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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20---이존오(李存吾) <1341~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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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4-25 17:55 조회1,5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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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이존오(李存吾)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1360년(공민왕 9)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뒤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 3수의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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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김씨 홈페이지

※영환종친께서 게재한 20.上洛君(金昴) 設壇 墓碑文에 보면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즉 김구용의 아버지 김묘의 여섯째 사위는 이존오의 동생 이존사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지 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3/04/10 22:35 (from:61.75.59.154) 조회 : 86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구용(金九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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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권 p278<경주부 인물(人物) 고려(高麗)>

--이존오(李存吾) : 자는 순경(順卿)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하여 뜻과 절조가 있었다.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서기(水原書記)에 임명되고, 선발되어 사한(史翰)에 보직(補職)되었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 등과 서로 잘 지냈으며, 강론(講論)을 쉬는 날이 없었다.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고, 15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신돈이 정권을 잡아 참람하고 불법(不法)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존오가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극언(極言)하였다. 그때 신돈이 임금과 걸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존오가 신돈을 지목하여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한가?" 하니 신돈이 두렵고 놀라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걸상에서 내려 앉았다. 임금이 더욱 성내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貶職)시켰다. 국인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이존오는 참 정언(正言)이다." 하였다.



뒤에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살면서 근심과 분함으로 병에 걸렸다. 위독해졌을 때에,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이 아직도 기세가 성한가?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겠다." 하더니, 자리에 다시 눕기도 전에 죽으니, 나이 31세였다 죽은 지 석 달만에 신돈이 처형되었다. 임금이 그의 충성을 사모하여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증직하였다.



이밖에도 오인택, 경천흥, 김원명 등이 신돈을 제거하려고 밀의하다가 발각되어 장류를 당했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 김흥조, 김제안(김구용 제) 등이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그 계획이 누설되어 역시 장류되던 중에 살해를 당하였다.







▣ 김윤식 -

▣ 김항용 -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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