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11---이인임(李仁任,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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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3-30 23:53 조회1,656회 댓글0건본문
■ 디지털한국학
이인임(李仁任)
?∼1388(우왕 14). 고려의 권신(權臣). 본관은 성주(星州). ★조년(兆年)의 손자로서,
처음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된 후 전법총랑(典法摠郎)을 거쳐 1358년(공민왕 7)에는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다.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를 함락시키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홍건적에 대비하였고, 1361년의 재침 때에도 크게 활약하였으며, 1363년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삼아 고려에 들이려 하였을 때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이 되어 덕흥군 일파의 침략을 물리치는 출정군의 식량조달을 담당하였다.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좌시중(左侍中)을 지내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1374년(공민왕 23)잠시 면직되었다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공민왕이 피살되자 명덕태후(明德太后)와 시중 ★경복흥(慶復興)은 종친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일파와 모의하여 나이 10세의 어린 ★우왕을 즉위시켰으며, 한편으로는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하여 그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金義)로 하여금 중간에서 살해하게 하고, 그동안 배척되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이에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郎)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 자신과 찬성사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여 목벨 것을 상소하자, ★최영(崔瑩)·지윤 등과 합심하여 이첨·전백영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이숭인·★정몽주(鄭夢周)·임효선(林孝先)·정사도(鄭思道)·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 등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유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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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 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朴天植, 全北史學 4, 1980)
李仁任政權에 對한 一考察(高惠玲, 歷史學報 91, 1981). 〈高惠玲〉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여러 모로 우리 문중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김항용 - 이인임과 문온공과의 관계를 잘 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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