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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04---공민왕 재위 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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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27 02:26 조회1,8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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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1996, 박영규)



14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에 고려국왕에 즉위한 공민왕은 배원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한다. 이로써 고려는 1백여 년간 지속된 원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충혜왕의 동복아우이며 초명은 기, 이름은 전, 몽고식 이름은 백안첩목아다. 그는 1330년 5월에 태어나 강릉대군에 봉해졌으며, 1341년 원나라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 때부터 줄곧 연경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1344년 조카 충목왕이 즉위하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다.



1348년 12월 충목왕이 사망함에 따라 조신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하였지만 원나라가 충정왕을 세움에 따라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충정왕이 나이가 어린 탓으로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원 순제는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하고 그를 고려 제31대 왕에 봉했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원은 홍건적의 흥기로 사회가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고려 역시 정치의 불안정과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민생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국가기강을 바로잡는 한편 적극적인 배원정책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하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몽고 풍속을 없애고 친원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일곱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관제개혁을 실시하여 문종시대에 완성된 관제를 복구하였다.



공민왕이 원으로부터 고려에 돌아온 것은 1351년 12월이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이듬해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의 최이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정책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366년 신돈의 주도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귀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게 된다.



그는 1352년 8월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옛날에 임금들은 일심전력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친히 국가의 정무를 봄으로써 자기의 견문을 넓히고 하부의 실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 그렇게 할 때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모두 판결송사에 대하여 5일에 한 번씩 계를 올리도록 하라."



공민왕의 이 명령은 곧 왕의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무신정권 이후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원나라 복속체제 아래에서는 겨우 서무결재권만 되찾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각 부서의 중요 안건을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은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書筵)을 재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는 8월의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 관계에 대한 기탄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따라 그동안 권력에 의지하여 부정을 저지른 인당, 성사달 등의 고급 관리들이 하옥되고 상장군 진보문의 아내 송씨 등 부정한 간통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을 대거 색출하여 하옥함으로써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기를 단속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천기, 최화상, 장승량 등과 힘을 합쳐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그후 10월에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이고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격되어 판군부감찰을 겸직하며 찬화안사공신의 칭호를 받는다. 하지만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공민왕은 그의 도당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고 왕권을 회복한다. 그리고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공민왕의 정치개혁은 몰락해가는 원나라에 대한 배척운동과 함께 이루어졌다. 1352년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해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시켰으며, 1356년에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였다. 또한 내정간섭을 일삼아오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원나라 왕실에 의지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왕후의 오빠 ★기철을 숙청했으며,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의 내조에 힘입어 원나라 복속 이후 1백 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공민왕은 승려 보우의 선 사상에 몰입하여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승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대행토록 하는 등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는 태조의 유지를 받들고 문종 시대의 태평성대를 재현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유학자 출신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영토확장을 위해 공민왕은 평리 인당과 밀직사사 강중경을 서북면 병마사로 파견하여, 평리 인당이 압록강 건너 파파부 등 세 곳의 원 수비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공민왕이 배원정책과 민족성 회복운동을 동시에 실시하자 원나라는 고려의 절일사 김구년을 요양성에 가두고 8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를 토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공민왕은 평리 인당으로 하여금 서북면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응원군을 보내고, 개성의 지형이 원나라 군사에게 노출된 점을 감안하여 도성에 외성을 세우는 한편, 남경(한성)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워 ★이제현으로 하여금 천도작업을 주관토록 하는 등 결사항전을 다짐한다.



서북면 일대의 싸움으로 병마사 인당이 전사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지만 고려는 1356년 7월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시키고, 고종 말년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원나라는 쌍성과 삼살 이북에 대한 왕래를 자유롭게 할 것을 요청하지만 고려는 그곳이 원래 고려 땅인 점을 강조하며 거부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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