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寓庵集(우암집) 국역화 17--- 기타 화산군 기록 수록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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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04 18:26 조회1,5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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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送★應霖金★澍 以奏請使赴京

문집번호 : 032 서명 : 忍齋集 저자 : 洪暹 페이지 : 286



●홍섬(洪暹)

1504(연산군 10)∼1585(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영의정 ★언필(彦弼)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을 지낸 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3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뒤 수찬·부제학·경기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552년(명종 7)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듬해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三大任)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당하였고,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67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으나 남곤(南袞)의 죄상을 탄핵하다 또다시 파직되었다.

1571년(선조 4) 좌의정이 되어 궤장(#궤02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번이나 중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 흥양으로 유배당하였을 때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 寃憤歌〉가 있으며, 저서로 《인재집》과 《인재잡록》이 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名臣錄, 燃藜室記述, 栗谷全書. 〈孔#원50泳〉





16. 與金★應霖★澍

문집번호 : 034 서명 : 游軒集 저자 : 丁? 페이지 : 22



●정황(丁#황14){1}

1512(중종 7)∼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 아버지는 필산감역(匹山監役) 세명(世名)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36년(중종 31)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지평·병조정랑·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44년 정랑으로 있을 때 간관에 의하여 6품 미만의 자급(資級)으로 정5품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관작외람(官爵猥濫)의 논박을 받기도 하였다.

1545년(인종 1)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의 장사(葬事)를 서둘러 갈장(渴葬)으로 치르려고 하는 데 대하여 당시 모든 관원들이 그 기세에 눌려 침묵하고 있을 때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장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1546년(명종 1)검상을 거쳐 사인으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 윤원형(尹元衡) 등의 외척이 권세를 잡자 그 일파인 이기(李#기59)의 논계로 인하여 파직, 남원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곤양에 유배, 이듬해 거제로 이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천품이 정직하고 항상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의 근본을 삼았다.

1708년(숙종 34)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유헌집》 4권 3책과 배소에서 지은 《부훤록 負暄錄》·《장행통고 壯行通考》 각 10권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眉巖集. 〈李範稷〉













▣ 김용주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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