 뚜렷하여 습도와 온도가 알맞은 기후속에 살며 곡물, 채소, 과일 등을 적당히 섭취한 고려여인들은 피부가 뽀얀 미인이 많았다. 일 잘하고 다소곳하며 나긋나긋한 고려여인들은 몽고남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고려 여인들은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가 노동력 착취와 성적인 학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