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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전서공파 소개자료 03 ---益精 손자 壽寧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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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12 19:07 조회1,5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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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주시 박중손(朴仲孫)신도비 --- 김수녕(金壽寧) 찬(撰)



■ 작성자 :김발용 작성일 : 2003/12/28 21:30 (from:218.145.130.14) 조회 : 70

금석문 속의 선조님 숨결을 찾아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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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박중손(朴仲孫)신도비 - 김수녕(金壽寧) 찬(撰)







2. 파주시 안참찬숭선비(安參贊崇善碑) --- 성삼문문(成三門文) / 김수녕서(金壽寧書)



■ 작성자 :김윤식 작성일 : 2003/12/29 01:40 (from:218.50.86.108) 조회 : 58

Re:자료 보충 및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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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 군사공파 세거지로서 기록이 많은 편입니다.

◇안참찬숭선비(安參贊崇善碑) 성삼문문(成三門文) / 김수녕서(金壽寧書) - 오리동 공릉혈소외(五里同 恭陵穴巢外)



※安崇善은 김수녕의 외조부







3. 시흥시 강희안 묘갈 행장 --- 김수녕 찬



■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3/12/01 14:10 (from:221.138.203.147) 조회 : 47

훈민정음을 창제한 강희안

1417(태종 17)~1464(세조 1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 지돈령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강 희맹의 형이기도 하다.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소박하고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많지는 않는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그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가 사신으로서 중국을 다녀와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6(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1458년 호조 참의가 되었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하였다. 신도비 선생은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ㆍ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로운 싫 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부귀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오해를 받은 바 있었다. 부인은 고성 이 씨와 언양 김씨로 슬하에 딸만 넷을 두어 후사가 없자 사후 12년 만인 성종 17년(1476)에 양자 문제를 조성에서 논의해 희맹의 2남 학손(鶴孫)을 양자로 입적케 하라는 결정이 내려 졌다.

사후 537년만인 2000년 10월에 경기도가 ‘이달의 인물’로 선정했고, 아울러 진주강씨 문양공파종중에 의해 한글창제비(글씨 : 한갑수)가 세워졌다. 본래 장단군 낙화창(落花 倉) 판원촌(板院村)에 있다가 1987년 5월 선생의 아우 강희맹의 묘가 있는 시흥시 하상동 산2(연꽃마을)로 이장되었다.

묘역에는 소양당(素養堂) 김수녕(金壽寧)이 선생의 행장을 엮은 묘갈이 있었다.



▣ 김태서 - 시흥시 하상동에는 강희안 뿐 만 아니고 강희맹묘소와 성자동자 할아버지 묘소도 있습니다. 연꽃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강희맹할아버지가 가지고 왔다합니다.

▣ 김태완 - 문정공 김질의 4째 아들 성동은 강희맹의 사위입니다.위세가 등등했던 양반가의 혼사이며 시흥시 하상동에 묘소들이 있습니다







■ 작성자 :김국회() 작성일 : 2003/11/14 07:51 (from:210.102.136.53) 조회 : 99

문정공 김질 할아버지 기록(조선왕조실록 문종,단종,세조, 성종실록)



《 세조 008 03/06/07(기해) / 진감 등이 한강에서 유람하다 》



진감(陳鑑) 등이 한강(漢江)에 유람(遊覽)하고 제천정(濟川亭)에 올랐다. 임금이 문관(文官) 김수온(金守溫)·서거정(徐居正)·김수녕(金壽寧) 등에게 명하여 도감(都監)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고 여러 잔을 돌린 뒤에 파하였다. 드디어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고기잡이하는 사람을 시켜 고기를 잡게 하고, 진감 등은 심히 즐거워하면서 잉어[鯉魚] 두 마리를 사옹관(司饔官)에게 주어서 진상(進上)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홍윤성(洪允成)·동부승지 김질(金 )에게 명하여 곧바로 노량(露梁)의 여울 위로 가서 진감 등을 마중하여 알현(謁見)하게 하였다. 드디어 배를 같이 타고 천천히 노를 저어서 내려와 용산(龍山) 여울 아래에 이르렀다. 비를 만났으나 서로 더불어 부(賦)·시(詩)를 짓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였다. 가을두(加乙頭)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오니, 예빈시(禮賓寺)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김질이 궁온(宮춠)과 어육(魚肉)을 진감 등에게 대접하였고, 홍윤성 이하가 각각 차례대로 술을 돌렸다.



【원전】 7 집 202 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사급(賜給)







■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2/05/31 09:18 (from:211.245.210.92) 조회 : 42

진산세고

권3은 김수녕(金壽寧)이 쓴 강희안의 행장과 그의 시 66수,





■ 문화재청 홈

종 목 보물 1290호 명 칭 진산세고 (晉山世稿)

분 류 고문서류 수 량 4권1책 지정일 1998.12.18

소재지 서울 강서구 시 대 조선 성종

소유자 박영돈 관리자 박영돈



이 책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강희맹(1424∼1483)을 비롯하여 3대에 걸친 인물들의「행장」,「서발」,「시문」,「시문집발」을 수록한 것으로, 성종 7년(1476)에 간행된 것으로 짐작된다.



강희맹은 세종 29년(1447) 문과에 18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주부, 예조좌랑과 정랑, 예조와 이조의 참의 예조와 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하여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저서로 『금양잡록』, 『촌담해이』 등이 있다.



이 책은 강희맹의 할아버지 강회백, 아버지 강석덕과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였던 형 강희안의 행장과 시문을 각각 1권으로 하고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1권을 합하여 전 4권으로 엮었다. 책의 첫머리에는 신숙주, 최항, 정창손의 서문이 실려있고, 책 끝에는 김종직, 서거정 등의 발(跋)이 있다. 권1은 강회백의 행장과 그의 시문집이고, 권2는 강석덕의 행장과 그의 시문집이며, 권3은 강희안의 행장과 그의 시문집이다. 권4는 강희안의 『양화소록』이 수록되어 있다.



『진산세고』로 전하는 책이 더러 있기는 하나, 이 책은 원본이며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그 시대 대가들의 글이 실려있어 역사 및 학술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 진산세고권지이(晉山世稿卷之二)(21장(長)) 완역재(玩易齋) 인재강공(仁齋姜公)(희안(希顔))행장(行狀)……세임진(歲壬辰)(성종 3년, 1472) 춘정월하한(春正月下澣)……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복창군김수녕근장(福昌君金壽寧謹狀) 인재시고(仁齋詩藁)



권3은 김수녕(金壽寧)이 쓴 강희안의 행장과 그의 시 66수,







4. 이함장 묘갈명 --- 김수녕 찬, 이수남 서



■ 작성자 :이왕섭 작성일 : 2003/03/29 12:19 (from:218.237.120.71) 조회 : 100

김수녕(金壽寧)과 이수남(李壽男)의 졸기



김수녕과 이수남은 어릴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하였고 일찍이 문과에도 20세 전후에 급제한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당대에 문장이 있었다. 또한 두 사람은 친교(親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뜻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졸한 것도 두사람 모두 30대로 각각 33세(이수남), 38세(김수녕)였다.





■ 작성자 :이왕섭 작성일 : 2003/03/07 17:30 (from:218.237.120.71) 조회 : 135

이함장 묘갈명(墓碣銘)



김수녕은 아래 묘갈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承旨與壽寧善哭且言曰當銘曰 승지(이수남)가 (김)수녕과 가까이 지내는 터인데 찾아와서 곡하면서 지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로 다음과 같이 명을 엮는다.



김수녕과 이수남은 평소에도 교분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67년(세조 13) 명나라 황제로부터 건주위(建州衛)의 정벌을 지원하라는 논지(論旨)가 있어 조정에서 예조참판(禮曹參判) 이함장[李 言咸 長:1410(태종 10) ∼ 1467(세조 12)]을 선위사(宣慰使)로 삼아 안주(安州)에 가서 명(明)나라 군대를 맞이하라고 하니, 병(病)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09월 20일(임오)에 58세(五十八歲)를 일기(一期)로 안주(安州)에서 졸하였다. 그해 12월 28일(경신) 부평(富平)의 동쪽 수탄리(水呑里)에 예장(禮葬)하였는데 이함장(李 言咸 長) 묘갈명(墓碣銘)은 가선대부 중추부첨지사 겸 춘추관동지사 김수녕(嘉善大夫 中樞府僉知事 兼 春秋館同知事 金壽寧)이 짓고(撰), 글씨는 그의 둘째아들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있던 이수남(李壽男)이 썼다(書).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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