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영통사 관광가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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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4-01 19:49 조회1,621회 댓글0건본문
개성 영통사, 내년 10월 육로 성지순례 가능
남북이 함께 복원하는 천태종 발상지 개성 영통사
강은지 기자 happy@minjog21.com
10월 27일 대한불교천태종은 개성 영통사 복원용 기와 10만 장을 북에 전달했다.
올해 안에 총 40여 만장이 지원될 이 기와로 지붕을 올려 영통사 복원을 마친 뒤 내년 10월 대각국사 의천의 열반재일에 맞춰 남북 합동 낙성행사를 치른다는 것이 남북의 계획이다.
지난 11월 7일 서울 인사동 조국평화통일불교협의회 사무실에서 법타 스님을 만났을 때 기자는 제일 먼저 그의 건강을 물었다. 한 주 전 그가 감기로 힘겨워했던 일이 생각나서였다.
“개성 영통사에서 얻어온 감기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었는데 이제는 다 나았어요. 괜찮아요.”
법타 스님은 10월 말이라고 만만히 보았다가 개성 감기에 된통 당했다면서도 영통사 복원을 생각하면 마냥 기분이 좋은 듯했다.
전통 고려식으로 제작된 기와 40만 장
10월 27일, 대한불교천태종(총무원장 전운덕 스님)은 개성 영통사 복원용 기와 10만 장을 북 조선경제협력위원회 산하 령통사복원위원회 측에 전달했다. 이번에 전달된 기와는 총 42만 5000장의 기와 중 1차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머지 기와도 올해 안에 북으로 전달된다.
천태종은 또 내년 10월쯤 영통사 복원공사가 완료되면 이를 기념하는 남북 합동 낙성행사를 북과 한, 중, 일 3국 천태종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봉행할 계획이다. 남쪽 천태종과 북 령통사복원위원회를 연결해주는 ‘화주’ 역할을 맡았던 법타 스님은 천태종 사회부장 무원 스님 등 다른 스님들과 함께 이 기와 지원 행사에 동행, 개성과 영통사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만 감기까지 얻어온 셈이다.
영통사 복원에 남쪽 천태종이 적극 지원에 나서게 된 것은 벌써 3년 전, 처음 북에서 영통사 복원 공사에 착수했을 때부터의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영통사 복원을 염두에 두고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를 통해 이를 추진했던 천태종은 지난 2001년부터 남북 직접 경로로 영통사 복원 지원을 모색해왔다.
2001년 8월 언론사 사장단과 함께 방북하고 돌아온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북의 강능수 문화상이 천태종의 발상지가 북이라고 하면서 한중일 불교계가 천태종 발상지 사찰을 복원하고 있다는 등 여러 가지 관심을 표명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당시 천태종 총무원장 운덕 스님도 “정부 창구를 이용한 교류의 길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면서 “남북 당국의 반대가 없을 경우 전 종도들에게 영통사 복원 불사의 의미를 알리고 종단 차원에서 종도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이른 시일 내에 복원 불사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활기를 띠기 시작한 영통사 복원 지원 사업은 지난 8월 5일 중국 베이징에서 천태종 사회부장 무원 스님과 북측 개성 령통사복원위원회 김성철 사무국장이 <개성 령통사 복원을 위한 베이징 합의서>를 서명, 교환하면서 기와 지원으로 구체화됐다.
천태종에서 개성 영통사에 지원하는 기와의 양은 18t 트럭 80대 분에 해당하는 양. 동파 방지를 위해 시멘트로 제작된 이 기와는 고려시대 사찰인 영통사를 위해 특수제작된 것이다. 전통 고려식 기와 문양을 그대로 재현해 금형을 새로 떠서 만들었던 것이다.
고려 정통성 상징하는 영통사
1027년(고려 현종 18년)에 창건된 고려 시대 가장 큰 사찰인 영통사는 고려 왕실과 깊은 연관을 맺어 인종 등 여러 왕들의 진영각이 있던 왕실사찰이다. 또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과 직접 관련되는 절로 천태종의 발원지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11대 문종의 넷째 아들인 의천은 10살 때인 1065년에 영통사에 들어와 35년간의 승려 생활을 통해 경·율·논 삼장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으며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천태종 불교를 창시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영통사는 폐사되었다. 복원 작업이 시작되기 전 영통사 터에는 기본 사찰 건물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풀만 무성한 채 대각국사비와 5층 석탑, 서3층 석탑, 동3층 석탑만 외로이 서 있었다.
높이 4.5m, 너비 1.6m의 대각국사비는 고려 인종 3년(1125년)에 세워진 것으로 김부식이 지은 2300여 자의 글로 의천 스님의 사적이 새겨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증시 대각국사 비명’이라는 글과 영통사 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옛 집터라는 내용과 어린 시절부터 불가에 귀의해 송나라에서 천태, 화엄 양 종의 깊은 뜻을 배우고 귀국해 해동의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 의천 스님의 일대행적이 기록돼 있고 뒷면에는 의천의 묘실과 비를 세우게 된 사유들이 기록돼 있다. 현재 대각국사비는 북측 보물급 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에 북은 발굴작업을 통해 옛 건물 터와 함께 대각국사 의천의 묘실과 부도를 발굴했다. 영통사 동북쪽 오관산 능선에 위치해있는 의천의 묘실은 3개 단으로 축조돼 있으며 묘는 제일 윗단에 자리잡고 있다. 부도는 8각탑 형으로 기단과 지붕돌, 지붕돌 위에 놓는 상면부의 일부 장식돌이 남아있다. 이와 함께 소형 돌탑모양의 불상조각들, 각종 구슬, 고려자기, 도기, 금속기 등 고려시대 유물들도 다수 발굴되었다.
평양방송은 지난 1월 영통사 터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보도하면서 특히 “지붕의 처마끝 부분에 놓이면서 건축물의 장식 효과를 높여주는 암키와 막새(암막새)가 주목을 끌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이 암키와 막새들은 “막새의 무늬 주제가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면서도 령통사가 일떠선 초기에 쓰이던 것과 마지막 시기에 사용되던 막새들인 것으로 해서 전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면서 “이것을 종합해보면 령통사는 고려 초기에 세워져 조선시기까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했다.
1998년부터 발굴, 2000년부터 복원
1997년 영통사 복원 사업을 처음 추진하면서 북은 “령통사의 재현은 조선에서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의 건축력사를 실물로 보여주는 계기로 될 것”이라며 그 의의를 크게 평가했다.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영통사 복원에 착수했다. 먼저 1998년 5월부터 2년 동안 4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사연구실을 비롯한 연구집단에서 영통사 복원 설계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개성시 룡흥리 오관산 밑에 있는 절터는 주춧돌 몇 개만 남아 있을 뿐 수풀이 무성한 상태였다. 북은 이 절터에서 발굴한 여러 자료들과 역사문헌들에 기초해 복원 설계도를 작성했는데 특히 영통사가 거쳐온 여러 문화기 중 2기에 해당하는 1065년을 전후한 시기의 모습으로 복원 설계도를 만들었다. 이 시기의 영통사 모습이 가장 번창하고 완성도가 높은 건축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은 1만 8200여 평의 부지에 건축면적 1200여 평의 기본 사찰 보광원, 경선원, 중각원 등 25동의 건물과 동북무덤, 서북건축지구 등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복원 공사를 진행 중이며 현재 공정률은 80% 정도라고 한다.
북의 사찰 복원은 영통사가 처음이 아니다. 동명왕릉 옆의 정릉사도 복원했고 평양의 광법사, 묘향산의 보현사도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복원해냈다. 성불사를 두 번 보수한 것을 비롯해 사찰 보수 공사는 수도 없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사찰복원사업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게다가 영통사 복원은 건물만 25동에 회랑까지 짓는 대공사로 그 규모가 엄청난 사업이었다. 그 공사를 북은 물자도 장비도 부족한 상태에서 3년째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법타 스님은 너무도 힘들게 복원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북이 안타깝고 그만큼 또 고맙다고 말한다.
“솔직히 북에서야 절을 짓는다고 쌀이 나오겠어, 돈이 나오겠어. 남쪽에서야 절 지으면 쌀도 나오고 돈도 나오고 때로는 권력도 나오고 한다지만. 그러니 고맙지. 너무도 고맙지.”
고난의 행군을 가까스로 벗어난 시기, 먹고 살기도 힘겹고 버거울 텐데 그 어려운 공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한다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영통사 복원은 북에 민족의 전통과 정통을 바로 세우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처음 시작한 사람이 끝을 내야지요”
“영통사는 고려 불교의 핵심이란 말입니다. 그렇기에 영통사는 곧 민족의 전통과 정통성, 국가의 정통성, 민족 정신의 정통성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고려의 대표적인 사찰 영통사가 있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를 복원한다는 것은 단군 조선에서 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금의 한반도가 그대로 잇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법타 스님은 또 영통사가 바로 개성공업단지 안에 있다는 것은 현실적, 실리적 의미에서도 영통사 복원이 북에 중요한 사업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개성 인구는 13만 밖에 되지 않습니다. 개성 주민들 중에 절에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럼 영통사에 누가 가겠어요? 바로 남쪽에서 개성공업단지에 입주하는 사람들, 또 더 나아가 개성 관광길이 완전히 열리고 나면 남쪽의 불자들이 성지순례로 영통사를 찾겠지요.”
실제로 천태종에서는 영통사를 성지순례 코스로 정해 남쪽 천태종 신자들이 영통사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크레인 하나, 기중기 하나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북은 순전히 사람의 힘과 열정만으로 영통사를 다시 올리고 있다. 영통사 복원 터 부근에 임시 숙소를 지어놓고 500여 명이 2년 이상 그 공사에 매달리고 있다. 나무로 만든 작업대 위에 역시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지붕을 올리는 식이었다. 발판이 무너져 내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여럿 된다고 했다.
“장비가 있어 뭐가 있어, 그냥 손으로 하는 거지. 건물뿐만 아니라 회랑까지. 정말 기가 막히지요 뭐.”
법타 스님의 얼굴에 어떻게 감출 수 없는 안쓰러움이 스쳐간다. 맨 손으로 그 큰 공사를 몇 년 째하고 있는 북쪽 사람들에 대한 안쓰러움. 거기에는 또 그 끈기와 열정에 대한 감탄도 묻어 나왔다.
“영통사 복원 현장 참모장이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여기 복원 현장에서 일하다가 제대할 때가 됐는데 제대하고서도 공사가 다 끝날 때까지 끝까지 남아서 마치겠다고 집에 돌아가지도 않고 그냥 남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대를 이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성하는 마음이 이들에게는 있어요. 하던 사람이 끝까지 맡아서 한다는 책임감 말이에요.”
현재 영통사 복원공사는 상당히 진행돼 건물의 뼈대는 이미 다 갖춰졌다. 지난 4월 25개 동의 기본건물 골조 및 미장공사가 완료되었고 서까래와 지붕판 공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들머리 공사에 착수했다.
개성 령통사복원위원회는 올해 말까지 기본적인 공사를 끝내고 내년 봄부터 6월까지 단청공사를 마무리한 후 늦어도 9월까지는 복원 불사를 완공해 10월 초 대각국사 의천 스님의 열반재일에 즈음해 낙성법회를 겸한 국제행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한편 이번 영통사 복원 기와 지원사업은 남북 물류 역사에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제껏 북으로의 물자수송은 전부 해상을 통해 이뤄졌지만 이번 기와 수송은 처음으로 경의선 육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아산 차량 외에 남쪽 번호판을 단 민간 차량이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쪽 땅을 밟은 것도 처음이었다.
지난 10월 27일 오전 10시 30분, 대한통운 소속 11∼14t 카고트럭 20대, 크레인 1기, 지게차 2대, 정비차량과 승합차 각 1대 등 총 25대의 차량이 기와를 가득 싣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임진각에서 환송행사를 마치고 출발한 지 1시간 30분만이었다. 그리고 그 30분 뒤인 11시에는 개성 영통사 앞에 도착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 수속과 통관 절차에 소요된 한 시간을 다 합하고도 2시간만에 서울에서 개성까지 물자를 운반한 것이다. 하기야 서울에서 개성까지의 거리는 불과 78km이다.
게다가 이 대한통운 소속 차량 25대의 선두에 섰던 것은 바로 남쪽의 렌트카 회사에서 렌트한 레저용 차량이었다.
“원래는 우리 절차를 가져가려고 했는데 이게 스틱, 수동형이거든요. 그런데 운전을 맡은 내 아래 스님이 자동만 해봤지 수동은 안해봐서 초행길에 자신이 없다고 해 렌트카를 빌렸지요. 그것도 정말 흔치 않은 일 아닌가요? 남쪽에서 빌린 차를 직접 운전해서 북에 들어갔다는 거. 남북 교류가 벌써 이만큼 온 거예요.”
평양만 24번, 금강산 18번, 거기에 이번에 다녀온 개성까지 합하면 법타 스님이 북녘 땅을 밟은 것은 40번을 훌쩍 넘긴다. 남들보다 많이 다녀온 만큼, 많이 아는 만큼 법타 스님의 북에 대한 애정도, 통일에 대한 염원도 크다.
그래서 영통사 복원 이야기며 남북 교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법타 스님의 표정은 감기 기운에도 불구하고 환해진다. “경의선 육로 통해 개성 영통사에 성지순례 갈 날이 곧 오겠지요” 라는 희망을 말할 때쯤이면 얼굴 가득 함박웃음이 떠오른다.[2003년 12월호]
▣ 김윤식 - 그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문간공(휘 창) 할아버지를 비롯해 웃대 할아버지들 손길과 숨결이 스민 곳, 생각만 해도 벅찹니다.
▣ 김우회 -
▣ 김윤만 -
▣ 김주회 - 내년 가을, 개성 영통사 답사!!! 설레이는 소식입니다.
▣ 김항용 - 천태종의 영통사 복원식 참여 행사에 동행할 수 있다면---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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