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잡지(별건곤)
페이지 정보
김태서 작성일04-03-13 06:36 조회1,519회 댓글0건본문
잡 지 명 | ![]() |
별건곤 |
잡 지 (호수) | ![]() |
제7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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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 |
1934-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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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자 | ![]() |
壽春山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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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사 제 목 | ![]() |
四千年史外史, 仁祖反正時 秘話, 反正亂中 三大 女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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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사 형 태 | ![]() |
문예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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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 version="1.0" encoding="UTF-8"?>1. 斷髮女偵探禮順 광해군(光海君) 15년 癸亥-서기 1623-3월 15일 밤에 청천벽력과 가티 이러난 인조반정의 정변은 그 전날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쫏차내고 자긔가 드러서던 소위 세조반정(世祖反正)과 또 중종(中宗)이 연산군(燕山君)을 쫏차내고 대신 임금이 되던 중종의 반정(中宗反正)과 아울너 이조력사상(李朝歷史) 삼대정변으로 치는 큰 정변이엿다. 그 반정운동의 표면에 나서서 가진 음모와 활약을 다하던 사람은 물론 당시 서인파(西人派)의 김류(金瑬), 최명길(崔鳴吉),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신경진(申景禛), 이서(李曙), 심긔원(沈器遠), 장유(張維) 등 여러 사람이엿지만은 만록총중일점홍으로 그 이면에 남모르게 숨어잇서서 모든 탐정과 모든 알선을 하야 반정운동에 큰 원조를 한 무명의 녀류호걸이 세 사람이 잇섯스니 한 사람은 그 반정란에 큰 공신으로 유명하던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의 딸 이례순(李禮順)이오, 그 외 두 사람은 역시 그 때의 공신 완남군 이후원(完南君李厚源)의 형수 조부인(兄嫂 趙夫人)과 이긔축의 부인 정씨(李起築夫人鄭氏)다. 이례순은 원래 자색이 출중하고 천재가 비범하야 어려서부터 말을 잘하고 시문(詩文)에 또한 능한 까닭에 그 아버지에게 여러 남매 중 제일 사랑을 만과바덧섯다. 그러나 재자가인은 원래 박명이 만히 탓이라 할지 그는 일즉이 김자점의 아우 자겸(金自點弟自兼)에게 출가하엿다가 불행이 청춘에 과부가 되야 적막한 공규(空閨)에서 가련한 독신의 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관게로 참찬 오겸의 아들 언관(參贊吳謙의 子 彦寬)과 비밀한 정을 통하고 세상사람의 이목을 피하야 멀리 남으로 남으로 경상남도 거창(慶南居昌)으로 도망을 하야 산중 석굴속(石窟)에다 사랑의 복음자리를 정하고 비밀의 생활을 하더니 호사다마로 일이 발각이 되니 당시에 소위 법을 맛튼 사나운 관리는 언관을 잡아다가 부녀를 유궤도주(誘捌逃走)하얏다는 죄명으로 장자타지(杖之打之)하야 무참하게 형살(刑殺)을 하니 례순은 자긔의 신세와 세상일을 아주 비관하고 생명가티 악기던 그 탐스러운 머리를 가위로 선득 잘너버리고 녀승이 되 엿섯다. 그리하야 전날에 록빈홍안의 귀여운 미인이던 그는 일조에 가사속낙의 가련한 신세가 되야 가을 하눌에 뜬 구름 모양으로 이불당 저불당으로 정처업시 도라다니며 청승스럽게 나무아미타불을 불으고 무정한 사바세게를 저주 원망하다가 그럭저럭 다시 서울부근의 어떤 사찰에 와서 몸을 의탁하고 한적한 세월을 보내엿다. 그러나 얼마 안이하야 그의 신변에는 뜻박게 또 큰 재변이 생겨낫스니 그것은 다른 일이 안이라 그 절에 잇는 하인놈이 도적질을 하다가 금부(禁府=지금 檢事局가튼 것)에 잡히게 된 까닭으로 그까지 그 연좌에 죄를 입어 자수궁(慈壽宮) 궁비(宮婢)의 천역(賤役)으로 적입(籍入)된 것이엿다. 그 때에 그는 자긔의 신세타령을 하며 자탄시 한 수를 지엿스니 그 시는 명작도 명작이어니와 그 사의가 매우 비창하야 읽는 사람으로 하야금 또한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自詩) 祇今衣上活黃塵, 何事靑山不許人. 圓宇只能囚四大, 金吾難禁遠遊身. 그가 그때에 그러케 애매한 연좌의 죄를 입어서 궁비의 천역까지 하게 된 것은 물론 그러한 불행이 업겟지만은 한편으로 보면 또 다행한 일이엿는지도 알 수 업다. 그는 원래 재색이 출중하고 매사에 령리한 까닭에 그 궁에 잇는 동안에 궁인에게 만흔 신임을 바더서 그 궁인이 무슨 일로 궁중출입을 할 때이면 반듯이 그를 다리고 다니게 되고 그 인연으로 또한 당시 궁중에 일대 훈천의 세력을 가젓던 김상궁(金尙宮=이름은 개똥이)과 알게 되엿섯다. 김상궁은 그를 한 번 본 뒤로 특별히 사랑하야〈6〉 자긔의 양딸을 삼고 자긔의 집에다 다려다 두니 례순과 김상궁간의 정의는 비록 친모녀의 정이라도 따를 수가 업고 따러서 례순의 말이라면 김상궁이 드러주지 안는 것이 업스니 례순은 명의는 비록 천역이나마 엄연이 궁중에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엿섯다. 그리하야 그는 인조의 반정운동에도 직접 간접으로 남모르게 만흔 원조를 하야 여간한 큰 힘을 준 것이 아니엿다. 안이 다만 원조뿐이 아니라 그 때에 만일 그 이씨가 궁중에 잇서서 전후의 내정탐보(內情探報)와 알선을 하지 안엇더면 반정파(反正派)가 성공은 고사하고 먼저 적족의 참화(赤族慘禍)를 입엇슬 것이다. 그 중에도 한 례를 드러 말한다면 바로 반정의 긧발을 들던 수월전-계해(癸亥) 정월이엿다. 이귀 등의 반정음모가 엇지하야 그랫던지 미리 누설이 되야 한유상(韓惟翔)이 지급히 장게를 하니 그 때 반정파의 화란은 일발의 위긔에 당하얏다. 이귀는 그 시긔에 자긔의 딸로 하야금 김상궁에게 말하야 부명(父命)을 애걸케 하고 자긔는 형식으로 아들 형제(李時白, 李時昉)를 친히 다리고 명을 등대하며 광해군에게 변명의 상소를 하엿다. 『전하게서 신에게 이천(伊川)에서 사찬(賜饌)을 하시고, 곡산(谷山)에서는 사주(賜酒)하시고, 장성(長城)에서는 상포(賞布)를 주시고, 숙천(肅川)에서 또 사주(賜紬)하신 것은-그 전에 광해군이 이귀에게 그러한 사은(賜恩)이 잇섯다-*양이 무궁하도록 성은을 잇기 어려운 바이올시다. 신을 나흔 사람은 아비요, 신을 살리시는 이는 전하이온대 이제 모역의 악명을 쓰게 되오니 신의 부자를 속히 죽여주십소사... ...』 이러한 상소를 보고 광해군이 반신반의하는 중에 그의 가장 신임하는 김상궁이 극력 변명하야 말하되 이평산(李平山은 李貴)은 이 세상의 무명인물로 가련한 인생이요 김자점(金自點)은 일개 서생인 즉 족히 가론할 바 못된다 하니, 광해군은 그저 웃고 듯게만 되야 드듸여 화를 면하엿섯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반정하던 바로 그 당일에 이유성(李惟聖)이 그 내용을 박승종(朴承宗)에게 말하야 승종이 예궐 고변하니 (그 때의 사실로 말하면 처음에 이후원(李厚源)이 이유홍(李惟弘)의 아들 이문(以紋)에게 반정에 참가를 권유하얏더니(유홍이 강계(江界)에 구양갓슬때에 그 때 부사 김류(府使金瑬)와 서로 친한 까닭) 이문이 그 삼촌 유성(惟聖)에게 말하고 유성은 김진국(金*國)에게 김은 또 박에게 말한 것이다.) 대신파 밋 금부당상(禁府堂上)이 모도 궐하에 뫼혀서 처분을 기다리게 되매 화가 또한 급박하게 되엿섯다. 그러나 교제에 민활한 김자점은 주찬과 뇌물로 김상궁을 매수하고 이귀는 또 자긔의 딸을 식혀서 그럿치 안은 것을 김상궁에게 극구 변명하야 또 변명하야 김상궁으로 하야금 광해군에게 또 변명을 하게 하니 광해군이 김상궁의 말을 고지듯고 고변장도 본체만체하며 그냥 안심하고 궁인들과 가티 태평하게 연회만 하고 놀다가 날이 그럭저럭 저물어 궐문을 다치게 되니 대신과 금부관들이 부득이 궐문박 비변사(備邊司)에 퇴류하며 명을 기다리고 잇다가 밤중에 이르러 별안간 반정군이 궁궐을 습격하게 되니 만사가 다 와해되고 인조일파의 반정당이 크게 성공을 하게 되얏다. 반정 뒤에 이례순은 과연 엇지 되엿는지 그것은 긔록에 전한 것이 업서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큰 유감이나 례순은 당시 일류녀정객이엿던 것은 넉넉히 알 수 잇섯던 것이다. 2. 閨中에 숨은 女參謀 완남군 이후원(完南君 李厚源=厚源은 廣平大君 7대손이요 黃廷彧 外孫이니 반정시 3등공신으로 완남군을 봉하얏다)의 형 첨추 이후재(李厚載)의 부인 조씨(趙氏)는 풍옥헌 조수륜(風玉軒趙守倫)의 딸이오 창강조속(滄江趙涑=涑의 一音은 수)의 누님이다.〈7〉 그는 어려서부터 지개가잇서 늠늠한 녀장부의 풍이 잇고 여러 경사(經史)를 능통하야 해박한 지식과 민첩한 행동이 유염남자(有髥男子)를 능히 압도하니 천성이 염격하기로 유명한 그의 남편도 항상 감복하야 매사를 그에게 자문하고 시부모도 또한 크게 신임하야 일반가정(家政)을 전부 그에게 위임하얏섯다. 그 때에 포악하기로 유명한 광해군(光海君)은 일반국정을 그릇치고 무고한 신민을 함부로 죽엿섯는데 임자무옥사건(壬子誣獄事件) 때에 조부인의 부친 풍옥헌(風玉軒)이 또한 억울하게 죽으니 그는 그 아버지의 비명횡사한 것을 크게 원통하게 생각하야 일주일 동안이나 물 한 먹음 장 한 술을 입에 대이지안코 불으지지며 통곡하다가 긔절까지하고 다시 살어나니 보는 사람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안는 사람이 업섯다. 그는 그러케 하루와 가티 삼년상을 치르고 그 아버지의 원수를 가푸랴고 절치부심하고 그의 아우 창강(滄江)과 여러 가지의 밀모를 하고 또 자긔 남편의 아우 리후원(李厚源=李는 廣平大君의 7대손이요 黃廷彧의 외손이니 반정후 3등공신으로 完南君을 封하얏다)을 지휘하야 김류(金瑬), 홍서봉(洪瑞鳳), 이서(李曙) 등 여러 사람과 결탁하야 반정운동을 이르키게 하고 모든 책모와 계획을 가르치며 자긔는 또 자긔집 가묘(家廟) 속에 숨어드러 안저서 군복 수백벌을 비밀이 제조하야 반정군에 제공하니 그는 그 때 반정운동에 엄연한 녀류참모장이 되는 동시에 군수품주계(主計)장격이 되엿섯다. 그 반정운동에는 물론 표면에 나슨 여러 남성정객들의 공적이 만치만은 이면에는 이 숨은 녀정객의 공적이 또한 만흔 것을 이저서 안될 것이다. 그의 남편 형제와 친정아우가 반정공신이 된 것도 또한 그의 충동과 지도를 바든 것이엿다. 그럼으로 계해(癸亥)반정 이후에 여러 훈신들이 모혀서 무슨일을 의론할 때이면 반듯이 먼저 그에게 자문을 하고 또 그가 한 번 이리저리하라고 지도한 일이면 무엇이나 실패된 일이 업스니 일반이 모도 그를 흠모경복하고 따러서 평소에 여러 훈신들이 이후원(李厚源), 조창강(趙滄江)을 남다르 게 대우하엿섯다. 그리고 그의 가로(家奴) 중에 은세(恩世)라 하는 사람이 잇섯스니 그는 위인이 간능(幹能)하고 사리가 명백하야 그가 무엇을 식히면 그보다도 더 한층 일을 잘 처리하니 그 때 사람들이 모도 유시주 유시노(有是主, 有是奴)라고 층찬하엿섯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그가 가족을 다리고 호서(湖西=忠淸道)로 피란을 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또 호남(湖南=全羅道)으로 피란을 하얏는데 모든 일을 그 하인에게 위탁하고 부인은 미리 그 하인을 불너서 산천의 험이(山川險易)한 것과 도로의 원근(道路遠近), 려관의 유무(旅館有無) 등을 일일이 가르처서 여사여사이 하라고 지휘하고 그 하인은 또 그 부인의 지휘를 바더서 일호를 그릇됨이 업게하니 란리중 천리원정을 왕복하야도 조곰도 군핍함과 랑패된 일이 업섯다. 부인은 일즉이 한 아들을 나엇스니 이름은 형(逈)이엿다. 그는 그의 아우 창강에게 뭇되 이 아희가 장래 자라서 집안을 수성할만즉 하냐 하엿더니 창강은 대답하기를 비단 수성만 할 뿐만 아니라 후래에 복록이 무궁하리라 하니 부인은 그만 결심하야 단산(斷産)을 하고 지씨와 라씨(池氏, 羅氏)의 량가집 딸(良家女) 두 녀자를 택하야 자긔 남편의 첩을 삼엇섯다. 그 뒤에 그의 아들 이형(李逈)은 과연 아들 8형제를 나어서 다 현달하고 또 손자 20여 인을 나엇스니 지씨와 라씨가 그들을 보육하는데 또한 공이 만엇섯다. 그 후 그의 손자 록천리유(鹿川李濡)시대에 이르러서 그의 비(碑)를 무덤압에 해 세우고 그 사실을 긔록하니 세상사람들이 그의 갸륵한 것을 잘 알게 되엿섯다. 3. 李起築夫人 鄭氏 비단결가튼 금강(錦江)이 구비구비 감도라 흐르고 수려한 봉황산(鳳凰山)이 병풍가티 둘너싸흔 충남의 명도 공주(忠南名都公州)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320여년 전(宣祖末年頃)에 일개 녀장부가 고고(呱呱)의 소래를 치고 탄생하엿스니 그는 그 곳 리방부호(吏房富豪)로 유명한 정모(鄭某)의 귀동딸이엿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비범하야 문필이 능난하고 지감(知鑑)이 잇는데 겸하야 인물이 또한 어엽부니 부모가 특별이 애지중지(愛之重之)할 뿐 아니라 일읍 사람이 모도 그를 층찬하야 방년 이이팔에 이르매 맛치 꼿향기를 맛흔 벌떼모양으로 이곳 저곳서 청혼이 빗발치듯 드러왓섯다. 그 청혼을 하는 이 중에는 자긔네와 가벌이 갓고 돈이 만흔 아전의 아들도 잇고 가품조코 인물 구수한 촌양반의 아들도 잇스며 심지어 군수관찰의 아들이 양첩 혹은 후취로 장개가겟다는 청까지 잇섯다. 자긔의 부모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어떠한 곳이던지 그 중에 제일 조흔 곳을 선택하야 출가식히랴고 하엿섯다. 그러나 그 녀자는 무슨 까닭인지 청혼이 들면 드는 쪽쪽 모도 퇴각하여 바리엿다. 어떠한 양반이고 부호이고 미남자고 전부 거절을 하고 자긔 부모에게 말하기를 나는 언제이던지 내 눈에 들고 내 마음에 맛는 사람이 아니면 비록 청춘홍안(靑春紅顔)이 반백발이 될지라도 결코 시집을 가지 안는다구 맹서하니 부모도 또한 엇지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동정만 살필 뿐이엿다. 어떤 해 가을이엿다. 추수가 한참 림박한 때에 그 리방의 집에 두엇든 머슴사리가 어대로 뛰여나가고 새로 머슴을 한 사람 구하게 되엿다. 하루는 어떤 떡거머리총각이 그 집을 차저와서 머슴살기를 청하는데 키가 구척장승갓고 얼골은 껌어투루룩한〈8〉 것이 맛치 숫가마에서 새로 나온 숫장수의 얼굴갓고 몸집은 크기가 깍지뎅이갓햇다. 그 집주인들은 그를 한 번 보고는 경풍을 하다 십히 깜작 놀낼지경이나 그의 신체가 그와 가티 장대하니 물논 힘이 세이고 일도 잘 하리라 하야 집에다 두고 일을 식히게 되엿다. 그는 모양이 그와 가티 장대하게 생기니만치 힘이 또한 천하장사이여서 쌍수산성(雙樹山城) 가튼 곳으로 나무를 하러가면 남처럼 낫이나 독기를 가지고 가지안코 그냥 맨손으로 지게 하나만 지고가서 한아름식 되는 나무를 손으로 무배추 뽑듯이 쑥쑥 뽑아서 질머지고 오니 일읍 사람들이 모두 하품을 하고 놀냇섯다. 그러나 위인이 침묵하고 우직(愚直)한 까닭에 종일 가도 누구와 실업슨 말 한마대를 아니하고 남이 식히면 식히는 그대로 일만할 뿐이요 자긔의 근본도 래력도 성명도 도모지 알지를 못하고 다만 긔축년(己丑年)에 나흔 까닭에 일음을 긔축이라고 할 뿐이엿다. 그리하야 남들이 별명짓기를 바보장사니 바보긔축이니 하고 조롱을 하며 그 집주인과 심지어 하인들까지라도 그를 일 잘한다구 칭찬할지언정 사람으로는 아조 할 수 업는 하우부리 바보로 알엇섯다. 그러나 그 집주인의 딸은 그를 속으로 특별이 사랑하고 특별이 흠모하야 무슨 음식이던지 맛난것이 잇스면 잘 거더먹이고 의복가튼 것이라도 해지면 다른 옷을 박구어 주엇섯다. 그러나 누가보든지 그 처녀가 그를 사람으로 불상이 여기여서 그리하지 그를 남달니 사랑해서 그리 하리라고는 뜻이나 하엿스랴. 그러나 천만뜻박게도 그 처녀는 긔축이를 벌서 자긔의 남편될 사람으로 인정하고 상당한 시기에 정식의 결혼식을 하랴고 결심까지 다 하얏섯다(물논 긔축과 비밀히 관게가 생긴것은 아니다). 그의 부모는 그러한 사정도 모르고 하루는 어떠한 집과 약혼을 하랴고 그 처녀에게 다시 의사를 물엇섯다. 얼마전 까지라도 자긔와 맛는 사람이 아니면 결혼치 안는다든 그 처녀는 아주 대담하게도 부모에게 말하되 저는 벌서 남편될 사람을 선택하야 노앗스니까 다만 결혼식 할 것이 문뎨이지 다른 곳과 약혼은 문제도 삼을 것이 업다고 하엿다. 그의 부모는 깜작 놀나며, 네가 미친년이란 말이냐 남편을 정하다니. 부모도 모르게 무슨 남편을 정한단 말이냐. 정하엿다면 또 어떤 놈이란 말이냐 하니 처녀는 천연한 안색으로 대답하되 대단 죄송하온 말슴이외다. 「소녀의 남편될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니라 집에 머슴노릇하는 긔축이올시다. 남이야 흉을 보든 새든 저는 그 사람과 결혼을 못하게 된다면 찰아리 약을 먹고 죽거나 그러치 안으면 금강(錦江)에 가서 빠저죽겟습니다」하였다. 그의 부모는 하도 어이가 업서서 아모말도 못하고 잇다가 다시 별의별 말을 다하엿스나 이미 죽기까지 결심한 그 처녀는 절대로 부모의 말을 듯지 안엇섯다. 일이 이와 가티 되고 보니 부모도 또한 그를 죽일 수도 업고 하야서 다만 집안의 운을 한탄하며〈9〉 결혼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집안사람과 일반사람 소시에 하도 창피하니까 그의 부모는 그들 부부를 집에 두기가 창피하야 약간의 돈양을 변통하야 주고 먼 지방으로 가서 죽던지 살던지 혼자들 가서 살고 다시는 부모압헤 뵈지도 말나하니 긔축의 부부는 할 수 업시 그 집을 떠나 북으로 북으로 유리하야 온다는 것이 서울의 새문밧 평동(平洞)이엿다. 그는 월래 지감이 잇서서 자긔의 손으로 그 일을 맨든 것이 때문에 족음도 부모나 누구를 원망치안코 도로혀 장래에 도라올 행복을 기뻐하며 술장사 영업을 하게 되엿다. 그들은 맛치 옛날에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탁문군(卓文君) 모양으로 부인은 친히 술을 붓고 긔축은 전후 심부름을 하엿섯다. 남이보면 긔축은 역시 한 술집 더부사리가티 보엿다. 그러나 그 부인은 조금도 그를 업수이 역이지 안코 공경하며 부즈런이 영업을 하니 불과 일년 동안에 미천도 상당이 모게 되엿섯다. 그 때에 광해조(光海朝)라는 임금이 여러 가지의 악정(惡政)을 하야 심지어 그의 모후(母后)되는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 金氏)(宣祖王妃)를 서궁에 가두고 자긔의 아우 여러 형제를 또한 무참하게 죽이며 정부대관(政府大官)은 모도 대북(大北)일파가 차지를 하야 서인(西人)들은 꿈적도 못하게 되니 서인중에 김류(金瑬), 최명길(崔鳴吉), 리괄(李适), 장유(張維), 신경진(申景禛) 등의 여러 불평객들은 광해군을 드러내고 인조대왕(仁祖大王)을 새로 드러세워 서인의 세력을 다시 회복하려고 혹은 강정(江亭)으로 혹은 절간으로 혹은 산속으로 모혀다니며 음모를 하엿는데 그 때 서울서 제일 수석(水石)이 조코 제일 으슥한 곳은 창의문 밧이기 때문에 그들은 매일 노리하러 가는척 하고 그 곳으로 모히게 되엿다. 하루는 우에 말한 여러 사람이 시회(詩會)를 하는 척하고 홍제원(弘濟院) 솔밧으로 모히게 되엿다. 그때이다. 이긔축의 부인은 발서부터 여러 사람들이 반정의 음모를 하는 것을 짐작하고 항상 그들의 동정을 살피더니 이날은 그 부인이 술안주와 조흔 술이며 떡에 밥에 가진 음식을 특별히 작만하야 긔축에게 한 짐을 잔득 지워주고 또 통감사권(通鑑 第4卷)을 주되 긔중 한곽광(漢藿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페한 구절을 표하야 주며 부탁하되 「이 음식을 곱게 질머지고 저기저기 무학자고개를 넘어서 홍제원으로 가면 그 뒤 솔밧헤 어떤 한 선비들이 칠팔인 모혀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잇슬터이니 아모말도 하지 말고 그냥 말하기를 저는 촌사람으로 이 글을 배우고저 하야 약간의 음식을 차려가지고 왓다 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권하야 먹이며 그 책을 펴서 표한 곳을 무르되 만일 누가 보냇느냐 하거던 우리 집에서 내가 보냇다 하고 도라올 때에 그들과 가티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얏다. 긔축은 원래 우직한 사람인 까닭에 자긔의 부인이 안즈라면 안고 누으라면 누어서 일동일정을 꼭 그 부인 식히는대로 하는 사람이라 그날에도 그 부인이 식히는대로 그곳을 차저가서 아모말도 업시 부인 부탁하든 그대로 말을 하니 여러 사람들이 대경대괴(大驚大怪)하야 아모 말도 못하고 그 음식을 그대로 잘 먹은 다음에 서로 수군수군하며 말하기를 대체 그 녀자는 귀신이 아니면 리인(異人)인즉 우리가 반다시 차저가서 보는 것이 올타하고 그 길노 긔축을 따라 그 집으로 갓섯다. 긔축의 부인은 그들을 흔연이 마저들여 종용한 방에 안치고 말하되 「제가 비록 아는 것은 업사오나 여러분의 큰 뜻을 짐작한지 오래엿슴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모힐 곳이 업서서 산곡이나 절간으로 각금 가시오니 그러다가 남에게 발각이나 되면 대사가 랑패가 될 것이오니 어찌하겟습니까. 제 집이 비록 루추하오나 조용은 하고 술맛도 또한 조흐니 무슨 모힘이 게시면 안심하시고 저의 집으로 오십시요. 저의 남편 긔축은 비록 못생겻스나 사람이 우직하고 힘이 천하장사라 여러분이 식히시면 무엇이던지 몸을 액기지 안코 잘 할터이오니 밋고 잘 써주시면 장래 대사를 이룬 뒤에 잇지나 마옵소서」하얏다. 여러 사람들은 그 부인의 지감이 탁월한 것과 긔축이 힘세인 것을 크게 감복하고 기뻐하야 그 후부터는 대사를 의논할 때이면 반듯이 그 집으로 모히게 되고 반정(反正)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도 그의 가라침이 만엇섯다. 그 중에 리서(李曙)라는 사람은 긔축을 특별히 친애하야 형제가티 지내니 인조(仁祖)가 어명(御命)으로 리서의 종제로 삼고 성(姓)을 리라 하며, 긔축(己丑)을 긔축(起築)으로 곳치엿다. 긔축〈10〉(이후부터 긔축(己丑)을 긔축(起築)으로 씀)은 원래 힘이 장사인 까닭에 장단부사 이서(長湍府使 李曙)의 부하에 잇서서 여러 반정공신과 통신을 하는데 장단에서 매일 서울을 왕래하야 일년내에 말허리를 세 필식 꺽것섯다. 그 뒤 반정할 때에는 리서군(李曙軍)의 선봉이 되여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니 인조가 크게 기뻐하야 친히 어포(御袍)를 버서서 입히엿다. 그 때에 창의문(彰義門)을 독기로 패서 깨트린 사람은 세상에서 흔히 원두표(元斗杓)라 하지만은 사실은 이긔축이 압잡이로 서서 깨트린 것이다. 반정 뒤에 그는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의 훈을 타고 완계군(完溪君)으로 봉작(封爵) 되엿으며 그 부인은 또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니 전날에 그를 천히 여기고 박대하든 그의 부모친척들이 모도 기뻐하야 비로소 그 부인의 지감을 탄복하엿섯다. 그 뒤 병자년에 긔축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가서 호병(胡兵)과 싸우매 만흔 적군을 죽이고 세자가 심양(瀋陽)에 벌메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할 때에는 팔장사의 한 사람으로 세자를 보호하고 심양까지 갓다가 병이나서 먼저 도라와서 죽엇는데 시호(諡號)를 양의(襄毅)라 하엿섯다. |
▣ 김태서 - 항용선생님 익원공 자료 모음에 리풀 있습니다. 홈에 올려 주세요.
▣ 김윤만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예 내일(3. 13) 올리겠습니다.
▣ 김윤식 - 아저씨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익원공>파 란에 올렸습니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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