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의 충절!!! 문숙공 의재 김제갑 (01) --- 출생과 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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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10 05:29 조회1,466회 댓글0건본문
다가오는 일요일 (5월 16일) 원주 영원산성 산행을 계기로
원주의 충절!!! 문숙공 의재 김제갑 선조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당일 사용할 자료집 편집 책무가 저에게 할당되었으므로
며칠간 김제갑 선조님 관련자료를 모두 모아 소개하면서 정리하여
자료집으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정 보완이나 추가 삭제 등 많은 의견을 제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10/28 14:40 (from:211.114.248.22) 조회 : 78
문숙공 김제갑 연보
<문숙공 김제갑 연보 (조선왕조 실록. 의제비문 내 기록 종합)>
1. 1525(중종20). 5. 17. 丑時 1세 : 충북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에서 부친 金錫과 모친 행주기씨 사이에서 4자로 출생.
2. 1531(중종 26) 7세 : 앞산의 황소를 보고 “黃牛繫靑山, 靑山一點黃”(황소가 청산에 매어 있는데, 청산에 한 점이 누르구나)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함.
3. 1535(중종 30) 11세 이후 : 외숙부 기대복(奇大復)과 고모부 黙齋 이문건(李文健)에게서 수학함
4. 1542(중종37) 17세 : 西坡 윤개(尹漑)의 녀와 혼인. 이후 장인으로부터 수학.
2. 1544(인종1). 19세 이후 : 형 龜巖 충갑(忠甲)을 따라 안동의 도산서원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
■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06/10 15:09 (from:211.114.248.22) 조회 : 28
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11)-金悌甲편(역문1)
<문숙공 의재 김제갑 신도비>
---文肅公 毅齋 金悌甲(1525~1592)의 신도비는 1976년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공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權容稷이 짓고 글씨는 12대손 金相衡이 썼다.---
가정4년(嘉靖四年:1523년) 중종(中宗) 21년 을유(乙酉) 5월17일 을해축시(乙亥丑時)에 한성(漢城) 남쪽 성곽 밖 반석방(盤石坊)에서 공(公을) 낳았다. 공(公) 태어날 때 기이(奇異)하고 준수(俊秀)하고 빼어나서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7세에 앞산의 황소를 보고 시(詩)를 읊기를 "황소가 청산에 매어 있는데, 청산에 한 점이 누르구나."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남다르게 여겼다.
머지않아 의정공(議政公)이 괴산 고향집으로 돌아와 돌아가시니, 이때 공(公)의 나이 겨우 10세였다.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모든 고아들을 이끌고 서울집으로 돌아갔다. 공(公)이 이미 어리고 고아라서 배울 때를 잃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외삼촌 기대복(奇大復)공과 고모부 묵재(默齋) 이문건에게 수학하는데, 1년도 못되어 학업이 날로 나아갔다.
18세에 재상 서파(西坡) 윤개(尹漑)가 묵재(默齋)로 인하여 공(公)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딸을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청했다. 어머니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과부의 아들이 배우지 못해 예의에 어두운데 어찌 어진 가문과 혼인을 하겠습니까?" 하고 거절하는 것이 매우 확실했다. 윤공(尹公)이 진실로 요청하여 혼인을 했다. 장인 윤공앞에 나가 수업(受業)을 하는데 일야(日夜)로 침식(寢食)을 잊어버리면서 연구(硏究)하였다. 일찍이 불과 10번 논어(論語)를 읽었는데, 수년(數年)이 지난 후에도 외는 것을 시험하였는데 한 자도 착오가 없었으니 총명강기(聰明强記)가 이와 같았다.
나이 19세에 백형 구암공(伯兄 龜巖公)을 따라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 이선생(退溪李先生)을 뵈옵고 드디어 사사(師事)하였다.
■ 안동김씨 홈페이지
---전 략---
이곳에서(괴산군 문광면 문법리) 공은(김석) 5男 2女를 낳고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그 결과 아들 모두는 과거에 합격하였고 크게 성공하여 입신양명하는 영광이 있었으며 문운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자녀들은 부친께서 학문수업을 받다가 공이 몰하자 공의 매부인 묵재 이문건
---(李文楗. 주:星州人. 호는 默齋. 趙光祖 문하생. 기묘사화로 9년간 停擧를 당하여 괴산 호암리(현 문광면 유평리)로 낙향, 은둔불사 하다가 별시문과하여 丞旨에 오름. 淸白吏에 녹선. 乙巳士禍로 성주에 23년간 유배. 유배지에서 사망. 괴산의 花巖書院에 배향됨. 詩書에 능함. 저서<默休唱酬>)---
에게서 공부하였다.
특히 四子 悌甲은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이황으로부터 수업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 때 忠甲은 퇴계와 아주 친분이 두터웠고 자신이 직접 아우인 제갑을 말에 태워 도산서원에 가서 공부시키기도 했다 한다.
■ 퇴계학연구 (퇴계선생 제자전기4) 제18집 (1998, 국제퇴계학회 경상북도지부)
P163
113. 김제갑(金悌甲)
김제갑은 字가 순초(順初)이고 號가 의재(毅齋)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서울에 살았는데 을사명신(乙巳名臣)25) 이었던 충갑(忠甲)의 동생이다. 가정(嘉靖) 을유년(1525)에 태어났는데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도량이 넓고 깊었다.
말과 웃음이 적었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어버이를 효로써 섬겨 뜻을 어기는 바가 없었다. 계묘년(1543)에 선생을 배알하고 드디어 스승으로 섬겼다.
■ 퇴계문인록 (1983, 이희대 편저, 제자 서봉 김사달)
p75
毅齋 金悌甲
선조때의 문신인 김제갑의 자는 順初요 호는 毅齋(의재)이며 본관이 안동이니 명종 즉위 초에 일어난 을사사화때 희생당한 명신 김충갑의 아우이다.
중종19년(1525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19세 때에 先鄕인 안동으로 내려와 퇴계선생의 薰炙(훈자)를 받았으며
▣ 김항용 - 해설자료 편집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 김발용 - 행사 때마다 자료집 만드시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정중 - 기대 됩니다!! 고맙고요~~
▣ 김윤만 - 막중한 책무에 노고가 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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