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과 원나라 처녀의 사랑 ▶ 충선왕이 원 연경에 체류하였던 시절, 그곳에서 한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처녀는 원나라 종실 어느 대관의 딸로 북국 연인답게 활달하면서도 열정적인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충렬왕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충선왕이 그 왕위를 잇기 위해 고려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처녀는 외동딸이어서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고려로 시집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결국은 충선왕은 그녀에게 언젠가 꼭 데려오겠다는 언약만을 한 채 고려로 돌아갔다.충선왕은 고려로 와서도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의욕도 없었다. 이를 알아본 대신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이제현이 충선왕에게 그녀를 잊고 임금으로서의 본분을 지킬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고 한숨만 쉬었다. 임금의 이러한 상심에 더욱 걱정이 된 이제현은 절세미인들로 하여금 충선왕의 마음을 풀려고 하였지만, 충선왕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원나라의 그 처녀가 홀홀 단신으로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충선왕은 기뻐서 어쩔줄 몰랐지만, 고려 조정은 발깍 뒤집혔다. 왕인 그가 이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기쁨은 잠깐이었고,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그러자 그 처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먼길을 왔지만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며 곧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충선왕은 돌아가는 그 처녀에게 값진 선물과 둘의 사랑을 상징하는 연꽃 한송이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물은 마다하고 그 연꽃만 가지고 발길을 돌렷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 충선왕은 이제현을 시켜 그녀를 따라가 간곡한 위로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이제현은 처녀를 만나 왕명대로 그녀에게 따뜻하고 진심이 담긴 충선왕의 뜻을 전하였다. 이를 들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시 한수를 적었다.
보내신 연꽃 송이(贈送蓮花片)
처음 활짝 붉었더니(初來灼灼紅)
가지 떠난 며칠안에(辭枝今幾日)
이 몸처럼 야위었네(憔人與同)
그 절절한 시구는 이제현의 마음까지도 아프게 했다. 다시 갈길을 재촉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이제현은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왕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궁금해하는 충선왕에게 이제현은 사실과 달리 그녀가 매정하게 돌아섰고 원망만 하더라고 하엿다. 충선왕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제현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몹시 혼란스러워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영화루 경수절 연회가 있었는데, 그 곳 영화루는 원나라 처녀와의 추억이 서린 곳이라 충선왕은 또 상념에 젖었다. 이를 알아챈 이제현은 그녀에 대해 사실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였다. 충선왕은 허공을 한번 쳐다보고 이내 정신을 가다듬은 뒤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 오로지 짐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랬겠지요. 내 그대의 마음을 알겠소.”
대신들은 모두 감동하여 임금의 천세를 불렀고, 이제현은 감사의 눈물과 두 사람의 가슴아픈 사랑을 다시 생각하며 또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