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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묘 출토의복 04--- 광주 김첨묘2 (충청북도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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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1-30 08:39 조회1,7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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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지 下권 (1992)



p2355

마. 安東金氏墓 出土遺衣 11)



*11) 김동욱 "임란,병란 전후 안동김씨 일괄 유의" [출토유의 및 근대복식논고] (충북대학교 박물관 조사보고 제20책, 1987, p9-39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217호

- 지정일자 : 1987. 11. 23

- 출토지 :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경리

- 소유자 : 충북대학교 박물관

- 수량 : 일괄 (15점)



(1) 由 來



경기도 광주 경안천이 흘러 들어가는 광주군 초월면 지경리 경수부락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김씨 묘역이 중부고속도로가 통과하게 되자 이 묘역을 옮기던 중 3개 묘에서 의복이 출토되었다.



당시 미이라화된 屍身과 함께 나온 의복들은 묘 이장후 주변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일부 수습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도로공사로 밀어 제친 흙더미 속에 묻혀있던 것을 다시 찾아낸 것이어서 의복 가운데 일부 원형이 손상된 것도 있다.



이 안동김씨 묘역의 묘주가 되는 荷堂公 金瞻(하당공 김첨, 1541-1584년)은 문과 출신으로 현감을 지낸 인물이고, 그의 曾祖가 되는 希壽, 祖 魯와 부친인 弘度도 모두 문과 출신으로 명문집안이다.



그리고 김첨의 아들이 허난설헌의 남편인 金誠立(1562-1592년)이며, 김성립의 아들이 아우 正立의 아들로 出系한 振, 손자가 金大敬(1632-1695년)이다.





출토된 의복들은 金瞻 묘에서 3점, 김첨의 딸이며 誠立,正立의 누이동생인 묘에서 3점, 金大敬의 배위인 원주원씨 묘에서 9점 등 모두 15점이다.



그런데 이들의 졸년이 1584-1695년 사이에 이르고 있어서 임진왜란(1592년)을 전후하여 병자호란(1636년) 후의 시기까지, 즉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의 의복들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미이라화된 屍身과 함께 나온 의복은 그 시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의복사 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나마 인식한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총회장 金學永씨가 木棺과 함께 衣服 일괄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2) 內 容



안동김씨 묘역의 3개 묘에서 출토된 의복들의 내용은 <표7>과 같다.



<표7> 안동김씨묘 출토유물 12)

*12) 문화재관리국, [지정문화재목록] (1991) p271-272



0 김첨 의복 3점

- 명주 겹누비 직령포 1

- 명주 겹솜누비 직령포 1

- 명주 솜이불 1



0 김첨의 딸 의복 3점

- 명주 겹삼수 저고리 1

- 명주 겹삼수 회장 저고리 1

- 소색 명주 명정 1



0 원주원씨 의복 9점

- 무명 유삼수 삼회장 저고리 1

- 소색 명주 겹치마 1

- 소색 무명 겹치마 1

- 소색 명주 솜치마 1

- 무명 단속곳 2

- 소색 명주 목도리 2

- 명주 홑 보자기 1





이들 의복들은 평상시에 입었던 평상복, 즉 便服을 그대로 壽衣로 쓴 것들이며, 각각의 묘에서 출토된 의복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金瞻의 의복

김첨은 임란 8년전인 1584년에 졸하였으므로, 그의 의복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중요민속자료 제117호 (전박 장군묘 출토의복), 제118호 (김위묘 출토의복) 들과 거의 같은 시기의 의복으로 비교된다.



이 당시에는 천릭, 도포, 직령포, 창의가 같이 존재하는 시기로서 그 형태와 크기가 거의 같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명주 겹 솜누비 직령포는 깃과 삼각부에 花紋緞을 사용하고, 소색 명주에 갈색 끝동을 달고 삼수를 배합하여 1.2cm의 잔누비로 처리한 누비 창의로서, 깃은 목판 깃이고 동정은 소색을 달았다. 삼수에 끝동과 안동이 있다는 것이 특이한 것이다.





나) 金瞻의 딸 의복

당초에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출토되었다. 나이는 15-16세 정도로 추정되는데, 머리를 땋고 있었고 명정에 安東金氏之柩로 쓰여 있었으며, 또 옷이 화려한 것으로 보아 묘년의 여인인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이 묘에서 나온 의복 가운데 명주겹 삼수저고리는 소매에 넓은 삼수를 달고, 깃도 갈색으로 비슷한 깃을 하였으며, 동정이 있고 옆에 단 무와 앞자락에 갈색의 무가 달려 있다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더욱이 이 저고리는 순천김씨의 저고리에서 김덕원 家의 저고리를 이어주는 교량으로서의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아울러 소매끝의 삼수가 8.0cm, 12.5cm의 색동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당시의 유행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 金大敬 처 원주원씨 의복



이 의복들은 병자호란 뒤의 것으로 추정된다.



저고리의 삼수와 끝동은 진한 갈색 무명이고 소매와 길은 연두 무명이며, 깃은 갈색 무명의 당코깃으이 형태를 지니고 있다. 치마는 布幅이 39cm의 명주로 9폭으로 되어 있는데, 잔주름이 2cm 간격으로 잡혀있는 것이 2점, 8폭치마가 1점 있다.



대체적으로 안동김씨의 저고리나 원주원씨의 저고리의 아래 단에 회장이 달려 있다는 것은 저고리의 변화를 주기 위한 한복 고유의 미적 슬기의 표현이며, 이와 같은 액센트를 넣음으로써 평판적인 저고리가 돋보인다는 역사적 원류를 알 수 있겠다.



아울러 의복 가운데 오늘날과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은 치마의 제도이며, 단속곳 등 기타의 제도에 있어서도 오늘날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 김계응 -

▣ 김항용 -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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