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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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2-07 21:20 조회2,004회 댓글0건본문
고려시대 우리 선안동김문과 관련된 일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고려사 충렬왕 기록에
⊙ 1263년 충렬공 휘方慶 할아버지께서 왜구를 격퇴하였고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열전에 보면
⊙ 1274년 (고려충렬왕 즉위년) 충렬공 휘方慶 할아버지께서 여원(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을 이끌고 대마도, 일기도와 일본남부 규슈지방을 공략하였고, 일본이 "신풍(가미가제)"라 부르는 여름철 폭풍우로 인하여 되돌아 왔으며,
⊙ 1281년 (고려충렬왕 7년) 충렬공 휘方慶 할아버지께서 또다시 여원연합군을 이끌고 대마도, 일기도와 일본남부를 공략하였으나, 역시 여름철 폭풍우로 인하여 되돌아 오셨습니다.
이때에 둘째아들 金 (김흔) 장군과 셋째아들 문영공 金恂(김순), 사위 조변 등이 함께 종군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안동김씨 대동보에 충렬공 할아버지 신도비 기록을 보면 1592년 임진왜란때 일본 침략군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두 차례에 걸친 충렬공 할아버지의 일본정벌과 관련이 있지 않나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정상정(이노우에 야스시) 이라는 사람이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의 전 과정을 소설화한 [풍도] (1986, 현대문학사 간) 라는 책을 보면 당시 충렬공 휘方慶 할아버지는 눌변으로 말수가 아주 적었으나 강직하고 충직하여 원 세조 (쿠빌라이)가 총애한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현재 [풍도]라는 책은 절판된 상태이나 일본문학대전집을 보면 풍도 번역본이 실려 있습니다.
지난번 개정된 일본 역사교과서를 보니까 임진왜란 관련 내용은 반 페이지에 불과하고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관련 내용은 3페이지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계을 정복한 원나라의 침공도 "신의 바람" 이라는 신풍과 자기들의 항전으로 물리쳤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임진왜란은 부끄러운 기록이므로 최대한 축소은폐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1396년 (조선태조 5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겨울철에 충렬공 휘方慶의 현손이신 익원공 金士衡(김사형)께서 왜구의 본거지를 소탕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공략하여 왜구를 소탕한 적이 있습니다.
대마도 안내책자를 보면 고려, 조선의 대마도 정벌시에 주로 남섬과 북섬의 중간에 위치한 아소만이라는 곳을 공략한 것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열전에 기록된 일본정벌 관련 내용과 방송대 논문집에 실린 김사형의 대마도 공략 자료를 참고로 소개합니다.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
○ <원종> 15년에 제(帝)가 일본을 치고자하여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조(詔)하여 전함(戰艦)을 감조(監造)하게 하니 조선(造船)을 만약 만양(蠻樣)에 의거하면 공비(工費)가 많고 장차 일국(一國)이 근심하였다.
김방경이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가 되어 먼저 전라(全羅)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자문(咨文)으로 중서성(中書省)의 격문(檄文)을 받고 본국(本國 고려(高麗) )의 조선양식(造船樣式)을 써서 독촉하여 만들었다.
이해에 원종(元宗)이 훙(薨)하고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매 김방경이 홍다구와 더불어 단기(單騎)로 와서 진위(陳慰)하고 합포(合浦)에 돌아와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과 부원수(副元帥) 홍다구·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전함(戰艦)을 사열(査閱)하였다.
김방경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박지량(朴之亮)·김흔(金)·지병마사(知兵馬事) 임개(任愷)로 부사(副使)를 삼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신(金侁)으로 좌군사(左軍使)를 삼고 위득유(韋得儒)·지병마사(知兵馬事) 손세정(孫世貞)으로 부사(副使)를 삼고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로 우군사(右軍使)를 삼고 나유(羅裕)·박보(朴保)·지병마사(知兵馬事) 반부(潘阜)로 부사(副使)를 삼아 3익군(翼軍)이라 이름하니 김흔(金)은 곧 김수(金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蒙古軍)·한군(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과 인해(引海)·수수(水手 수부(水夫) )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소()로써 합포(合浦)에 머물러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리니 여진군(女眞軍)이 기일(期日)에 늦을까 하여 이에 발선(發船)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서 쳐서 죽임이 심히 많았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위에 진(陣)을 친지라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서()인 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다가 다시 와서 싸우거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趙)과 더불어 1,000여 급(級)을 격살(擊殺)하고 배를 삼랑포(三郞浦)에 버리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매 죽인 바가 대단히 많았다.
왜병(倭兵)이 갑자기 이르러 중군(中軍)을 쳐서 검(劒)이 좌우로 부딛쳤으나 김방경은 의연하여 조금도 물러가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빼어 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외치니 왜(倭)가 놀라 피하여 달아나므로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조변(趙)·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新奕) 등이 힘껏 싸워 왜병(倭兵)이 크게 패하여 엎어진 시체가 삼대와 같았다.
홀돈(忽敦)이 말하기를,
“몽인(蒙人)이 비록 싸움에 익숙하였으나 어찌 이에 비하리오.”
하였다. 모든 군사가 같이 싸워 해가 저무니 이에 해산(解散)하였다.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소적(小敵)이 견수(堅守)하면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힌다.’고 하였으니 피핍(疲乏)한 군사를 채찍질하여 날로 불어나는 무리를 당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유복형(劉復亨)이 유시(流矢)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오르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올 때 마침 밤에 크게 풍우(風雨)가 있어 전함(戰艦)이 암벽(岩壁)에 부딛쳐 많이 파손(破損)되고 김신(金侁)은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합포(合浦)에 이르러 노획한 기장(器仗)을 제(帝) 및 왕에게 바치니 왕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장일(張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김방경을 먼저 돌아오도록 명하여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判御史臺事)를 더하였다.
○ <충렬왕(忠烈王)> 7년 3월에 군사를 내어 동정(東征)할 때 김방경이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이르러 병장(兵仗)을 사열(査閱)하고 왕은 합포(合浦)에 이르러 크게 제군(諸軍)을 열병하였다.
김방경이 흔도(都), 홍다구(洪茶丘),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과 더불어 출발(出發)하여 일본 세계촌(世界村) 대명포(大明浦)에 이르러 통사(通事) 김저(金貯)로 하여금 격(檄)으로 설유(說諭)하였다.
김주정(金周鼎)이 먼저 왜(倭)와 더불어 교전(交戰)하매 제군(諸軍)이 다 내려 같이 싸워 낭장(郞將) 강언(康彦), 강사자(康師子) 등이 죽었다.
6월에 김방경, 김주정(金周鼎), 박구(朴球), 박지량(朴之亮), 형만호(荊萬戶) 등이 일본병(日本兵)과 더불어 함께 싸워 300여 급(級)을 베니 일본병(日本兵)이 돌진하므로 관군이 무너지고 홍다구가 말을 버리고 달아나거늘, 왕만호(王萬戶)가 다시 가로질러 쳐서 50여 급(級)을 베니 일본병(日本兵)이 이에 물러가고 홍다구는 겨우 면하였다.
그 다음날 다시 싸워 패적(敗績)하고 군중(軍中)에 또 크게 질병이 나서 죽은 자가 무릇 3,000여 명이라, 흔도 홍다구 등이 여러 번 싸워 불리하였고 또 범문호(范文虎)가 기일(期日)을 지나도 오지 않음으로써 회군(回軍)하고자 의론하기를,
“성지(聖旨)가 강남군(江南軍)과 동로군(東路軍)이 반드시 이 달 16일에 일기도(一岐島)에서 만나게 하였는데 지금 남군(南軍)이 오지 않고 아군(我軍)이 먼저 와서 여러 번 싸웠으나 전선(戰船)이 썩고 양식이 다 하였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
하니 김방경이 묵연(默然)하였다.
10여일에 또 의론이 처음같거늘 김방경이 말하기를,
“성지(聖旨)를 받들고 3개월 분량의 양식을 가지고 왔으니 이제 한달 양식이 아직 있는지라 남군(南軍)이 오기를 기다려 합공(合攻)하면 이를 멸할 것이다.”
하니 제장(諸將)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범문호(范文虎)가 만군(蠻軍) 10여만을 거느리고 오니 배가 무릇 9,000소()였다.
8월에 대풍(大風)을 만나 만군(蠻軍)이 다 빠져 죽으니 시체가 조수(潮水)를 따라 포구(浦口)에 들어와 포구(浦口)가 이 때문에 막혀 밟고 다니게 되는지라 드디어 환군(還軍)하였다.
노계현의 朴 ·金士衡의 대마도 정벌
<한국방송통신대학 논문집 제20집, 1995. 8월>
5. 김사형의 대마도정벌
고려가 종말을 고하고 조선이 건국한 이후도 왜구의 침략은 여전하였다.
조선 태조시에도 고려말기와 같이 일본과는 사절의 내왕으로 선린관계를 유지시켰으나 일본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던 왜구문제는 역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태조때 왜구의 침략도 끊이지 않았으니 그 중의 중요한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393년(태조2년) 4월에 평안도 순천군에 침입한 왜구를 도순무사가 이를 격퇴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연이어 일어난다. 같은 달 경기도 양주도호부 관내에 왜구의 규모가 30척이나 되는 것이 침략해 왔고, 동년 10월에는 평안도 이성만호가 왜구 40여를 베었다.
그 다음해인 1394년 8월에는 침범한 왜구의 배 9척을 나포하였으며
1396년 8월에 동래현에서 왜선이 동래성을 포위함으로 이중 배 21척을 불살랐다
그리고 1397년 6월에 평안도 안주목사는 배 10척을 동원하여 침범한 왜구의 배 24척중 6척을 대파하였다. 또 같은 달에 황해도 장산갑에서 왜선 10척을 불사르고 평안도 해안에서도 왜구의 배 10척을 불살랐다.
1398년 (정종 즉위년) 10월에는 황해도 웅진현에서 왜구의 배 1척을 불사르고 50명을 베었다.
이와같이 끊임없이 노략질하여 오는 왜구를 무마하기 위하여 조선을 사신을 보내어 달래기도 하고 이선치도책 (以善治盜策 : 선으로써 왜적을 다스리는 정책)을 써서 침략해 오는 왜구에게 음식을 주기도 하고 방종하는 것을 묵인도 해 주었다. 그러나 이 이선치도책은 북쪽의 여진에게는 때로 효과를 보았으나 왜구에게는 별무소득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무제구책 (以武制寇策 : 무력으로써 왜구를 제압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金士衡으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함으로써 왜구의 근원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1396년 (태조5년) 12월(정해) 에 태조는 문하 우정승 金士衡을 5도 병마도통처치사로 삼고, 예문춘추관 대학사 南在를 도병마사로 삼고, 중추원 부사 辛克恭을 병마사로 삼고, 전 도관찰사 李茂를 도체찰사로 삼아 전국의 군함을 모아 대마도와 일기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정벌군이 출사함에 태조는 남문 밖까지 나아가 이를 전송하였다. 이때 태조는 金士衡 5도 병마도통처치사에게 부월 (임금이 출정군 사령관에게 내리는 것으로서 이것은 임금의 명령으로써 적을 정벌하라는 수권인 동시에 왕의 상징이기도 하다) 과 교서를 내리고 안마와 모관, 갑옷과 활 및 화살, 약상자를 내렸다. 태조는 또한 남재, 이무 및 신극공에게도 가각 모관, 갑옷, 활과 화살을 내렸다.
태조가 내린 교서에 이르기를
"----- 불행하게도 (왜구가) 쥐새끼처럼 몰래 날뛰고 개처럼 훔쳐가는 일들이 거듭 일어났다. 때마다 지방 관헌에게만 (이들을) 쫓든지 잡으라고 해왔다. 이 왜구의 세력이 창궐하여 지방 관헌의 힘만으로서 제어하기 어려우므로 대신들에게 대마도 정벌을 명하였다. ----- 지시를 받은 장수들은 나가 수륙으로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라. 그러면 변방이 언제나 평안하게 될 것이다. -----" 고 하고 있다.
태조실록에는 金士衡이 대마도를 정벌한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金士衡이 출정한 지 57일만인 1397년 1월 말에 돌아온 기사가 있다. 金士衡이 개선하자 태조는 흥인문 밖에까지 나가 위로하며 맞이하였다. 그리고 2월에 태조는 金士衡에게 연회를 베풀어 칭찬하고 서대(물소 가죽으로 만든 띠로서 귀중품임)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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