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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전서공파 소개자료 08 ---익정 현손 師敏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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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lawnghl 작성일04-02-18 09:57 조회1,5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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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4/03 03:10 (from:61.74.254.160) 조회 : 76

시군지순례1(강화군)

강화사(사단법인 강화문화원, 1994)



p.368. 안동김씨.



고려조 충렬공 방경의 원손 應浩(응호)가 망월리에 왔다가 삼홍리(옛 홍천)로

이사하여 10여대를 살고 있다.



선행리에 살다가 월곶으로 이사한 일파는 김만숙의 후손이며 도장리에 사는

일파는 통정 金 (김영)의 후손인데 그 자손이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3/02/14 20:05 (from:61.75.59.154) 조회 : 65

<강화사>에 보이는 선안동김씨 후예



◎ 김보욱(金普郁).(p391)

--익원공파--



◎ 김용우(金用雨).(p423)

--양도면 출신으로 안동김씨이니 일찍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후 배재중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방부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영국 대사를 거쳐 제17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한 명사이다.



☞ 본 게시판 03. 1.13. 주회 아우님이 올리신 전서공파 김용우(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편을 살펴보면

김용우의 "아버지는 종우(鍾宇), 어머니는 전영애(田英愛)이며, 부인은 심양순(沈良順)이다."라고 되어 있는 바 아래의 김용하는 김용우의 증보부이고 김종우는 부친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은우(金恩雨).(pp451)

--양도면 출신으로 안동인이니 연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입교대학 철학과를 마치고 미국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을 수료하고 한국기독교신문사 기자로 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어 국제 펜클럽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경향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있어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받은 명사이다.



◎ 김용하(金容夏).(pp488)

--안동김씨로 호는 계암(啓巖)이니 어려서부터 글 배우기를 좋아했고 나무하러 가서도 반드시 자습하여 성장하면서는 성리학에 힘썼다. 효행이 돈독하여 한 고을에 명성이 높았다. 유지 전병규(田炳奎)씨와 친교를 맺어 문학과 도의에 밝은 지사엿다. 이어서 시대성에 맞춰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고 전병규씨와 함께 기독교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교육의 선구자로 이름을 떨쳤다.



◎ 흥천(興天)학교.(pp559)

--양도면 삼흥리에 있었다. 1918년에 학자이며 군자(君子)의 칭호를 받은 김용하(金容夏)와 지사 전병규(田炳奎)가 동심 협력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보창(普昌)이라 하였다. 재력이 풍부하지 못하였으나 면내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김용하와 전병규, 지선주의 봉사적 교수생활 10여년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18년 4월 1일에는 사립 흥천학교라고 명칭을 고치었다. 원래 이 흥천학교 설립자 전병규와 김용하 선생은 기독교 신자로서 선교회의 보조도 많이 받아 교사를 증축하고 4년제를 6년제로 하였다. 1929년 12월 23일 양도공립보통학교가 인가됨에 따라 사립 흥천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광대한 양도면에 1개 학교로서는 취학 아동을 모두 수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통학거리 관계로 1938년 4월 1일 부설간이학교를 조산에 세웠다.

1938년 4월 1일에는 양도공립심상소학교로 명의를 변경하였다가 1943년 4월 1일 양도공립국민학교로 다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43년 4월 1일 조산간이학교가 조산국민학교로 승격하였다가 1954년 4월 1일에는 양도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 김종우(金鍾宇).(pp488)

--안동김씨로 용하(容夏)의 손자이며 한학에 능하였고 기독교인으로 박애정신이 투철하여 빈민구제와 농사개량에 선구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일제(日帝) 하에도 망명 임시정부 요인과 교신한 바 있고 이동휘(李東輝)· 전병규(田炳奎) 등과 상호 제휴하여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의 활동 상황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정동교회 전도시로 있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감리사(監理師)로 부흥목사로 활약한 명사이다.



◎ 김영우(金榮禹).(pp490)

--익원공파--



<출전 : 증보 강화사/증보강화사편찬위원회/1983>







■ 디지털한국학



김용우(金用雨)

1912∼1985. 정치가. 본관은 안동. 아명은 재용(在用), 아호는 삼농(三#농01). 서울 서대문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우(鍾宇), 어머니는 전영애(田英愛)이며, 부인은 심양순(沈良順)이다.

193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마쳤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1939년 남캘리포니아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광복되던 해 9월 서울시장의 고문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시 후생국장에 기용되었다.

한때 중앙기술교육위원회 사무총장과 주택영단(住宅營團)이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5·10총선거에는 서울시 서대문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54년 국회 사무총장을 거쳐, 1955년 국방부차관, 1956년 국방부장관에 기용되었다.

1957년 주영(駐英) 초대대사가 되었다.

1958년 국제해양법회의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1959년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이 되었다.

1962년 국제테니스클럽회장, 5·16장학회 이사,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연맹 총무,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제17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민주공화당 창당에도 참여하여 1963년 당무위원에 뽑히고,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68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사무총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총재가 되었다.

1971년 폭넓은 사회적 명망으로 대한체육회 회장이 되었고,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에 부임하였다.

1972년 7월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1975년까지 총재로 있으면서 남북적십자회담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립묘지 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權寧大〉













▣ 김항용 - 김용우님이, 이제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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