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김사형) 자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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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4-03-11 21:25 조회2,331회 댓글0건본문
시중(侍中) 김사형(金士衡)을 축하하는 시의 서
양촌선생문집 제18권 (序類)
상락(上落) 김공(金公 상락은 봉호(封號))이 처음 시중을 배수할 때, 국로(國老 나라의 원로) 창녕(昌寧 본관) 성공(成公)이 그 가문의 아름다움을 서술하고 시(詩)를 지어 축하하였는데, 명경 거유(名卿巨儒)들이 이어 화답한 시 몇 수와 공이 어명을 받고 동정(東征)주D-001할 때 전별차 지은 많은 갱운(?韻 남의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는 것)을 연이어 큰 축(軸)을 만들고, 호정(浩亭) 하공(河公 이름은 륜(崙))이 그 끝에 발문(跋文)을 붙였다. 그 의론이 관후하고 정대한 것을 주로 하고 또한 권무하고 규계(規戒)하는 뜻이 있으니, 공의 덕량(德量)을 더욱 잘 형용한 것이다. 어떤 이가 공에게,
“시(詩)에 서문이 있는 지 오랜지라, 이 책머리에 서문이 없을 수 없다.”
하니, 공이 나에게 서문을 지으라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고로 훈벌(勳閥)이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어 원씨(袁氏)의 4세에 5공(公)이 난 것과 양씨(楊氏)의 4세를 이어 태위(太尉)가 난 것은 전사(前史)에 칭찬하였다. 공의 선대는 충렬공(忠烈公 충렬은 시호. 이름은 방경(方慶))으로부터 더욱 빛나 현달한 벼슬인 시중으로 국정(國政)을 도맡음에, 그의 충성과 장절(壯節)은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이거나 변함이 없었고 뛰어난 훈업(勳業)은 사책에 실려 있어, 나라 사람이 지금까지 우러러본다. 문영(文英 문영은 시호. 이름은 순(恂))ㆍ정간(貞簡 정간은 시호. 이름은 영후(永煦))이 계승하여 상락(上洛 봉호. 지금의 상주(尙州))에 습봉(襲封) 되었고, 정간은 또한 정승을 배수하여 우리 일가 계림공(鷄林公)과 뜻을 같이하고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들이 남긴 풍토와 공렬은 지금까지 우뚝하며, 공의 선대인(先大人) 역시 현달하였으나 지위가 덕망에 비해 만족하지 못했던 것을 공에게 물려 주었다. 공은 관후한 도량과 강명(剛明)한 기질로 흥왕하는 국운을 도와 빛나게 왕업(王業)을 열어 놓고, 시중에 배수되어 임금을 도와 만세의 무궁한 터전을 세우고 위대하게 일대 종신(宗臣)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가 동정(東征)할 적에는 위덕(威德)이 닿는 곳마다 싸우지 않고 스스로 굴복하며 투항하는 자가 잇닿아 해구(海寇 왜적(倭賊))가 영원히 소탕되었으니, 공은 참으로 편안하게 웃고 즐기면서 정신으로 적을 막아 내는 사람이라 하겠다. 일찍이 《춘추(春秋)》 수지(首止)의 의리주D-002를 본받아 적장(嫡長)을 세워 종사(宗社)를 정하고 제정(帝庭 명(明)나라 조정)에 들어가 주달(奏達)하여 특별히 그 공로를 치하받더니, 이미 돌아와서는 스스로 공이 높아 부귀가 찼다는 것으로 사직하고 집에 돌아가 한가로이 지내는 지가 1년쯤 된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정성을 다하여 정사를 도모하심에, 다시 공을 등용하여 좌정승을 삼는 명이 내리니 국인(國人)이 모두 기뻐하며 경사로 여겨 태평을 기대하였다. 공은 더욱 조심하고 삼가며 온화한 마음으로 의관을 단정히 하고 성색(聲色)에 동하지 않으면서 간편함을 좇으매, 일이 잘 시행되어 중외(中外)가 안정되니, 위로는 전하의 위임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국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 공의 자손 역시 모두 진중하게 법도를 지켜 조금도 세도를 끼고 교만한 태도가 없으니, 공의 훈계가 본래부터 가정에 잘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로가 나라에 드러나고 덕이 가정에 쌓였으니, 공의 대대로 아름다운 경사가 또한 마땅히 길이 계승되어 쇠하지 않을 것이요, 나라와 더불어 낙을 같이 누릴 자가 장차 천백 세에 이르도록 다하지 않으리니, 어찌 전사(前史)에 훌륭하다고 일컬어진 사람이 여기에 비할 수 있으랴! 그 근본은, 다만 조심하고 삼가는 공의 한 마음에 있으니 공은 더욱 힘쓰라. 나는 공의 알아줌을 받은 지 오랜지라 아첨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미 찬미하고 글을 지어 권면한다.”
역대 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동문선 제105권 지(志)
천하가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과 밖으로는 사해(四海)가 몇 천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요약하여 수척(數尺)되는 넓이에 그리게 되니, 자세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그림 그리는 자들이 대개 다소 삭제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오직 오문(吳門)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聖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게 구비하였으며, 역대 제왕 국도 연혁(歷代帝王國都沿革)은 천태승 청준(天台僧淸濬)의 1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갖추어 실렸다.
건문(建文) 4년 여름에 좌정승(左政承) 상락 김공(上洛金公) 사형(士衡)ㆍ우정승(右政承) 단양 이공(丹陽李公) 이름은 무(茂) 이 정사를 화[變]하게 다스리는 여가에 이 그림을 참고하여 연구하고 검상 이회(檢詳李會)에게 명하여, 다시 더 상세히 교정하고 광피도를 합하여 한 도를 만들었다. 그 요수(遼水) 동쪽과 우리 나라 강역에는 택민의 광피도에도 또한 많이 빠져서 간략한데, 지금 특별히 우리 나라 지도를 더 넓히고 일본(日本)을 붙여 새로 그림을 새겨 이룩하니, 조리가 정하여 볼 만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개 지도를 보면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알게 되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있었다.
김ㆍ가 두 공이 그림에 힘쓰고 힘썼으니, 그 규모와 국량의 큰 바를 알 수 있다. 근(近)은 재주도 없이 인재의 부족한 때를 당하여 참찬(參贊)으로 두 공의 뒤를 따랐으므로, 이 그림이 이룩됨을 즐거이 보고, 깊이 다행히 여기는 바이다. 이미 내가 평일에 책을 강구하여 보고자 하던 뜻을 이루었고, 또 내가 다른 날 물러가 시골에 있으면서도 누워서 강산에 놀게 되는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하면서, 이 말을 그림 아래에 쓰는 바이다. 건문(建文) 4년 가을 8월 일에 기록한다.
양촌선생문집 제22권 발어류(跋語類)
역대 제왕 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의 지
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에서 밖으로 사해에 닿아 몇 천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요약하여 두어 자 되는 폭(幅)에다 그리니 자세하게 기록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를 만든 것이 대개 소략(疏略)한데, 오직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게 갖춰졌으며, 역대 제왕의 국도 연혁(國都沿革)은 천태승 청준(天台僧淸濬)의〈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갖추 실렸다.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4년(태종 2, 1402) 여름에 좌정승 상락(上洛 본관) 김공 사형(金公士衡)ㆍ우정승 단양(丹陽 본관) 이공 무(李公茂)가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이 지도를 참고 연구하여 검상(檢詳) 이회(李?)를 시켜 다시 더 상세히 교정하게 한 다음에 합하여 한 지도를 만들었다. 요수(遼水) 동쪽과 우리나라 지역은 택민의〈광피도〉에도 또한 많이 궐략되었으므로, 이제 특별히 우리 나라 지도를 더 넓히고 일본(日本) 지도까지 붙여 새 지도를 만드니, 조리가 있고 볼 만하여 참으로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저 지도를 보고서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도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두 공이 이 지도에 정성을 다한 데에서도 그 규모와 국량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근(近)은 변변치 못한 재주로 참찬(參贊)이 되어 두 공의 뒤를 따라 이 지도가 완성됨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매우 다행하게 여기는 바다. 평일에 책에서 강구하여 보고자 하던 나의 뜻을 이미 이루었고, 또 내가 다른 날 물러가 시골에 있으면서 누워서 유람하는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하며 이 말을 지도 아래 쓴다.
이해 가을 8월 일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발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평양백(平壤伯) 좌정승(左政丞) 조공 준(趙公浚)과 상락백(上洛伯) 우정승(右政丞) 김공 사형(金公士衡)이 국사를 다스리던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겨 널리 구제하고자, 동지중추(同知中樞) 김공 희선(金公希善)과 협력하여 제생원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 치료를 하였으며, 또 예천백(醴泉伯) 권상 중화(權相仲和)와 더불어 그가 전에 저술한 《향약방(鄕藥方)》을 토대로 다시 더 수집하여 전서(全書)를 만들어서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지역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처방(處方)을 집성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짐승을 아끼는 마음이 깊고 또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건문(建文) 원년(정종 1, 1399)에 그 책이 완성되자, 김 중추(金中樞)가 강원도 관찰사로서 각공(刻工)을 시켜 목판에 새겨 그 전함을 영원하게 하였다.
아! 평양백과 상락백의 인후한 덕으로 그 일을 총괄하였으며, 예천백의 정박(精博)한 학문으로 그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공이 또 능히 힘을 써서 그 일을 시종 성취하였으니, 네 분이 우리나라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가 마땅히 이 책과 함께 만세에 전하여 무궁함을 기할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主幹)하는 이는, 서원군(西原君) 한공상경(韓公尙敬)ㆍ순흥군(順興君) 안공 경량(安公敬良)ㆍ김군 원경(金君元?)ㆍ허군 형(許君衡)ㆍ이군 종(李君悰)ㆍ방군 사량(房君士良)으로서 모두 여기에 공로가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책머리에 밝힌다.
기묘년(정종 1, 1399) 여름 5월 상순(上旬)
조선왕조실록
《태조 010 05/12/03(정해) / 일기도·대마도를 정벌하러 떠나는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내린 교서 》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으로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남재(南在)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삼고, 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무(李茂)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5도(道)의 병선(兵船)을 모아서 일기도(一쨓島)와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려고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사형에게 부월(쯘鉞)과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鞍馬]·모관(毛冠)·갑옷·궁시(弓矢)·약상자(藥箱子)를 내려 주었으며, 재·무·극공에게는 각각 모관·갑옷·궁시를 내려 주었다. 교서는 이러하였다.“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中外)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힘을 쓰는데,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方伯)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하였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方伯)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大臣)에게 명령하여 출정(出征)하게 하는 것이니, 소호(召虎)가 회이(淮夷)를 정벌한 것과 윤길보(尹吉甫)가 험윤(탮훋)을 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무릇 용병(用兵)의 도리를 한결같이 옛일을 따라서 일찍이 경솔한 거조가 없었던 것은 이들 백성들이 동요될까 염려하였던 것인데,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水陸)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一擧)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경은 의관(衣冠)의 명문(名門)이며 조정에서는 재상의 큰 재목이라, 기품(氣?)이 삼엄(森嚴)하고 입지(立志)가 홍의(弘毅)해서 서정(庶政)을 처리할 때는 다 이치에 맞고, 인재(人材)를 천거하면 모두 그 소임에 합당하여, 밝기는 허(虛)와 실(實)을 잘 알고, 슬기로움은 외적의 난을 제어할 것이다. 이에 제도 병마 도통처치사(諸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절월(節鉞)을 주어 동렬(同列)을 시켜 돕게 하고, 널리 막료(幕僚)를 두어서 그 위엄을 중(重)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부복(俯伏)해서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肝膽)이 떨어질 터이니, 경은 앉아서 계책을 세워서 장수와 군사들을 지휘하여 두 번 출병할 일이 없게 하여, 만전(萬全)을 도모하여 나의 생각에 맞게 하라. 혹시나 장수나 군사가 군율(軍律)을 어기거나, 수령(守令)들의 태만한 일이 있거든 법대로 징계할 것이며, 크거나 작은 일을 물론하고 즉시 처결(處決)하라.”도당(都堂)에서 한강(漢江)까지 전송하였다.
시(詩) ; 춘정집
상락백(上洛伯)의 시권에 쓰다.
계통이 신라의 귀족에서 시작되고 / 系出新羅貴
가문은 상락에서 비로소 창성했지 / 門從上洛昌
뿌리가 깊으니 가지가 무성하고 / 本深知末茂
근원이 깊숙하니 물줄기 길다네 / 源遠合流長
선친의 벼슬이 의정부 에 오르니 / 顯考登黃閣
가문의 명성이 사방에 퍼지었지 / 家聲蓋四方
참소를 너무나도 심하게 하였으나 / 巧讒雖太甚
훌륭한 덕망에는 손상이 없었다네 / 盛德竟無傷
임금님이 어떻게 왜곡되게 하겠는가 / 天聽寧循枉
유언비어 퍼뜨린 자 패망을 자초했지 / 流言只速亡
황제 명 받들어서 오랑캐 정벌하니 / 征夷承帝命
부월로 군대를 지휘하여 나갔었지 / 杖鉞整戎行
훌륭한 명성은 청사에 전해졌고 / 令譽傳靑竹
당당한 위풍은 대양에 떨치었네 / 威風震大洋
훌륭한 손자가 줄지어 태어났고 / 蘭孫相繼序
애애한 그 우애 향기가 풍기었네 / ??爛生香
적선하지 않은 적이 일찍이 있었는가 / 積善何曾已
흐르는 그 경사가 저절로 끝이 없지 / 流芳自未央
경사가 모여서 큰 보필 탄생하니 / 慶鍾生碩輔
상제가 훌륭한 보필을 주신 거지 / 帝遣賚□良
넓고 넓은 그 도량은 창해보다 더 깊고 / 浩汗深滄海
뛰어난 그 재질은 예장에서 나왔다네 / 魁梧發豫樟
겸손하여 치솟는 기염을 감추었고 / 謙恭藏氣焰
정밀하여 털끝까지 분석을 다하였지 / 精密盡毫芒
빠른 발은 천리마로 우러러보았고 / 絶足瞻騏驥
기이한 깃털은 봉황으로 알아봤지 / 奇毛識鳳凰
사헌부 에 들어가서 진가를 발휘하니 / 憲司初振價
때마침 벼슬길에 인재를 선발했지 / 宦路會明易
이조 의 관원되어 인재를 선발하고 / 銓選天官貴
벼슬은 낭관이라 풍류의 사내라네 / 風流錦帳郞
만기되어 떠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 懸魚爭臥轍
위엄 있어 사방에서 기강을 세웠다네 / ?笏四提綱
번다한 업무 처리 장창(張敞)으로 추앙하고 / 理劇推張尹
은덕에 감동되어 소당을 노래하네 / 懷恩賦召棠
시대에 응하여 화육에 참여하니 / 應時參化育
태양을 붙잡고 창공으로 올라갔지 / 扶日上穹蒼
건국의 초기에 면밀히 건의하고 / 草昧謀猷密
정사를 총괄하여 사업이 드러났지 / ●綸事業彰
관직이 높아서 임금을 모시었고 / 官高陪袞職
권한이 중하여 응양위를 관장했네 / 權重攝鷹揚
붉은 신 신고서 태두에 임하였고 / 赤?臨台斗
깨끗한 기풍은 의정부 를 쇄신했지 / 淸風灑廟堂
단청에 뚜렷이 모습을 남기니 / 丹靑垂炳炳
명성이 날마다 찬란히 났었지 / 聲績日煌煌
출정하자 임금님이 나와서 전송하니 / 出將親推?
회유할 때 칼날을 번득일 필요 있나 / 懷綏耀耀?
어려움을 타개하여 사직을 안정시키고 / 濟屯能定社
사명을 띠고서 황제에게 조회했네 / 持節用賓王
늙어서 귀향한 건 이윤을 바랐었고 / 告老希伊尹
일신의 안전책은 자방을 사모했지 / 安身慕子房
해맑은 흉금은 옛 샘보다 더 맑고 / 沖襟澄古井
화평한 기운은 봄볕처럼 가득하지 / 和氣?春陽
지역을 떼어서 천호에 봉하시니 / 裂土封千戶
나라를 경영한 지 십 년이 가까웠네 / 經邦近十霜
성공하자 총애를 경계할 줄 안지라 / 成功知戒寵
병으로 사직하고 감추려고 하였다네 / 謝病要懷藏
소박을 함양하여 자애를 실행하고 / 養素居仁宅
묘리를 생각하여 지혜를 짜내었지 / 思玄佩智囊
성상은 옛 신하를 기용하려 했으나 / 聖心圖任舊
신하의 도리는 광채를 감춰야지 / 臣道重含章
큰 도량은 강물을 건너는 배에 알맞고 / 大度宜舟楫
큰 재목은 동량의 사용에 적합하지 / 宏材合棟樑
호공은 거듭 나와 임금을 보필하고 / 胡公重補闕
조씨는 또다시 행장 꾸려 나왔다네 / 曺氏再治裝
옥촉이 조화를 이룬 지 오래되니 / 玉燭調和久
금구 속에 들어간 그 성명이 꽃다웠지 / 金?姓字芳
은 나라 고종 은 누룩을 일컬었고 / 殷宗稱麴?
주 나라 선비는 고양을 노래했지 / 周士詠羔羊
씩씩한 위풍은 뭇 관료의 표상되니 / 抑抑群公表
온 세상이 머리를 늘여서 바라보네 / ??一世望
영예의 명성은 병위와 대등하고 / 榮名同丙魏
세대의 미덕은 원양과 짝하였지 / 世美配袁楊
미덕을 좋아한 건 백성의 성품이고 / 好德民之性
어진이 친한 것은 성인의 착한 바지 / 親仁聖所藏
내 선친이 일찍이 친구로 사귀었고 / 先人?契托
내 외조도 이웃의 광채를 빌리었지 / 外祖借?光
마음에는 간절히 태산처럼 존경하고 / 志切邱山仰
은혜는 하나하나 헤아릴 수 없다네 / 恩非分寸量
여러 대를 유난히 사이좋게 지냈으니 / 偏欣累世久
문 밖을 청소한 걸 그 누가 본받겠나 / 誰效掃門傍
더듬어 생각건대 지나간 진사년에 / 憶昔辰加巳
이 몸이 병들어서 자리에 누웠을 때 / 沈綿病在牀
먼 곳에 살면서도 이 점을 기억하고 / 遐方仍記憶
좋은 약재 상자에 가득히 담아 왔지 / 良藥滿中箱
아쉽게 머리털을 뽑아도 못 갚으니 / 擢髮嗟難報
가슴에 아로새겨 잊지를 않았었지 / 鏤肝?不忘
혼자서 가노라니 정말로 쓸쓸하고 / 獨行眞??
세상을 떠나니 저절로 처량해라 / 違世自??
조용히 앉아서 혼돈을 탐구하다 / 靜坐探無始
느긋하게 읊조리며 팔방을 바라보네 / 長吟望八荒
우주를 흔들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 敢思?宇宙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나 합당하지 / 只合事耕桑
병 끼고 있으니 게을러질 뿐이고 / 帶疾徒成懶
시벽(詩癖) 들어 결국에는 미치광이 되었다네 / 貪詩竟作狂
올 때나 갈 때나 가까이 모시었고 / ?來參近侍
뒤따라 다니면서 종종걸음 쳤었다네 / 踵武每趨?
졸렬한 이 말씀이 찌꺼기 같지마는 / 拙語雖糟粕
깊은 정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네 / 深情出肺腸
비오니 그대께서 오래오래 사시어 / 祝君惟壽考
세상을 구제하여 태평을 이루소서 / 濟世致平康
次韻拜獻右侍中上洛伯座下 (차운배헌우시중상락백좌하)
상락백은 바로 김사형(金士衡)이다.
차운하여 우시중 상락백 좌하에 올리다. (정도전 시)
恭惟侍中公 (공유시중공) / 삼가 생각컨데 김 시중은
氣和心膽雄 (기화심담웅) / 기운이 화평하고 심담이 크네
奮義決大策 (분의결대책) / 의를 떨쳐 큰계책 결정을 짓고
鷹揚摠兵戎 (응양총병융) / 매처럼 날쌔게 군사를 총제 하누나
一朝膺大拜 (일조응대배) / 아루 아침 정승으로 제수가 되니
禮秩何其崇 (예질하기숭) / 예우가 어찌 그리 융숭한가
小子첨夙契 (소자첨숙계) / 소자는 숙계가 있었으니
遠自兩尊翁 (원자양존옹) / 멀찍이 저 두분 존옹에게서
幸哉逢嘉會 (행재봉가회) / 다행하다 아름다운 모임을 만나
得與開國功 (득여개국공) / 나라세운 공로에 참여했네
攀附靑雲路 (반부청운로) / 청운의 길에 오르고
追趨丹鳳宮 (추추단봉궁) / 단봉의 대궐에 나아갔지요
時時奉論議 (시시봉론의) / 때때로 논의를 받들 적에는
有如聞黃鐘 (유여문황종) / 마치 황종 소리를 듣는듯 했소
信知江海量 (신지강해량) / 진실로 알고말고 강해의 양은
不與行滾同 (불여행곤동) / 작은 행로와 같지 않다는 것을
所期保貞操 (소기보정조) / 기대하노니 정조를 꼭 보전하여
白首好過從 (백수호과종) / 늘그막에 좋게 상종 하면서
上以奉君親 (상이봉군친) / 위로는 군친을 고이 모시고
下以明寸衷 (하이명촌충) / 아래로는 촌심을 밝혀 주소서
善竹橋(선죽교) 익원공 김사형
曾聞周國伯夷淸 일찍 주나라 백이숙제의 결백함을 들었는데
餓死首陽不死兵 그들은 수양산에서 주려 죽은 것이지 병정손에 죽은 것이 아니다
善竹橋邊當日事 선죽교 다릿가에 그날 당한 일은
無人扶去鄭先生 정선생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던가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공 사형(金公 士衡)에 대한 만사(輓詞); 양촌(陽村) 권근(權近)
寬厚天資德望尊(관후천자덕망존) / 너그럽고 후한자질 덕망도 높아
聖朝開國作元勳(성조개국작원훈) / 개국한 공훈이 성조에 으뜸이라
聯翩鐵券藏盟府(연편철권장맹부) / 잇달은 철권은 맹부에 간직되고
煥赫金章繼相門(환혁금장계상문) / 빛나는 금장이 상문에 줄지었네
心爲憂民常自渴(심위우민상자갈) / 백성 위하는 마음은 늘 목말랐고
眼因哭子更多昏(안인곡자경다혼) / 아들잃은 슬픔에 눈이 더욱 어두웠네
蒼天不愁誠難料(창천불수성난료) / 하늘이 남기지 않는뜻 참으로 모를레라
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 / 해로가 슬픈소리 애가 끊어지누나
시(詩) ;춘정집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대한 만사
대대로 전해 오는 적선이 뛰어나고 / 傳家積善正無倫
정말로 동한의 사직의 신하였지 / 眞箇東韓社稷臣
나라에 마음 바쳐 귀밑머리 희어졌고 / 許國寸心雙?雪
사람 대하는 그 화기는 일단의 봄이었지 / 接人和氣一團春
운대에서 필단 잡아 큰 공로 드러나고 / 芸臺繪綵殊勳著
어가가 왕림하여 은총이 새로웠네 / 玉輦親臨寵數新
육십칠 년 모두 다 꿈 속과도 같아라 / 六十七年渾似夢
처량한 상엿소리 새벽에 들리었네 / ?歌凄楚響淸晨
再過楊季平村舍 (양계 평촌사를 두 번째 지내면서) 익원공 김사형
碧溪西畔亂山東 서쪽에는 푸른 시냇물이 흐르고 동쪽에는 여러 산들이 어지럽게 서있네
楊子高亭活畵中 양자의 높은 정자 그림속에 살아 있으니
淸福豈容人久假 이 맑은 복을 어찌 남에게만 오래 주고 있으랴
勝遊眞似夢還空 멋진 놀이는 참으로 허무하게 돌아온 꿈만 같도다
樂生莫作千年調 인생이 천년을 고루 살기를 즐기지 마라
養拙甘爲一野翁 수양하여 한날 야옹이 됨이 좋으련만
不久收身同結社 멀지 않아 몸을 거두고 함께 모일 것이니
半分溪月與山風 시냇가에 저 달과 산바람을 반만 나누어 주오
조선왕조실록 제1집 (태종 014 07/07/30 신사 )/상락 부원군 김사형의 졸기
상락 부원군 김사형이 졸하였다 김사형의 자는 평보인데, 안동부 사람이다. 대대로 귀하고 현달하여, 고조 김방경은 첨의 중찬 상락공으로서, 문무 겸전의 재주가 있어 당시의 어진 재상이었고 조부 김영후는 첨의 상락후 였다. 김사형은 젊어서 화요직을 두루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 가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을 일신하고 대신을 나누어 보내 각지방을 전제하여을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내를 잘다스렸다. 경오년에 지밀직사사로서 대사헌을 겸하였고 조금뒤에 지문하부사로 승진하였다. 대사헌에 있은 지 일년이 넘었는데 조정이 숙연 하여졌었다. 여러번 전직하여 삼사 좌사가 되었다가 임신년 7월에 여러 장수. 재상들과 더불어 태상왕을 추대하여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 전서 옹양위 상장군에 승진하고 일등공신에 녹훈되어 분의 좌명 개국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12월에 문하 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에 봉작되어 식읍 1천호에 식실봉 3백호를 받았다. 정축년에 겸 판사헌부사를 제수받았다. 무인년의 변란에 김사형이 조준과 함께 대궐에 나가 백관을 거느리고 적장을 세워 사자를 삼을것을 청하였다. 상왕이 임 내선을 받으니 녹공이 또 1등이 되어 공신의 호를 더하기를 "동덕 정난 정사" 라 하였다. 건문황제의 등극때에 중국에 들어가 하례하였다. 기묘년 12월에 스스로 성만하다고 진달하여 여러번 직임을 그만두기를 비니 상왕이 오랫만에 허락하였다. 김사형이 조준과 더불어 8년 동안 함께 정승 노릇을 하였는데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을 전담하고 사형은 관대하여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을 진압하니 물의가 의중하였다. 주상이 즉위하자 신사년 3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었다가 임오년10월에 사임하고 영사평부사가 된지 달포가 지나서 부원군이 되어 사제로 은퇴하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않고 성색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때부터 운명할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졸한 나이가 67세이다. 조회를 3일을 정지하고 좌부대언 윤수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이라 하였다. 두 아들은 김승과 김육이다.
▣ 김태서 - 바쁘다 보니 게시판에 있는 글을 읽기도 벅차네요. 너그럽게 봐 주십시요.
▣ 김항용 - 이 글은 본 홈에 안 올려진 것인가요
▣ 김윤만 -
▣ 김윤식 -
▣ 김태서 - 안 올려진 부분도 있습니다.
▣ 김항용 - 안 올려진 부분만 가려서 리플로 달아 주시면 홈에 올리곘습니다.
▣ 김태서 - 안 올려진 부분은;조선왕조실록(일기도,대마도....교서) , 춘정집(상락백의 시권에 쓰다, 정도전 시 , 양촌 권근 시, 춘정집(상락부원군 만사, 조선왕조실록(상락부원군 김사형 졸기) 이상 6가지 입니다.
▣ 김항용 - 예 감사합니다. 내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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