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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문과 광산김씨.--김장생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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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1-11-28 02:00 조회2,9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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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와 광산김씨는 역대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광산 김씨 예안파에 대하여는 안동 충렬공 선조 묘소와 관련하여



많은 자료와 이야기가 알려졌다.



오늘은 광산김씨 문중에서도 가장 번창하며, 광산김씨를 대표하고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사계(김장생의 호)계열과 안동김씨가 어떻게 맺어저 왔는가를



살펴보고 여기에 전해지는 명당이야기를 옮겨 보기로 한다.





문온공(척약재)의 아드님이신 부사공 명리공은 삼남사녀를 두셨는데



제1자 맹헌은 문과 대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렀고



제2자 중서는 생원과에 합격후 호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제3자 김계우는 또 대과에 합격하여 의정부 사인에 이르러서 형제가



대과에 합격하는 영광을 얻었다.



제1서는 남경복으로 의령인인데 개국공신 무강공 남은의 아들인며



제2서는 김철산으로 광산김씨로서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그 아들이



좌의정 김국광과 좌참찬 김겸광이며 김국광의 후손이 사계 김장생이다.



제3서는 최선문인바 화순인이며,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혜공이다.





광산김씨에 대하여서만 우선 살펴보면



김철산+안동김씨(김명리 제2녀)=김국광--김극뉴--김종윤--김호--김계휘--김장생이다.



여기에 광산김씨 김흥광의 단소와 천하명당이라는 김극뉴의 묘소를 소개하는



글을 옮겨보면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순창 김극뉴 묘 (형산 정경연의 글에서 옮김)





광산 김씨(光山 金氏)하면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가문(家門)이다.



지금도 흔히 광김(光金) 특히 사계(沙溪) 자손이라면 맞선도 보지 않고 딸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우리 나라 역사상 학문과 도덕이 깊어 온 백성이 나라의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는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配享)된 인물은 모두 18명이다.



한 가문(家門)에 2명이 배향 되기는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송시열, 송준길 선생과



광산김씨의 김장생, 김집 선생 두 가문이다. 더욱이 부자가 같이 문묘에 배향되기는



광산김씨 뿐이다. 광산김씨는 조선조에 대제학(大提學) 7명을 배출했는데 이들 모두가



사계 후손들이다. 대제학 7명을 낳은 가문은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연안이씨(延安李氏)가



있으나 한 사람의 자손에서 7명이 나온 예는 광산 김씨가 유일하다. 광김(光金)은 조선조에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제19대 숙종의 비 인경왕후,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을



배출했으며, 문과 급제자는 253명에 이른다. 광산 김씨가 명문(名門)으로 나기까지는



사계 선생 4대조인 김극뉴(金克 , 1436-1496) 묘가 말명당, 천마시풍(天馬嘶風),



용마등공(龍馬騰空) 등으로 불리는 천하명당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계 선생 묘지 답사기에서도 언급했지만 광산 김씨가 조선조에 명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계 선생의 7대 조모(祖母)인 양천허씨 할머니가 17세에 남편 김문(金問)을 여의고,



친정의 개가에 반대하고 어린 아들 철산을 데리고 시가인 충남 연산에 정착하면서부터다.



광산 김씨가 충남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김문의 아버지 김약채



(金若采, 시조 김흥광의 19세손) 때부터라고 한다. 양천허씨의 지극 정성으로 장성한



김철산(金鐵山)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김철산의 아들 김국광(金國光)이 예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김국광은 좌의정 시절 8개월간 혼자 의정부(議政府)를 맡았는데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그의 맏아들 이름을 극히 부끄럽다는 뜻으로 극뉴(克 )라 했다고 한다.



바로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조선8대 명당이라 불리는 곳에 묻힌 주인공이다.



김극뉴의 아들이 김종윤(金宗胤)이고, 김종윤의 아들이 김호(金鎬)이며, 김호의 아들이



김계휘(金繼輝)이고 김계휘의 아들이 바로 사계 김장생(金長生) 선생이다.



광산김씨의 시조는 신라의 왕자 김흥광(金興光)이다. 신라 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각 지방 호족들이 자웅을 겨룰 때 신라가 망할 것을 예견한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광주(光州)인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에 피란 은거하였다.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그가 신라 왕자였다는 사실만 있을 뿐 신라 어느 왕의 아들이냐 하는 점은 알 수 없다.



헌강왕의 셋째 아들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헌강왕은 아들이 하나뿐이었다는 기록이 나오자



신무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가 지금은 아예 상계(上系)를 빼버리고 다만 신라의 왕자라고만



족보에 적고 있다. 김흥광이 신라 국가 사직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경주를 떠나 지금의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지냈는데 후에 삼한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그에게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자 후손들이 광산(光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조에 후손 가운데 8명의 평장사(平章事, 정2품)가 배출되자



세상 사람들이 그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여 자연스럽게 마을 이름이 되었다.



광산 김씨 시조 김흥광의 단(壇)은 지금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있으며 이곳을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장성 인터체인지를 나와 24번 국도를 타고 담양으로 가던가,



88올림픽고속도로 담양에서 나와 24번 도로를 타고 장성으로 가다보면 대전면소재지



사거리 중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여기서 마을 뒤로 우뚝 솟은 병봉산(685.2m)를



바라보고 들어가면 평장리가 나오고 재실이 보인다. 재실 뒤에 단이 있다. 김흥광의 묘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기 때문에 처음 자리를 잡고 살았던 이곳에 단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이 보기 드문 명당이고 보면 실제 유골도 이곳에 묻혀있을 거라고 보는 것이



후손들이나 평수연구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내장산과 백양산, 대각산을 지난 호남정맥이 담양 추월산으로 넘어가기 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에서 한 맥을 남으로 뻗어 담양 월산면 광암리와 월평리를 돌아 바심재를 넘고,



용구산(769.5m), 병풍산(822.2m), 그리고 대치를 지나 병봉산(685.2m)을 만들었다.



병봉산에서 출발한 산맥은 진원면 불태산(602.4m)으로 가기 전 중간에 단아한 주산을 세운



다음 이 중출맥(中出脈)으로 내려온 용의 용진처(龍盡處)에 시조 김흥광의 단(壇)이 있다.



불태산에서 계속 내려간 용은 장성 주산을 만들고, 광주 광산구를 이루는 산맥이다.



평장동에서 23세손 김극뉴 묘가 있는 순창 인계면 마흘리로 가려면 24번 도로를 타고



담양을 거쳐 순창 읍까지 와서 태인, 임실, 전주 가는 2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구림면에서 내려오는 793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만 직진하면



좌측에 인계면사무소가 있고 우측으로 마흘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면 우측에 용마초등학교가 보이는데 좌측 길로 들어서면 마을



뒤에 금성체(金星體)로 우뚝 솟은 용마산(龍馬山)이 있다. 마치 말머리와 말 등처럼



보이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는데 마흘리(馬屹里)라는 마을 이름도 말 같은



산이 우뚝 솟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국세(局勢)는 크고 장엄하다. 호남정맥이 내장산과 백암산, 백학봉, 곡두재와



감상굴재, 대각산, 금방동 하령을 건너 추월산, 천치재를 지나 순창 강천사로 유명한



강천산(583.7m)을 만든다. 호남정맥은 산성산과 광덕산을 거쳐 광주 무등산으로 내려가고,



강천산에서 동쪽으로 분맥한 한 산맥이 무리산(557.5m)과 순창에서 임실 가는 27번 도로



갈재를 지나 이곳의 장덕산(368.4m)을 만든다. 장덕산에서 내려온 산맥이 크게 과협한



다음 용마산을 만드니 이 산의 주산이다. 주산과 주룡의 기세가 강한 만큼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청룡 백호와 안산(案山), 그리고 조산(朝山) 할 것 없이 크고 장엄하며 상서로운



느낌을 준다. 그것이 감싸고 있는 공간인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멀리 섬진강의 지류인



적성강이 이곳을 환포하고 있으니 암공수(暗拱水)라 할 수 있다. 암공수란 혈장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청룡 백호 또는 안산 밖에서 혈을 감싸주고 있는 대강수(大江水)로



보국(保局) 내의 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풍수지리에서는 혈에서



보이는 형상만 가지고 화복(禍福)을 논하는 것이 원칙이나 암공수(暗拱水) 또는



공배수(拱背水, 물이 현무봉 뒤를 감싸고 있는 것)의 경우는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물보다 더 좋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가르치어 명조불여암공(明朝不如暗拱)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부귀(富貴)가 유장(悠長)함은 물론이다.



말머리에 해당되는 높은 봉우리 중간에서 출맥한 주룡은 기세 있게 아래로 쏟아지듯



내려오는데 얼핏보아서는 용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주산의 강한



기운을 순화시키기 위한 개장천심(開帳穿心)의 과정이며 암석이 있는 산에서 돌



하나 없는 토룡(土龍)으로 변하는 용의 환골탈퇴(換骨脫退) 모습이다. 급하게 내려온



주룡이 잠시 숨을 고르듯 멈추어 작은 산을 만들고 방향을 90도로 바꾸어 입수맥



(入首脈)을 내려보내는데 이 또한 힘이 넘치는 강한 용이다. 이 힘을 마지막으로



묶어주기 위해서 결인속기(結咽束氣)를 하고 입수도두(入首倒頭)를 단단하게



만들었는데 여기에 감찰(監察)을 지낸 김극뉴 장인과 장모의 합장 묘인 함양박씨



(咸陽朴氏) 묘가 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는 박 감찰의 딸이자 김극뉴의 부인인



함양 박씨(咸陽 朴氏) 묘가 있고, 부인 묘 아래에는 박 감찰의 사위이자 광산 김씨



23세손인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 벼슬을 지낸 광원군(光原君)



김극뉴(金克 , 1436-1494) 묘가 진혈지에 자리잡고 있다.



뒤에 있는 용마산이 말등이고 앞 봉우리가 말 이마라면 여기서 작은 산까지 급하게



내려온 용맥은 이마에서 코까지 이어지는 콧잔등으로 본다. 작은 산에서 입수도두까지를



콧잔등에서 콧구멍까지의 거리로 본다면 영락없는 말머리 형상이다. 말은 콧구멍에 기가



가장 많이 응집된 동물이다. 말이 힘차게 도약하려 할 때 제일 먼저 코에서 씩씩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강한 기운을 품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 형국의 경우에는 대부분



콧구멍에 해당되는 곳에서 진혈을 찾는데 김극뉴 묘가 바로 이곳에 해당된다. 이곳의



형상이 마치 천마가 바람을 가르며 우는 모습과 같다하여 혈명(穴名)을 천마시풍형



(天馬嘶風形)이라고 했는데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김극뉴 묘 아래에는 하수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주룡의 행룡을 멈추게 하였다. 주룡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혈에 응결(凝結)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혈을 감싸주는



물이 우측에서 득수(得水)하여 좌측으로 파구(破口)되어 나가니 좌선룡(左旋龍)에



우선수(右旋水)가 합법(合法)인 셈이다.



김극뉴의 묘 아래에는 특이한 구릉이 형성되어 뻗어 내리고 있는데 이는 주룡의 기세가



너무 강력하여 혈을 결지하고도 남은 여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구릉은 왼쪽에서 마을



쪽으로 길게 뻗었는데 혈장을 받쳐주고 있으며 굳이 천마시풍형과 연관지어 이름을



붙이자면 말고삐라 하고 싶다. 이 구릉에는 김희지묘(金僖之墓)라는 비석이 있는 묘와



김극뉴의 둘째 아들인 추증자헌대부이조판서(追贈資憲大夫吏曹判書) 김소윤(金昭胤)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는 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과 청백리(淸白吏)인



증손 김개(金鎧)의 묘가 있으며, 맨 아래에는 김극뉴의 사위와 딸의 합장 묘인 동래정씨



(東來鄭氏) 정광좌(鄭光佐) 묘 등 여섯 개의 무덤이 있다. 모두 정비를 잘 해놓았지만



진혈(眞穴)로 보기 어렵다. 주룡의 기세(氣勢)는 김극뉴 묘에서 끝났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이곳의 보국(保局)은 참으로 크고 넓다. 청룡의 기세가 강할



뿐만 아니라 백호는 가깝게 여러 겹으로 감싸주고 있으며 멀리 건지산(300m) 연봉들이



혹은 문필봉(文筆峰)이 되고 혹은 귀인봉(貴人峰)이나 천마사(天馬砂)가 되기도 하고



혹은 무곡(武曲) 금성체(金星體)가 되어 부봉(富峰)을 만들면서 이곳 혈을 향하여



나열(羅列)되어 있다. 나성(羅城)을 이루는 사격의 형태는 실로 다양하다.



마상귀인(馬上貴人)이 있는가 하면 집홀규(執笏圭) 귀인이 있고, 오마귀인(五馬貴人),



문성귀인(文星貴人) 등등 귀한 사격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명당(明堂) 역시



평탄 원만하면서도 여러 산과 골짜기에서 나오는 육곡구수(六曲九水)의 물이 모두 혈 앞



명당에 모이는 광취명당(廣聚明堂)이다. 사방의 모든 물이 명당에 모인다는 것은 사방의



산들이 모두 이곳을 향하여 취결(聚結)한다는 뜻으로 그만큼 기가 충만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물은 수관재물(水官財物)이라 하였으니 귀(貴) 못지 않게 부(富) 역시



풍족한 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천하명당이라 하여도 완벽하지는 않는 법이다. 이곳에도 흠은 있으니



우선 백호 쪽 두 번째 능선이 끝을 뾰족하게 하여 혈장을 찌르듯이 들어오고 있는데



자손에게 가끔씩 큰 화를 가져다 줄 흉한 모습이다. 또 안산이 뚜렷하지 않고 거칠고



억세며 명당이 혈에서 조금 멀리 있다. 그러함에도 내당수(內堂水) 물은 우측에서 나와



혈을 유정하게 환포(環抱)해주고 외당수(外堂水)인 심초천과 합류하여 을진(乙辰) 방위로



파구되니 좌향을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하여 팔십팔향법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한다는



자생향(自生向)을 하였다.



이곳에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박씨 삼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풍수지리에 능통한



도사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각자 자신들이 죽으면 묻힐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잡았는데 큰형은 순창 인계의 말 명당을 잡았고, 둘째는 임실 갈담의 잉어 명당을



잡았으며, 셋째 막내는 임실 가실 마을 앞의 금계포란형을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큰형 박 감찰에게는 딸만 있었고 아들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제사를 받들어줄



아들이 없으므로 사위가 좋은 자리에 들어가 외손이 번창하면 자신의 제사는 받들어



줄 것이라 믿고 사위인 김극뉴에게 자신의 신후지지를 양보하고, 자신은 혈 위 부분인



입수도두에 묻혔다고 한다. 그의 예견대로 지금도 광산 김씨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려오면 꼭



이곳에 먼저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반면에 함양박씨(咸陽朴氏) 문중에서는 이렇게



좋은 자리를 조카에게라도 주었으면 광산김씨들이 누린 복을 자신들 문중이 누렸을 텐데



하면서 두고두고 서운해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이 유명한 만큼 서점에 가서 풍수 답사에 관한 어떤 책을 고르더라도 김극뉴 묘는



대부분 소개되어 있다. [신한국풍수, 최영주 저, 동학사]는 "명가 광김(光金)을 낳은



조선8대 명당, 순창 김극뉴 묘, (299쪽)"로, [한국 풍수의 허와실, 김두규 저, 동학사]는 "



조선8명당인 순창의 말(馬)명당, (76쪽)"으로, [이곳이 한국 최고의 명당, 최명우 저,



수문출판사]는 "조선8명당의 하나 용마등공형, (51쪽)"으로, [호남의 풍수, 백형모 저,



동학사]는 "확실한 명당으로 소문난 마흘 마을, (338쪽)" 등으로 소개되어 있어 실재



이곳을 와보지 않은 사람들도 알만큼은 아는 곳이 되었다.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번씩은 답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답사를



하는 명소다. 이곳이 명당으로 유명하게 되면서 순창 하면 첩첩산중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이라고는 고추장뿐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 말명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고장을 대표하는 곳이 되었다. 고향이 순창이고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풍수 유적 하나가 충분히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것을 어떻게 경제성과



연계시킬 수 있는가를 연구한다면 풍수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유명한 풍수 유적을 답사하면서 느낀 점은 꼭 풍수 이론뿐만 아니라 역사와



자연을 같이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은 살아있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고,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느낄 수 있다. 이 보다 더 좋은 환경교육이



어디 있을까? 초등학생을 비롯하여 중, 고교 학생들의 체험학습인 소풍을 이러한



곳으로 선정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무조건 구경이나 하는 소풍에서 용인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산의 변화 과정을 이해하고, 산맥이 백두산에서부터



어떤 경로를 통하여 자기 고장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산천생기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전달되고 있는가만 알아도 큰 성과일 것이다. 거기다 그 자리에 묻힌 인물과 그 후손들의



역사에 대해서 알게되면 자연과 인간은 별개일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랬을 때 학생들에게 자연사랑, 환경보호, 인성교육은 저절로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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