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태종(이방원)의 처부 민제(閔霽) 家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03-18 23:38 조회1,655회 댓글0건

본문



■ 디지털한국학



●민제(閔霽)

1339(충숙왕 복위 8)∼1408(태종 8).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회(仲晦), 호는 어은(漁隱). 여흥출신. 변(#변03)의 아들이고, 무구(無咎)의 아버지이며, 태종의 장인이다.



---생략---



이어 무구·무질형제가 붕당을 지어 세자를 끼고 집권을 도모한다는 탄핵이 있었으나 그의 공덕으로 두 아들이 무사하였으며, 이듬해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조호(趙瑚), 전 총제(摠制) 김첨(金瞻)·허응(許應) 등과 붕당을 지어 난을 도모하고 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그의 성품이 평소 온후하고 청렴하여 사치를 즐기지 않았던 관계로 태종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성명(性命)을 온전히 보존하였다.

그해 병으로 눕게 되자 유배지에 가 있는 무구·무질형제를 사간들의 여러 차례 반대상소에도 불구하고 문병차 불렀으며, 자리에 누운 지 6일 만에 죽었다.

그는 태종의 잠저시에는 항상 ‘선달(先達)’이라 일컬어졌고, 태종은 그를 ‘사부(師傅)’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으며, 그가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거나 자식들이 죄를 지었는데도 큰 화를 입지 않은 것은 태종으로부터의 두터운 신임과 왕의 장인이라는 위치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륜·이무(李茂)·조호 등과 뜻을 같이하는 사이였으며, 문생에는 전가식·조서(趙敍)·이공의(李公義)·옥고(玉沽) 등이 있다. 젊어서부터 예절을 잘 알아 추부(樞府)에 올라서는 항상 예조(禮曹)를 겸하였고, 국가의 전례(典禮)를 모두 자세하게 정하고 예문(禮文)을 세웠다.

또한, 이단(異端)과 음사(淫祀)를 싫어하여 강력히 배척하였고, 복색을 정하고, 불사(佛事)를 줄일 것을 청하여 춘추장경(春秋藏經)외는 모두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타고난 자질은 어질고 검소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밝았는데 특히 사학(史學)을 잘하였고, 시에 대한 평도 잘하였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太宗의 外戚除去에 對하여―閔氏兄弟의 獄―(金成俊, 歷史學報 17·18合輯, 1962). 〈金成俊〉





●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공민왕 14)∼1420(세종 2). 조선 태종의 비(妃).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여흥에서 출생하였다.

1382년(우왕 8)에 방원(芳遠)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태조 1)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제1차왕자의 난 때 부군(夫君)을 도와 공이 출중하였으며, 1400년(정종 2) 2월에 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이해 11월에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살될 때에 그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또한 10여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侍衛牌)를 혁파하고 영중(營中)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정비가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일이 발생하던 그날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

태종과 정비의 불화는 빈어(嬪御)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고, 1407년(태종 7) 7월에 발발한 민무구(閔無咎)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하여 더욱 더 심각해졌는데, 민무구형제는 이미 태종 2년에 왕이 창종(瘡腫)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녀를 끼고 왕의 병세를 염탐하며 은근히 협유집권(挾幼執權)의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정비가 직접 참여한 것 같지는 않지만, 민무구형제가 끝내 대역(大逆)에 몰려 비명으로 죽게 된 데에는, 정비의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에 거슬린 것이 곧 민무구형제에게 영향을 주어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게 하고, 그들의 방자한 행동을 도와주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비는 민무구형제의 옥이 발발한 4개월 후 금령을 범하여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서 그들의 옥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정비가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형제의 직첩(職牒)을 거두어 서인을 만들 정도로 정비의 무엄한 태도에 태종이 격분하였던 것이다.

민무구형제는 그뒤 태종이 정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빙모 송씨(宋氏)의 생존으로 인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해나갔으나, 1408년 9월 민제가 죽자, 같은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고, 1409년 10월에 그들의 옥에 관련된 이무(李茂)를 죽였다.

그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사서 민무구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일빈이잉(一嬪二#잉01)의 빈어제도를 정하여, 같은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明嬪)에 봉하고, 전 제학 노구산(盧龜山)의 딸과 전 지함주사 김점(金漸)의 딸을 잉실(#잉01室)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昭惠宮主)와 숙공궁주(淑恭宮主)로 봉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여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봉하고, 1420년 7월 56세로 죽었다. 시호는 원경왕후로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는 휘호(徽號)가 추상되었다.

소생은 세종과 양녕(讓寧)·효령(孝寧)·성녕(誠寧)의 3대군과 정순(貞順)·경정(慶貞)·경안(慶安)·정선(貞善)의 4공주가 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璿源系譜, 太宗의 外戚除去에 對하여―閔氏兄弟의 獄―(金成俊, 歷史學報 17·18合輯, 1962). 〈金成俊〉





■ 안동김씨 홈

●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생략---



이어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1401년 태종 11)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1414년) 다시 한성부윤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예로써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시호는 안정공(安靖公)이다.







● 민무구(閔無咎)

?∼1410(태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제(霽)의 맏아들이며,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동생 무질(無疾) 등과 함께 태종의 외척이며, 정사(定社)·좌명(佐命)의 두 공신을 겸하여 권세와 부귀가 극성하였다.



권모술수에 능하여 끝내는 협유집권(挾幼執權)의 혐의를 받아 많은 관련자와 함께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들이 권모술수에 능한 것은 1400년(정종 2) 7월 조준(趙浚)의 제거를 획책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생략---



요컨대, 기록에는 민무구 형제가 권모술수에 능하고 협유집권을 도모한 때문에 숙청당한 것같이 되어 있지만,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하여 외척을 제거하려는 정치파동에 말려들어 억울하게 희생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太宗의 外戚除去에 대하여―閔氏兄弟의 獄―(金成俊, 歷史學報 17·18합집호, 1962). 〈金成俊〉





● 민무질(閔無疾)

?∼1410(태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제(霽)의 둘째아들이며,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으로 책록되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으며, 좌군총제(左軍摠制)·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 등을 역임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생략---



민씨 형제의 옥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한 사람은 이숙번(李叔蕃)으로, 개국공신인 이숙번 일파가 고려의 구가세족(舊家世族)인 하륜을 중심으로 한 일파를 제거하려는 정치파동 속에서 민씨 형제의 옥이 일어났고, 이 옥은 또한 외척제거라는 점에서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太宗의 外戚除去에 대하여―閔氏兄弟의 獄―(金成俊, 歷史學報 17·18합집호, 1962). 〈金成俊〉





● 민무회(閔無悔) More Info.

태종(太宗)2년(1402년), 식년시(式年試) 을과3(乙科3)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여흥(驪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여산군(驪山君)

>>> 가족사항

부(父) 민제(閔霽)

생부(生父)

조부(祖父) 민변(閔<변0x629F>)

증조부(曾祖父) 민적(閔<적0x70A4>)

외조부(外祖父) 송선(宋璿)

처부(妻父) ★김익달(金益達)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02(임오)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제학&(提學&)









▣ 김항용 -

▣ 김윤식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