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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해동잡록: 정이오 (충렬공 행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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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3-31 17:35 조회1,5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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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 행장



---생략---



상락공(上洛公)의 오대손(五代孫) ★김군(金君) 명리(明理=문온공의 아드님)가 이 도(道)를 지나다가 고향(故鄕)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에 와서 ★내(=최개)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행장(行狀)이 집에 있으나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해 대유(大儒)에게 물어 간행(刊行)코자 하나 이럭저럭 하다가 미처 성취(成就)하지 못했으니 당시(當時)의 큰 공로(功勞)와 뛰어난 업적(業績)을 후세(後世)에서 어떻게 알리요?"하고 하였다.



★나(=최개)는 다행(多幸)이 ★족질(族姪)이 고향에 있음으로 해서 판관 ★한군 종우(判官 韓君 宗祐)와 더불어 그 말에 감동(感動)되여 그 원고(原稿)를 대유(大儒_)인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를 지내고 퇴임한 교은(郊隱 ) ★정공 이오(鄭公 以吾)에게 물었더니



그 답서(答書)에 말하기를 "보내온 상락공 행장(上洛公 行狀)은 창연(蒼然)한 ★노대가(老大家)가 쓴 것이다. 좁은 소견(所見)이나마 병중에 마지못해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었으니 참람(僭濫)하지나 않을까? 또한 끝에 와서 오른쪽 수족(手足)의 병으로 전망후실(前忘後失)이 되니 어찌 감당(勘當)할까?"고 하니 이것이 시정(是正)할 수 있는 증험(證驗)이다.



그래서 다행(多幸)히 ★한군(韓君)은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출간(出刊)하니 광참(狂 )함은 잊은 것이다.



영락(永樂)19년 신축(辛丑=세종3년=1421)년 10월

가선대부 판안동대도호부사(嘉善大夫 判安東大都護府事)

대영 ★최개(大寧 崔開) 말편(末篇)에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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