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의 충절!!! 문숙공 의재 김제갑 (04) 68세--- 원주 영원산성 전투 (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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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12 17:46 조회1,677회 댓글0건본문
■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10/28 14:40 (from:211.114.248.22) 조회 : 78
문숙공 김제갑 연보
<문숙공 김제갑 연보 (조선왕조 실록. 의제비문 내 기록 종합)>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20. 1591년(선조24). 67세 : 대사간(大司諫)을 제수 받았다가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전보. 사직 요청, 원주목사.
21. 1592년(선조25). 8. 25. 68세 : 원주목사 전사.
22. 1592년(선조25). 10. 21. 68세 : 원주목사 죽음 비변사 보고. 이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증직.
23. 1670년(현종11). 2. 7. : 원충갑, 김제갑, 원호의 사우에 충열이란 편액 사액.
24. 1711년(숙종37년) : 문숙(文肅)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재추증
■ 김원성전(金原城傳) (김제갑의 전기) <김태영 소개, 2003/05/31>
- 이산해 李山海 [1539~1609] <아계유고(鵝溪遺稿)>
황명(皇明) 만력(萬曆) 20년 임진에 섬나라 왜적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난리를 일으켜, 우리나라 땅 팔도중 일곱이 저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적의 흉포한 예봉이 돌진해 오자 누구도 감히 막지 못하여 강하고 큰 번진(藩鎭)들이 여지없이 꺽이고 무너졌으며, 심지어는 도성을 비워둔채 떠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의 일이 어떠했겠는가, 적이 길을 나누어 밀고 올라올 때, 길성중륭(吉盛重隆)은 관동(關東)으로 삐쳐 올라와 열읍(列邑)을 짓밟은 다음 이내 흡곡(강원도통천(通川)에 있던 현(縣) 으로 방향을 돌려 동쪽을 따라 내려와 평해(平海)에 이르고 다시 재를 넘어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의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경계(境界)에는 사람이 없고 관문에는 빗장이 없어 탄탄대로를 마구 치달림에 주먹만한 돌, 짧은 막대기 하나라도 말발굽 사이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이에 도망쳐 숨는 자들은 깊이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이요 저들에 빌붙는 자들은 남보다 뒤질까 걱정이라, 관동을 둘러싼 20여 고을에 남자가 없었으니, 당시의 일이 또 어떠하였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로 원주목사(原州牧使) 김공(金公)이 삶을 터럭처럼 가벼이 보고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겨 오직 의(義)를 따랐던 일이 있지 않았다면, 나라의 명맥을 어떻게 부지했겠으며, 적의 간담을 어떻게 서늘하게 했겠으며,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를 어떻게 알수 있었겠으며, 만세에 충성된 신하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수 있었겠는가, 아아! 충성스럽도다. 아아! 충성스럽도다.
왜란이 막 일어났을 때에는 곧 공이 원주에 부임한지 채 일년이 되기전 이었으며 원주는 충주(忠州)와 거리가 가까웠다. 처음 전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온 경내(境內)의 장정과 온 고을의 병기를 모두 거두어 말과 수레에 실어다 군중(軍中)에 소속시켰는데, 끝내 발길 하나 화살촉 하나 돌아가지 못했으니 고을은 그저 텅빈 땅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적이 북쪽으로 길을 잡아 철령(鐵嶺)을 넘고 곧바로 회주(淮州)로 쳐들어 옴에 진영(陣營)이 전후로 줄을 잇고 인근 고을까지 휩쓸어 북소리가 끝없이 들리고 기치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에 사방의 고을들이 모조리 흉포한 적도들의 소굴이 되었고 저들의 칼날이 미치지 않은곳은 오직 원주뿐이었으니, 마치 한덩이 고기를 호시탐탐 입맛을 다시는 굶주린 맹수들 사이에 놓아둔 격이라, 아침 저녂사이에 잡아 먹히고 말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대도 공은 안정된 마음으로 기색이 평상시 처럼 변함이 없었으며, 단지 눈물을 흘리면서 팔뚝을 걷어부치고 말하기를, “이제 뜻있는 일을 할때가 왔다. 그대들은 감히 나를 따르지 않겠는가?”하니, 백성들은 그 의기에 감화되고 선비들은 그 충성에 감동하여 오직 공의 명령을 따를뿐 어기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공이 재숙(齋宿)하고 일어나 융상(戎床)에 않아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집과 전통을 갖추고 창검과 기치를 세우고 군졸들의 대오를 정비 해놓은 다음 좌우에 시립한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라 하여 묻기를, “누가 몸이 날래고 용감하며 무에가 뛰어나고 미더워 함께 일할만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이곳 사람으로 정씨(鄭氏)성을 가진자가 있는데 효용(驍勇)은 전륜하지만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여 향리에 살고있다 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과연 그러하다면 천리마의 발길질하고, 물어뜯는 사나움이야 무슨 해 될게 있겠는가, 내가 그를 군관(軍官)에 임명 하겠다.”하고는 그를 불러와 계획을 말하기를, “적의 강함은 날로 더하고 우리의 약함은 날로 심해지니, 숫자의 많고, 적음이 현격히 다르고 군사의 용감함과 겁약(怯弱)함이 배로 차이가 난다. 따라서 나가 싸우자니 속절없이 사람들의 피만 흘리겠고 그렇다고 앉아서 지키자니 마땅한 계책을 찾기 어렵구나, 성에는 성가퀴가 없고 참호엔 도랑이 없으며, 군량이 넉넉하지 않고 무기조차 부족하니, 우리고을이 한가지라도 믿고 든든히 여길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우리가 어찌 속수무책으로 그냥 있을수 있겠느냐, 하늘이 원주에 내려준 요새라고는 오직 영원성(鈴原城)이 있으니, 이곳이 근거지로 삼을 만하다. 옛사람이 이성을 얻고서 공훈(功勳)을 세운적이 있으니, 우리의 재주야 비록 옛사람만 못하겠지만 우리의 뜻이야 어찌 옛사람만 못하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이곳을 버려두고 지키지 않으니, 이는 매우 중요한 기회를 잃는것일뿐만 아니라 하늘이 장차 우리를 벌하게 될것이다. 나는 너를 의지할 터이니, 너는 힘써주기 바란다.” 하니, 그 정씨가 무릎을 꿇고 대답하기를, “왜적은 너무도 기세가 대단하여 다른 적들에 비길수 없으며 게다가 지금은 옛날과 형편이 다릅니다. 이정도의 병력으로 저들의 예봉에 대항한다는 것은 도저히 형세상 상대가 되지 않으니, 한갖 험준한 요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쪼록 잠시 다른 곳으로 가서 피했다가 장단(長短)과 이해를 잘 따져서 우리쪽에 유리한 틈을 얻어 일을 도모해도 아마 늦지 않을 것 입니다.” 하였다. 이말을 들은 공은 불끈 노하여 꾸짖기를, “네놈과는 일을 도모 할수없다.” 하고, 물리쳐 내쫒은 다음 하늘을 우러러 탄식 하기를, “계책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내가 한번죽으면 족할것이다, 내가 누차 청환근신(淸宦近臣)의 자리에 올라 크나큰 성은(聖恩)을 입었음에 옷을걸치고 밥을 먹음이 하나같이 주상(主上)의 은택이 아님이 없다. 게다가 고을을 맡은 사람은 분수상 당연히 그 땅을 지켜야하니, 삶은 나라와 함께 살아 놓고서 죽음은 나라와 함께 하지않아 경각이라도 구차히 살기를 도모한다면 심히 부끄러운 일일뿐더러 사람이 바라는 바와 싫어 하는바 중에는 이보다 더 중대한 것이 있다. 내가 이제 굳건하고 험준한 요새를 점거하여 힘을 다해 막다가 행여 하늘의 은덕을 입어 저들의 예봉을 꺽을수 있다면 기쁜일이려니와 만약 불행한 사태를 만난다면 오직 죽음이 있을뿐이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일신(一身)을 위해 죽는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말에 올라 선구가 되어서 관아(官衙)의 식솔들을 되리고 사졸(士卒)들을 창도(唱導)하니 사람들 가운데 감격하여 기꺼이 달려오지 않는이가 없었다. 이에 영원성으로 짐을 이고 진 노약자들이 줄을이어 더위잡고 올라갔으며 경성(京城)에서 온 사람들도 서로 부축하고 이끌면서 나아가 불일간에 성안이 사람으로 가득찼다.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고 전면에 길이 하나 뚫려있어 반드시 꼬챙이에 꿰인 생선처럼 한줄로 올라가야 했으며 파놓은 참호와 쌓아놓은 성벽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수없을정도의 요새였다. 성안에는 양식과 무기를 비축해두는 한편 땔감을 쌓아놓고 우물을 쳐내어 여러달을 농성(籠城)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성밖에는 큰수레와 무거운 목책(木柵)을 밧줄로 묶어서 설치하고 돌을 실어 공중에 매달아두고서 적이오면 밧줄을 끊을 태세를 갖추었다.
게다가 성가퀴에는 강한 활과 독한 화살을 벌여 놓는 동시에 간간히 화총(火銃)을 섞어 놓고 밤낮없이 공이 몸소 순찰하니 , 그제야 성안의 사람들이 든든히 믿어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당초에 공이 박씨(朴氏)성을 가진 경성의 장수와 약조하기를, “적이 원주로 오려면 반드시 가리현(可里峴)고개를 지나야 하는데, 이고개는 천연의 험한 요새라 말 두필이 나란히 가지 못하고 사람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다니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천명의 병력으로 그 길목을 막는다면 백만의 적이라도 날개가 없이는 지날수없을 터이니, 이렇게 하면 거의 적과 대등하게 버틸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만일 불리한 상태가 생기면 내가 미리 튼튼한 대비를 할수있을 것이니, 그대는 힘써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런데 막상 적이 처들어올 때 박씨는 졸개 한명을 보내 정탐하게 하고서 적이 멀리서 천천히 오고 있다는 그 졸개의 보고만 믿은채 안장을 풀고 갑옷을 벗고 시냇가에서 쉬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배후로부터 적의 기습을 받아 간신히 알몸으로 빠져 나왔으니, 아! 가리현의 요새를 그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날 적이 원주로 밀려들어오자 뭇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가리현이 함락된 일로 영원성을 걱정하였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말이 더욱 단호하고 명령이 더욱 엄하니, 사람들은 모두 공의 충의(忠義)에 감복하고 성(城)의 외로움을 걱정한 나머지, 심지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밥을 삼키지 못하는 이들조차 있었다.
적들은 공이 성을 사수(死守)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긴 장대에 글을 매달아 이익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위엄으로 협박하기도 하며 공을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공이 허리의 칼을 뽑아 손수 적의 사자(使者)를 참수하고 다시 의자에 걸터앉음에 머리털이 곤두서고 어깨가 쫑긋 솟아 우뚝하기가 마치 무거운 산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두렵고 떨려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튿날 적이 반드시 대거 침공해 올것임을 안 공은, 성앞 골짜기를 따라 5리 거리로 늘어선 다섯 봉우리에 초소를 두고 초소마다 측후병(測候兵)한명씩을 잠복시켜 적이 오면 즉시 작은 뿔피리를 불게 하였다. 날이 밝자 다섯 초소에서 뿔피리가 차례로 울리더니 창칼이 산을 뒤덮고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적들이 밀려왔는데, 성밖에는 의지할 원군이라곤 개미 한마리 없고 성책을 지키는 사람은 오천명도 채안되어 천근의 무거운 쇠뇌를 한가닥 머리털로 당기는 격이라 그 형세가 도저히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적들이 곧바로 유린해 들어오지 못한 것은 성안에 인화(人和)가 잘되고 대비가 엄하여 명령이 분명하고 위엄이 숙연하여 쉽사리 공략할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무렵 적이 풀어놓은 결사대 수십명이 벼랑틈으로 잠입하여 성벽에 구멍을 뚫고 올라와 큰소리로 어지럽게 고함치면서 대군을 지휘하여 성을 넘어오게 하였다. 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도 공은 여전히 전투복을 입고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내려오지 않고 활을 당겨 적을 쏘려하던 차에 적의 화살이 먼저 공을 맞히고 말았다. 공은 화살이 등에 꽃혔는데도 여전히 걸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다시 화살 한대를 맞고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에 적이 공을 핍박하여 내려와 절을 하게하자, 공은 상처가 심하여 의식이 없는듯한 상태에서도 끝내 무릎을 꿇지않고 입으로는 욕설을 계속하다가 결국 부인 및 한 아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니 적들도 그 불굴의 기개를 의롭게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을 포획한 것을 기뻐하여 공의 머리를 저들의 진영(陣營)으로 보냈다. 당시 성에 있다가 요행히 살아난 조생문벽(趙生文璧)이 공과 공의부인과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원주의 산기슭에 임시로 안장해 두었는데 지금도 그곳을 지나는 행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이가 없다. 내가 당시 영동(嶺東)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의 전말을 자세히 들을수 있었다.
아아! 병화(兵火)가 일어난 이래로 성을 버리고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몸을 깊이 숨기고 있다가 적이오면 달아나고 적이 물러가면 되돌아간 자들이 일일이 헤아릴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 사이에 혹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불리는 이들도 있지만 장수의 자리를 맡아 진지(陣地)에 나아가 지휘함에 승패가 자기의 손에 달려있는 경우엔, 싸움에 패하면 으레 죽을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고 경솔한 생각으로 망녕되이 움직여 갑작스레 진격하기만 하고 상황을 고려할줄 몰라 곤경을 자초한 경우엔 죽지 않으려 해도 어쩔수 없는것이며 뜻밖에 변고를 당하여 황망히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경우엔 나아가도 죽고, 물러나도 죽을것이니 오직 한번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평소 스스로 정력(定力)을 쌓아 창졸간의 변고에도 조용히 흔들리지 않고 시종 그 직분을 지키다 죽은 사람으로는 공 같은이가 있겠는가, 사관(史官)이 믿을만 하다면은, 반드시 “임진란(壬辰亂)에 우뚝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이는 오직 원주목사 김 아무개 한사람 뿐이다.” 라고 쓰리라.
공의 휘(諱)는 제갑(悌甲)이요 자(字)는 순초(順初)인데, 얼굴이 희고 신장이 컸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계축년 과거에 올라 두 조정에 걸쳐 벼슬 하였는데 대성(臺省)에 출입함에 안색을 엄숙히 하여 아부하지 않았고 항상 강직한 몸가짐을 견지 하였으며 지방수령이나 방백(方伯)으로 나가서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순절(殉節)하였을때 향년이 예순여덟이었다. 한 아들 시헌(時獻)은 무자년 과거에 급제 하였는데 당시 이부랑(吏部郞)이 되어 어가를 호종하며 관서(關西)에 있었다.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 - 《조야첨재> <난중(亂中)의 시사(時事) 총록(總錄)>
<김항용, 김윤만, 김은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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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야승 - 신경(申炅) [1613 ~ 1653]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김태영 소개, 2003/05/14>
---내용 생략---
■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06/10 15:09 (from:211.114.248.22) 조회 : 28
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11)-金悌甲편(역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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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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