寓庵集(우암집) 국역화 16--- 동호 독서당에서의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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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03 18:38 조회2,124회 댓글0건본문
화산군(1512-1563)께서는
30세 1541년, 33세 1544년 두차례에 걸쳐
동호 독서당(압구정 맞은편 한강 동호 건너 두모포에 있었음)에서 사가독서하시던 시절
주로 퇴계 이황, 민기(字경열), 정유길(字길원), 금호 임형수(字사수),
하서 김인후(字후지) 등과 교유하였는데
이들의 문집에 화산군 기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퇴계집>에 교유시 12수
금호 임형수의 <금호유고>에 교유시 1수
하서 김인후의 <하서진집)에 교유시 2수 등이
실려 있습니다.
1. 書堂 次金應霖澍秋懷
문집번호 : 029 서명 : 退溪集1 저자 : 李滉 페이지 : 52
2. 讀東國史 用應霖韻
문집번호 : 029 서명 : 退溪集1 저자 : 李滉 페이지 : 52
3. 夕霽舟上 示應霖★景說閔箕
문집번호 : 029 서명 : 退溪集1 저자 : 李滉 페이지 : 52
4. 次韻 答金應霖★林士遂在東湖見寄二首/甲辰
문집번호 : 029 서명 : 退溪集1 저자 : 李滉 페이지 : 58
5. 登狎鷗亭後岡 憶應霖★士遂★吉元 鄭惟吉/四首
문집번호 : 029 서명 : 退溪集1 저자 : 李滉 페이지 : 59
6. 應霖
문집번호 : 029 서명 : 退溪集1 저자 : 李滉 페이지 : 59
7. 洛生驛樓 次金應霖贈別韻二首
문집번호 : 029 서명 : 退溪集1 저자 : 李滉 페이지 : 67
8. 次應霖金澍
문집번호 : 031 서명 : 退溪集3 저자 : 李滉 페이지 : 19
9. 讀書堂內賜仙桃銀杯 與★林士遂★鄭吉元 金應霖 泛舟東湖 以侈寵錫 ★士遂有詩 次韻示諸公
문집번호 : 031 서명 : 退溪集3 저자 : 李滉 페이지 : 88
10. 次韻 答★林士遂金應霖甲辰
문집번호 : 031 서명 : 退溪集3 저자 : 李滉 페이지 : 93
11. 乘曉出城 路由書堂後山谷 間抵書堂 應霖獨在 已而 ★士遂亦至
문집번호 : 031 서명 : 退溪集3 저자 : 李滉 페이지 : 94
● 이황(李滉)
시대 조선
생몰년 1501-1570(연산군7-선조4)
본관 진보(眞寶)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수04)
시호 문순(文純)
활동분야 문신, 학자
다른 이름
1. 가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나, 후실이었지만 자모(慈母)요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우13)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경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뒤로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생략---
●민기(閔箕){1}
1504(연산군 10)∼156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열(景說), 호는 관물재(觀物齋)·호학재(好學齋).
참의 효손(孝孫)의 손자로, 현령 세류(世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령 이인석(李仁錫)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31년(중종 26)생원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저작이 되고 춘추관편수관 겸 군기시첨정으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부교리·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어 권신 이기(李#기59)·정순붕(鄭順朋) 등의 전횡을 논척하고, 다음해 부장령·홍문관부교리·시독관(侍讀官)이 되어 나라의 인재등용문인 과거시험에서 시관의 채점량이 너무 많음을 지적, 올바른 인재등용을 하기 위해서는 시관의 수를 증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홍문관응교·사도시첨정(司#도42寺僉正)·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하고, 1548년 어사가 되어 경상도지방의 수령을 규찰하였으며, 특히 상주지방의 가혹한 군포징수를 시정하였다.
1549년 홍문관직제학·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공조참의를 지내고 대사성이 되었다.
1552년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참판·대사간·용양위대호군(龍#양45衛大護軍)·대사헌·대사성을 역임한 뒤, 1561년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563년 권신 이량(李樑)의 일당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같은해 예조참판·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부판윤을 거쳐 1566년 이조판서로 경위(卿位)에 올랐다. 이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우참찬을 역임하고 1567년(선조 즉위년) 우의정에 올라 척신인 윤원형(尹元衡)·이량의 여당을 다스리다가 재직중 죽었다. 당대의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석담야사 石潭野史》·《대학도 大學圖》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海東名臣傳,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朴天植〉
●정유길(鄭惟吉)
1515(중종 10)∼1588(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영의정 ★광필(光弼)의 손자로, 강화부사 복겸(福謙)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창연(昌衍)은 좌의정까지 올랐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정언에 올랐다.
그뒤 공조좌랑·이조좌랑·중추부도사·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그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교리·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부제학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고, 이어 이조참판·예조참판·대사간·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이황을 추천하였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이조판서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1567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8년(선조 1)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하였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그뒤 우찬성·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거쳐 1581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뒤 158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궤02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되었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하였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이를 처결하였다.
또한, 시문에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여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한기비 韓琦碑〉가 있고, 저서로는 《임당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鄭淵謨〉
12. 次韻 答金★應霖 林士遂在東湖見寄二首 (李滉)
문집번호 : 032 서명 : 錦湖遺稿 저자 : 林亨秀 페이지 : 244
●임형수(林亨秀)
1504(연산군 10)∼1547(명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나주출생. 아버지는 북병사 준(畯)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현감 석(錫)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가 되고, 1535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기사관·사서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설서·수찬·회령판관·전한 등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면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소윤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절도안치(絶島安置)된 뒤 곧 사사되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뒤에 신원되었고, 1702년(숙종 28) 나주의 송재서원(松齋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호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名臣錄, 乙巳錄, 錦湖遺稿, 文谷集, 白洲集. 〈朴錫茂〉
14. 見金★應霖★澍 ?絳之 柳興伯昌門 李廷瑞元祿復書
문집번호 : 033 서명 : 河西全集 저자 : 金麟厚 페이지 : 123
15. 示金★應霖
문집번호 : 033 서명 : 河西全集 저자 : 金麟厚 페이지 : 158
●김인후(金麟厚)
1510(중종 5)∼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유학자·문신.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전라도 장성출신. 아버지는 참봉 영(齡)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해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그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여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여,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기 때문에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것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하여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으며,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 西銘四天圖》·《백련초해 百聯抄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河西集, 中宗實錄, 明宗實錄. 〈李乙浩〉
■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3/07/21 11:36 (from:61.98.0.251) 조회 : 61
김주 선조님과 김홍도 선조님은 독서당 동료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심수경)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출전 ; 심수경의 견한잡록(遣閑雜錄)
● 오상 (吳祥 )
1512(중종 7)∼1573(선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상지(祥之), 호는 부훤당(負暄堂). 중부(仲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淳)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예손(禮孫)이며, 어머니 노씨(盧氏)로 우현(佑賢)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31년(중종 26) 진사가 되고, 153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가독서를 하였다. 헌납(獻納)이 된 뒤 주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승정원·육조에서 활동하였다. 사헌부에서는 지평(持平) 등을 거쳐 일곱 차례나 대사헌을 역임했고, 홍문관에서는 수찬(修撰)으로부터 시작해 부제학까지 승진하였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에 이르기까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였다.
만년에는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의 판서 등 육조의 장관을 차례로 두루 역임하였다. 1543년 10월 경연에서 관학 교육의 쇠퇴 원인으로 학관 자격의 불충실, 학교 시설의 미비, 사습(士習)의 사치 등을 지적하고, 이 폐습을 개선해 관학을 진흥하도록 건의하였다. 1544년 헌납이 되어 대사간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왕의 어진 정사와 고른 은혜를 강조하였다.
1555년(명종 10) 시독관(侍讀官)이 되어 태극도(太極圖)를 진강했고, 언로 개방, 실추된 정령(政令) 및 습속의 개선, 내수사의 형 집행 부당성과 천인들의 동반정직(東班正職) 임명의 불가함, 군왕의 학술 진흥 등을 진술하였다. 1555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가서 ≪대명회전 大明會典≫의 반입, 세자 택봉 등의 문제를 건의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김주(金澍)·★민기(閔箕)·★정유길(鄭惟吉)·★심수경(沈守慶) 등과 함께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부훤당유고≫ 1책이 규장각 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眉巖日記草, 負暄堂遺稿.
▣ 솔내 - 우암선조님의 교유관계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황, 정유길, 김홍도, 허엽, 김인후, ... 기억하겠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용주 - 감사함니다.
▣ 김항용 - 교유관계까지 정리해 주시다니, 우암유집 내용이 알차게 되겠습니다.
▣ 김윤만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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