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18---김정(金精)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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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4-24 06:48 조회1,553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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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金精){3}
?~1368(공민왕 17). 고려 말기의 문신. 좌부대언(左副代言)․좌대언(左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황원군(黃原君) 최백(崔伯)과 함께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8년 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조린(趙璘)․김광재(金光載)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는데, 조사공이 이 사실을 자기와 평소 친히 지내고 있던 홍주목사(洪州牧使) 정운(鄭#운16)에게 말하자, 정운은 밀직제학(密直提學) 한천(韓#천46)과 더불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밀고하였으며, 이춘부가 궁궐에 들어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뒤 유배되었고, 신돈에 의하여 일당과 더불어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李相瑄〉
■ 안동김씨 홈페이지
13.문온공 친필 遺墨 암각문 .
* 소재지; 경북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천서원 내
* 소천서원 정자 편액이 淸遠亭인데 이 글씨는 절벽에 새겨진 척약재 선조의 친필을 탁본 보필하였다.
청원정 重修記에 이르기를
山이 있어 千丈을 우뚝 솟아 옮아 오니 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三江에 會合하니 洛東江 上流를 省火라 하고 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淸遠이라(香遠益淸-예기에서 온말-에서 준 말로 맑지 않음이 세속이라 이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 하는 곳이란 뜻)실로 竺山君 菊坡 全元發선생이 만년에 休老하신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淸遠亭이라 三字를 새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 김구용선생의 平筆이라.
이하 생략
蘇川書院과 淸遠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에는 이곳 龍宮全씨의 중시조이신 菊波 全元發 선생을 모신 서원이 있다. 국파 전원발 선생은 고려말에 원나라에 들어가 괴과에 장원급제하여 원나라 벼슬이 영록대부 병부상서 집현전태학사에 이르렀던 분으로 당시 원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 였으며 더욱이 몽고인이 아니면 벼슬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였던 시절이었고 아룰러 병권을 담당하기란 몽고인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우리 고려에서는 가정 이곡선생, 그리고 그의 아들인 목은 이색선생이 원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시었으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곡선생이나 이색선생은 널리 알려졌으나 전원발 선생은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움이 든다.
전원발 선생과 척약재 김구용 선조와는 각별한 사이었으며, 더욱이 우리 안동김문의 장손은 方慶-小宣- 資- 爲- 得男- 精으로 이어오다 金精공은 척약재의 아우인 金齊顔공과 더불어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김정공의 후손은 수안김씨로 , 김제안공의 후손은 사천김씨로 분적하였다. 바로 안동김문의 장손인 김정공의 배위가 국파 전원발선생의 따님이었다.
소천서원은 낙동강의 상류인 성화천이 휘돌아나가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청원정이라는 정자가 으뜸이다. 청원정 정자는 임란시 소실되고, 그 후 복원하였는데, 정자의 편액은 원래 척약재 김구용 선조께서 쓰신 것이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렸고, 또 척약재 유묵이 가야리 창벽위에 새겨저 있었으나 떨어저 나가 강가운데로 묻히어 버렸으므로 도저히 고증할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강속에서 자주빛이 밤마다 비추어서 본토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강속을 샅샅히 살펴보니 커다란 돌위에 글씨가 새겨저 있는데 그 글씨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건져 올려서 다시 절벽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중에서 이는 선조의 도움으로 청원정의 현판을 다시 척약재 필적으로 하라는 계시라 여기고 모사하여 청원정의 편액으로 달았다고 한다.
■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1/08/03 17:41 (from:210.104.148.5) 조회 : 66
구안동김씨 분관성씨 ② (수안김씨)
우리 구안동김씨에서 분관한 성씨중 김방경의 큰아들 김선의 후손에서 분관한 수안김씨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 족보 김씨분관록에는
수안김씨 시조 爲(위)는 대안군 7대손 충렬공 方慶의 손자 資(자)의 后로 되어 있습니다.
▣ 인터넷상 검색자료
시조 김선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설(殷說)의 8세손인 김방경(구안동 김씨의 1세조)의 장남이다. 그는 고려때에 보정공신으로 벼슬이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에 이르고 수안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수안으로 하였다. 후손 전리판서 김위(金爲)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4,567명이 있다.(1985년)
▣ 김씨의뿌리 (범우사, 1997)
시조 김선(金 )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 김은열의 9세손이다.
김선은 고려후기의 명장인 김방경의 큰아들로 전법판서 상장군으로서 수안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수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수안(遂安)은 황해도 북부에 위치해 있는 지명이다.
김선의 아들 김자(金資)는 도첨의사사를 역임했고
3세손 김위(金爲)는 전리판서를 지냈으며
4세손 김득(金得) 또한 전리판서를 역임했다.
8세손 김순몽(金順蒙)은 조선 중종때 당상관 도제조 통정대부를 지냈고
11세손 김난서(金鸞瑞)는 임진왜란때 김성일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2등 공훈록에 올랐고, 울산부사와 어해장군 훈련원정을 역임했다.
김난서의 아들 김건(金腱)은 이순신의 막하에서 적선을 격파하여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14세손 김도장(金道章)은 호군으로서 나라에 공을 세워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16세손 김하구(金夏九)는 영조4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여 동추부사, 도산서원장을 역임했다.
수안김씨가 생겨나기까지의 세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경순왕 김부 (金傅)
② 김은열 (金殷說) (4남)
③ 김숙승 (金叔承) (2남) ★구안동김씨 시조
④ 김일긍 (金日兢)
⑤ 김이청 (金利請)
⑥ 김의화 (金義和)
⑦ 김민성 (金敏成)
⑧ 김효인 (金孝印) (2남)
⑨ 김방경 (金方慶) ★구안동김씨 중시조
⑩ 김 선 (金 )
▣ 수안김씨의 시조에 대하여 종합 종리해 보면
▢ 인터넷상 검색자료와 김씨의뿌리 책자에는 김선을 시조로
方慶(방경)- (선)
▢ 족보 김씨 분관록에는 김위를 시조로
方慶(방경)- (선)- 資(자)- 爲(위)
▢ 영환 종친의 소개자료에는 김정을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方慶(방경)- (선)- 資(자)- 爲(위)- 得男(득남)- 精(정)
족보 김씨 분관록의 기록을 인용하여 수안김씨가 생겨나기까지의 세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경순왕 김부 (金傅)
② 김은열 (金殷說) (4남)
③ 김숙승 (金叔承) (2남) ★구안동김씨 시조
④ 김일긍 (金日兢)
⑤ 김이청 (金利請)
⑥ 김의화 (金義和)
⑦ 김민성 (金敏成)
⑧ 김효인 (金孝印) (2남)
⑨ 김방경 (金方慶) ★구안동김씨 중시조
⑩ 김 선 (金 )
⑪ 김 자 (金資)
⑫ 김 위 (金爲) ★ 수안김씨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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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http://www.koreandb.net/)에 게재되어 있는 수안김씨는 2명(김하구, 김덕오)이고, 조선 문과방목에는 3명(김인도, 김정구, 김하구)입니다.
김하구(金夏久) 1676-1762(숙종2-영조38)
김덕오(金德五) 1680-1748(숙종6-영조24)
수안(遂安) 김(金)씨 입격자들
총 3명 입격
김인도(金仁燾) 순조16(병자, 1816) 별시(別試) 丙科16
김정구(金鼎九) 경종3(계묘, 1723) 증광시(增廣試) 丙科7
김하구(金夏九) 정보(鼎甫) 숙종45(기해, 1719) 증광시(增廣試) 丙科23
▣ 김윤식 - 대부님, 신접살림이나 마찬가지시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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