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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전서공파 소개자료 03 ---益精 손자 壽寧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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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12 17:39 조회1,5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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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11/18 22:33 (from:211.239.251.62) 조회 : 117

京畿道安金史資料集



[성종실록 권3, 성종1년 2월 14일(계해)]

o 대사간(大司諫) 김수녕(金壽寧)이 경기의 부역(賦役)이 다른 도에 비해 심하므로 공부(貢賦)를 반으로 줄여 주도록 청함.



[성종실록 권8, 성종1년 11월 2일(병자)]

o 경기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 김유(金紐)가 재상(災傷)과 연분(年分)의 등제(等第)시에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책을 만드는 대신에 도행장(導行帳)을 등사 하기를 청함.



[성종실록 권11, 성종2년 8월 2일(임인)]

o 대사간(大司諫) 김수녕(金壽寧)등이 사리(私利)를 추구한 김국광(金國光)을 죄를 나열하며 세조조(世祖朝)에 <개성> 산예역(散猊驛)의 조역(助役)을 폐치(廢置)하여 수중(手中)에 두려고 했었다는 것 등을 상소함.







■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3/11/10 04:24 (from:220.70.61.159) 조회 : 28

[연려실기술]의 문도공 김수녕(金壽寧)



▣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성종조의 명신 ▣



[김수녕(金壽寧)]

김수녕은 자는 이수(??)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참판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단종 계유년에 문과에 올랐다. 이때 나이 18세였다. 좌리공신이 되고 복창군(福昌君)으로 책봉되었다.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어느날 저녁에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공(文悼公)이다.



○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으니 대사간으로 있던 공이 글을 올렸다. 그 글에 아뢰기를,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물 위에 떠있는 배와 같으니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지금 조강(朝講)ㆍ주강(晝講)에만 경연에 나오시고 석강(夕講)에는 나오지 않으시니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시려는 뜻이 아닌 듯 합니다. 바라옵건대, 경연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숙직하여 성상의 질문에 대비케 하소서.” 하였다. 임금은 기꺼이 받아드렸다. 《국조보감》ㆍ《대동운옥》



○ 공은 문장이 뛰어나고 건실하며 더욱 소(疏)를 잘 하였다. 그 소에, “높은 지위에 계시면 겸손할 것을 생각하시고, 가득 차거든 덜 것을 생각하시며, 즐거운 일을 만나면 절제할 것을 생각하시고, 편안하실 때는 뒷날의 걱정을 생각하시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면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집을 새로 지으려 하면 분수에 맞게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며, 〈간사한 사람에게〉 총명이 가리워짐을 막으시려면 바른 말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시고, 참소와 간사를 미워하려면 자신부터 바르게 되기를 생각하시며, 작상(爵賞)을 시행할 때는 혹시 기쁜 나머지 지나치지 않는가를 생각하시고, 형벌을 시행할 때는 혹시 노한 김에 함부로 하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열 가지 생각을 겸하여 꾸준히 행하시고, 믿음으로 지키신다면 민심이 기뻐하고 천도가 순응하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당장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해동잡록》



▣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3 등과 총목(登科摠目) ▣

단종 원년 계유 즉위 증광시에서 이숭원(李崇元) 등 40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유학 김상(金湘), 진사 유학 최한보(崔漢輔) 등을 뽑았다. 연령 제한 법을 폐지했다. 십운시(十韻詩)를 고시(古詩)로 개정했다.



가을 식년시에서 김수녕(金壽寧)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대책(對策) 시제 : 수성난(守成難)



☞ 수성난(守成難) : 당 나라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창업(?業)과 수성(守成)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고 묻자, 혹은 창업이 어렵다 하고 혹은 수성이 어렵다 하였는데, 창업이란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키는 개국(開國)을 말한 것이고, 수성이란 그것을 이어 받아서 지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집(文集) ▣



○ 강희맹이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하고, 김수녕(金壽寧)과 함께 점(點)을 치고 뭉개고 보태고 덜고 하여 남이 보기 좋게 하여, 선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도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한다. 신영희(辛永禧)의 집에 그의 조부 문희공 석조(文禧公碩祖)의 시집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 집 문집은 간행할 만한가.”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가 비록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은 있었으나, 《가집(家集)》에 기재된 것에는 하나도 전할 만한 것이 없네. 일찍이 한 문생(門生)에 대한 만시로서,



32세에 죽었구나 / 三十二而卒

불행히도 안회와 같구려 / 不幸同顔回



라는 것이었는데, 이 시구 외에는 좋은 시가 없으니 어찌 간행하겠나.” 하였다고 한다. 남들은 이것을 불효라고 하나 나는 효도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조부의 문예에 대해 곧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꾸민 말과 거짓을 꾸민 붓으로 선조를 높인들 선조의 마음이 저승에서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추강냉화》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언해(諺解) ▣



○ 보(補). 《태허정집(太虛亭集)》의 언해 발문을 보면 《시경》은 정인지(鄭麟趾), 《서경》은 정창손(鄭昌孫), 《예기》는 신숙주, 《논어》는 이석형(李石亨), 《맹자》는 성임(成任), 《중용》은 강희맹(姜希孟), 《대학》은 홍응(洪應)이 만들었고, 《소학》 구결은 세조 자신이 정하였는데, 구종직(丘從直)ㆍ김예의(金禮儀)ㆍ정자영(鄭自英)ㆍ이채근(李菜根)ㆍ박건(朴楗)ㆍ김수녕(金壽寧) 등과 서로 의논하였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장(文章) ▣



○ 우리 나라 문장이 최치원(崔致遠)에서 처음으로 발휘(發揮)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은 풍부하면서도 화려하지는 못하였고, 정지상(鄭知常)은 화려하였으나 떨치지는 못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는 눌러 다졌으나 거두지는 못하였고, 이인로(李仁老)는 단련하였으나 펴지는 못하였으며, 임춘(林椿)은 면밀하였으나 윤택하지는 못하였고, 이곡(李穀)가정(稼亭) 은 적실하였으나 슬기롭지 못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익재(益齋) 은 노련하고 기운찼으나 문채롭지는 못하였고, 이숭인(李崇仁)도은(陶隱) 은 온자(溫藉)하여 기운이 부족하였으며, 정몽주 포은(圃隱) 는 순수하였으나 요약(要約)하지는 못하였고, 정도전(鄭道傳)삼봉(三峯) 은 확대하였으나 검속하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이색(李穡)목은(牧隱) 은 시와 문이 구비되어 함께 우수하다 하나, 더럽고 엉성한 태도가 많이 있어서 원(元) 나라 사람의 시율(詩律)에 견주더라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당(唐)ㆍ송(宋)의 경지에야 비길 수 있으랴. 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이 비록 문병(文柄)을 잡았으나, 이색에게도 미치지 못하였고, 계량은 더욱 비천하고 연약하였다. 세종(世宗)이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맞이하였는데, 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이석형(李石亨)과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 같은 이는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다. 삼문은 문장이 호방하나 시(詩)에는 모자랐으며, 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은 잘하여도 시를 몰랐다. 성원은 타고난 재주로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으나 견식이 넓지 못하였으며, 이개는 문장이 맑고 발월(發越)하였으며 시도 또한 정묘ㆍ기절하였으나, 동료들은 모두 팽년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고 하니, 그의 경술과 문장ㆍ필법이 모두 훌륭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죽음을 당하여서 그들의 저술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항(崔恒)은 사륙체의 변려문에 정묘하였고, 석형은 과거의 글에 능하였으며, 오직 숙주의 문장ㆍ도덕은 온 세상에서 모두 높이고 우러러 보았다. 그 뒤를 이을 자는 서거정(徐居正)ㆍ김수온(金守溫)ㆍ강희맹(姜希孟)ㆍ이승소(李承召)ㆍ김수녕(金壽寧) 및 성임(成任)뿐이었다. 거정은 문장이 화려하고 시는 오로지 한유(韓愈)ㆍ육유(陸游)의 체를 공부하여 손을 대면 문득 글이 만들어져서 화려하기 짝이 없었고,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수온은 글을 읽으면 반드시 외웠으므로 문장이 체재를 얻었으며, 그 문장은 호방하고 웅건하여서 아무도 그와 더불어 기세를 다투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단속할 줄 모르므로 시의 운에 착오가 많고 격식에 맞지 않았다. 희맹은 시와 문이 전중 아담(典重雅淡)하고 타고난 재질이 제대로 무르익어서 여러 학자 중에 가장 뛰어났다. 승소는 시와 문이 함께 아름다워서 공교한 장인이 조각하여도 도끼로 찍은 흔적이 없는 것과 같았고, 수녕은 타고난 자질로 일찍 성취하였으며 반고(班固)를 본받아 문장이 노련하고 힘찼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수할 때에 사실을 서술한 것은 그의 솜씨에서 많이 나왔던 것이다. 성임의 시는 만당(晩唐 당의 후기)의 체재를 본받아서 구름가듯 물흐르듯 걸림이 없었다. 이 몇 사람이 모두 이름이 났으며 당대의 문학이 빛났다. 《용재총화》





▣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경연(經筵) ▣



○ 성종이 어려서 왕위를 이었는데 대사간 김수녕(金壽寧)이 차자를 올리기를, “학문하는 방법은 배[舟]가 흐르는 물에 뜬 것 같아서 전진하지 아니하면 후퇴하는 것이니, 경연관에게 날마다 교대로 번을 들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성종기(成宗紀) 조에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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