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난(1728년)과 우리가문 (7) --- 진천 一門四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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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25 17:28 조회1,425회 댓글0건본문
■ 진천군지
김천장, 김천주, 김성옥, 김성추 (金天章, 金天柱, 金聲玉, 金聲秋) ( ? - 1728 영조4 )
조선후기 영조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義擧殉節한 충신으로 진천군 문백면 사석리에 있는 4충문 旌閭에 倂旌되고 있다.
김천장과 김천주는 형제로서 안렴사 김사렴의 10세손이며, 김성옥은 김천장의 아들이고, 김성추는 김천주의 아들이니 형제이며 부자간으로 사석리에서 누대를 세거하여 왔다. 본관은 안동이다.
1728년 (영조4)에 청주에서 이인좌가 밀풍군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를 점령한 후 반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가늘 길에 진천 지방에 다다랐다. 반군이 밀려오자 진천현감은 아무런 군비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니 반군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懸衙를 점령하고는 역도 이지경을 현감에 임명하고 진천 북방을 수비케 하고 서울을 향하여 안성, 죽산 방면으로 북상하여 갔다. 이지경은 현감을 자칭하고 지방 청년들을 잡아다가 반군에 편입케 하고 군량미 명목으로 재산과 곡식을 마구 빼앗아 들였다.
이러한 상황을 본 김천장, 김천주 형제는 아들과 조카가 되는 김성옥과 김성추를 불러놓고 "나라의 형세가 위기에 처했으니 일반 백성이라도 분발하여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忠義가 혁혁한 김씨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비록 국록은 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 때에 앉아만 있겠느냐" 고 말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인솔하고는 현아로 처들어갔다. 당황한 이지경은 뒷 內衙로 피신하고 역졸들은 달려나와 일대 접전을 벌였다. 김천장은 진두에서 큰 소리로 "역적의 괴수놈은 나오너라, 내 너의 목을 베리라" 고 외쳤다. 김천장은 용전분투하며 닥치는대로 적을 후려쳐 수명을 참살하는 동안 각 집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역도들이 몰려들어 矢石을 퍼부어댔다.
이때 김천장은 안부에 관통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싸우다가 쓰러졌다. 그의 아들 김성옥과 조카인 김성추는 김천장이 쓰러진 것을 보고 적군을 막아 싸우며 달려들어가 호위하며 衙門 밖으로 나와 퇴각하였다. 김천주와 성추 성옥등도 반군과 싸우다가 안면이 깨지는등 크게 다쳐 동지와 家童들에게 업혀 집까지 돌아왔으나 김천주와 성추 부자는 그날 밤에 숨지고 성옥은 3일 후에 죽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이들의 의거순절한 사실에 조정에 알려지자 김천장에게는 좌승지를 증직하고 旌閭를 명하는 동시에 祭需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의 아들 김성옥에게는 원종공신에 장사랑을 증직하였으며, 김천주 김성추 부자에게도 각각 증직하고 復戶를 명하였다.
1885년 (고종22)에 김천주와 김성옥, 김성추에게도 김천장의 정례에 倂旌케 하였으므로 이후 4충문이라 칭하였다. 이들이 인솔한 義軍들은 무기가 없어 칼, 도끼, 괭이, 쇠스랑을 들고 적소를 습격하였다고 하여 속칭 "쇠스랑 忠臣"이라고도 한다. <진천군지, 1994>
◇안렴사 김사렴의 10대손인 김천장은 진천읍 사석리에 수대 세거하였으며 영조 술신 이인좌의 난에 형제자질이 일문사충하였다. 그 후손들이 우금 사석리에 세거하고 있다. 전 진천농고교사 金光默과 그제 법원판사 金良默(金良男)의 두 형제와 현충청북도의회의원 金慶會도 그 후손이다.<진천향토지, 1992, 진천상산고적회>
■ 안동김씨사충문
- 위 치 :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 - 관리자 : 김영달(金永達)
- 수 량 : 1동 - 규 모 : 2평 - 재 료 : 맞배지붕 목조기와집 - 시 대 : 조선(朝鮮) 영조(英祖) 12년(1736)
이 정문은 충신 가선대부(嘉善大夫) 김천주(金天柱)와 그의 아우 천장(天章), 아들 성추(聲秋), 조카 성옥(聲玉) 등 4명의 일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가 난(亂)을 일으켜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켰을 때 이지경(李之景)이 이 자칭 진천현감(鎭川縣監)이 되어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때 사석리(士石里) 여사(如沙)마을에 거주하던 김천주(金天柱), 천장(天章)형제가 자질(子姪) 성추(聲秋) 성옥(聲玉) 과 함께 의거할 뜻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무기도 없이 농기구인 괭이·쇠스랑등을 메고 진천현을 탈환하기 위하여 습격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국왕은 정문을 내리고 향제(享祭)케 하였으며, 그 뒤 그의 자질(子姪)인 성추 성옥도 고종(高宗) 22년(1885)에 병정(倂旌)케 하므로써 사충문(四忠門)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들이 싸울 때 쇠스랑으로 용전(勇戰)했다하여 속칭 [쇠스랑]충신이라고도 한다. 이 정문은 맛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그 규모는 2평 정도로 되어 있으며 1958년에 개축(改築) 하였다.
※ 자료: [文化財調書] [文化遺蹟總攬]p. 548 <진천군청 홈페이지>
■ 일문사충사적
34 安東金씨一門西忠史蹟 金在晩 譯 三精版社 1981 2515-125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국립중앙도서관>
목차 創刊辭 = 1 序文 = 9 跋文 = 27 一門四忠案內文 = 29 旌閭門寫眞 = 34 敎旨文 = 35 訴牒 = 37 祝毫 = 41 凡例 = 43 前集八篇英廟朝靖亂當甲年代事 禮川行狀序 = 55 幼學郭來復上疏文 = 91 右上疏文에 對한 批答 = 97 旌門序 = 109 進士辛敦復上疏文 = 119 狀達草 = 143 上啓下達文爲相考事 = 143 觀察使兼巡察使爲相考事狀啓文 = 166 司諫院正言鄭光殷上疏文 = 170 戊申五月初一日官文記錄忠州按武使題草 = 172 癸亥十一月日吏曺爲相考事 = 175
金節士傳 = 179
後集十三篇 其一二篇英廟朝靖亂當甲年代事 揚武討逆 頒敎文 = 209 楊武原從功臣錄券 = 229 其二六篇正廟朝靖亂十六年後甲年代事 御製表忠綸音 = 237 御製詩 = 243 갱進詩 = 247 表忠義典 = 257 諸臣謝上箋 = 261 御製表忠綸音跋 = 269
其三五篇 祭文 = 285 烏川鄭再河 = 287 烏川鄭櫓 = 291 寧原辛仁敦 = 299 挽章 = 305 李洙 = 307 鄭櫓 = 308 羅以夏 = 311 尹和鼎鎭川縣監 = 312 金璉器 = 314 柳商雨 = 315 宋來碩 = 316 柳浹 = 318 宋濂喆 = 319 劉大雅 = 320 閔德麟 = 324 李榮復 = 325 ★金光龍(=?) = 326 李春復 = 327 權榮 = 329 閔正洙 = 330 郭來復 = 331 朴昌明 = 332 金夏相 = 333 朝希愚 =334 鄭櫓追稿 = 335 鄭棹判書 = 336 李衡 = 338 宋允喆 = 339 宋朝杰 = 340 宋宗賢 = 342 金泳 = 343 李挺崑 = 344 李寅景 = 346 步韻 按致宅 = 347 趙尙華 = 349 趙永晦 = 351 韓汝斗 = 352 旌門序高宗乙酉特命加贈竝閭事 = 355 寅善君鄭文源 = 357 工曹參議族孫★好謙(=광기파) = 364 遺稿 = 371 過素沙壬辰戰場 = 373 禮川遺稿 = 375
▣ 솔내 -
▣ 김윤식 -
▣ 김항용 -
▣ 김항용 - 사충문에 모셔져 있는 분들의 후손들께서 이렇게 명인들이 되신 것은 선조님들의 음복이 아닌가 하며 사충문을 더욱 빛나게 함은 앞으로의 후손들에게 큰 복을 준비함이 아닐까합니다.
▣ 김홍묵 -
김천장, 김천주, 김성옥, 김성추 (金天章, 金天柱, 金聲玉, 金聲秋) ( ? - 1728 영조4 )
조선후기 영조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義擧殉節한 충신으로 진천군 문백면 사석리에 있는 4충문 旌閭에 倂旌되고 있다.
김천장과 김천주는 형제로서 안렴사 김사렴의 10세손이며, 김성옥은 김천장의 아들이고, 김성추는 김천주의 아들이니 형제이며 부자간으로 사석리에서 누대를 세거하여 왔다. 본관은 안동이다.
1728년 (영조4)에 청주에서 이인좌가 밀풍군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를 점령한 후 반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가늘 길에 진천 지방에 다다랐다. 반군이 밀려오자 진천현감은 아무런 군비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니 반군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懸衙를 점령하고는 역도 이지경을 현감에 임명하고 진천 북방을 수비케 하고 서울을 향하여 안성, 죽산 방면으로 북상하여 갔다. 이지경은 현감을 자칭하고 지방 청년들을 잡아다가 반군에 편입케 하고 군량미 명목으로 재산과 곡식을 마구 빼앗아 들였다.
이러한 상황을 본 김천장, 김천주 형제는 아들과 조카가 되는 김성옥과 김성추를 불러놓고 "나라의 형세가 위기에 처했으니 일반 백성이라도 분발하여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忠義가 혁혁한 김씨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비록 국록은 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 때에 앉아만 있겠느냐" 고 말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인솔하고는 현아로 처들어갔다. 당황한 이지경은 뒷 內衙로 피신하고 역졸들은 달려나와 일대 접전을 벌였다. 김천장은 진두에서 큰 소리로 "역적의 괴수놈은 나오너라, 내 너의 목을 베리라" 고 외쳤다. 김천장은 용전분투하며 닥치는대로 적을 후려쳐 수명을 참살하는 동안 각 집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역도들이 몰려들어 矢石을 퍼부어댔다.
이때 김천장은 안부에 관통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싸우다가 쓰러졌다. 그의 아들 김성옥과 조카인 김성추는 김천장이 쓰러진 것을 보고 적군을 막아 싸우며 달려들어가 호위하며 衙門 밖으로 나와 퇴각하였다. 김천주와 성추 성옥등도 반군과 싸우다가 안면이 깨지는등 크게 다쳐 동지와 家童들에게 업혀 집까지 돌아왔으나 김천주와 성추 부자는 그날 밤에 숨지고 성옥은 3일 후에 죽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이들의 의거순절한 사실에 조정에 알려지자 김천장에게는 좌승지를 증직하고 旌閭를 명하는 동시에 祭需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의 아들 김성옥에게는 원종공신에 장사랑을 증직하였으며, 김천주 김성추 부자에게도 각각 증직하고 復戶를 명하였다.
1885년 (고종22)에 김천주와 김성옥, 김성추에게도 김천장의 정례에 倂旌케 하였으므로 이후 4충문이라 칭하였다. 이들이 인솔한 義軍들은 무기가 없어 칼, 도끼, 괭이, 쇠스랑을 들고 적소를 습격하였다고 하여 속칭 "쇠스랑 忠臣"이라고도 한다. <진천군지, 1994>
◇안렴사 김사렴의 10대손인 김천장은 진천읍 사석리에 수대 세거하였으며 영조 술신 이인좌의 난에 형제자질이 일문사충하였다. 그 후손들이 우금 사석리에 세거하고 있다. 전 진천농고교사 金光默과 그제 법원판사 金良默(金良男)의 두 형제와 현충청북도의회의원 金慶會도 그 후손이다.<진천향토지, 1992, 진천상산고적회>
■ 안동김씨사충문
- 위 치 :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 - 관리자 : 김영달(金永達)
- 수 량 : 1동 - 규 모 : 2평 - 재 료 : 맞배지붕 목조기와집 - 시 대 : 조선(朝鮮) 영조(英祖) 12년(1736)
이 정문은 충신 가선대부(嘉善大夫) 김천주(金天柱)와 그의 아우 천장(天章), 아들 성추(聲秋), 조카 성옥(聲玉) 등 4명의 일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가 난(亂)을 일으켜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켰을 때 이지경(李之景)이 이 자칭 진천현감(鎭川縣監)이 되어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때 사석리(士石里) 여사(如沙)마을에 거주하던 김천주(金天柱), 천장(天章)형제가 자질(子姪) 성추(聲秋) 성옥(聲玉) 과 함께 의거할 뜻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무기도 없이 농기구인 괭이·쇠스랑등을 메고 진천현을 탈환하기 위하여 습격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국왕은 정문을 내리고 향제(享祭)케 하였으며, 그 뒤 그의 자질(子姪)인 성추 성옥도 고종(高宗) 22년(1885)에 병정(倂旌)케 하므로써 사충문(四忠門)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들이 싸울 때 쇠스랑으로 용전(勇戰)했다하여 속칭 [쇠스랑]충신이라고도 한다. 이 정문은 맛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그 규모는 2평 정도로 되어 있으며 1958년에 개축(改築) 하였다.
※ 자료: [文化財調書] [文化遺蹟總攬]p. 548 <진천군청 홈페이지>
■ 일문사충사적
34 安東金씨一門西忠史蹟 金在晩 譯 三精版社 1981 2515-125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국립중앙도서관>
목차 創刊辭 = 1 序文 = 9 跋文 = 27 一門四忠案內文 = 29 旌閭門寫眞 = 34 敎旨文 = 35 訴牒 = 37 祝毫 = 41 凡例 = 43 前集八篇英廟朝靖亂當甲年代事 禮川行狀序 = 55 幼學郭來復上疏文 = 91 右上疏文에 對한 批答 = 97 旌門序 = 109 進士辛敦復上疏文 = 119 狀達草 = 143 上啓下達文爲相考事 = 143 觀察使兼巡察使爲相考事狀啓文 = 166 司諫院正言鄭光殷上疏文 = 170 戊申五月初一日官文記錄忠州按武使題草 = 172 癸亥十一月日吏曺爲相考事 = 175
金節士傳 = 179
後集十三篇 其一二篇英廟朝靖亂當甲年代事 揚武討逆 頒敎文 = 209 楊武原從功臣錄券 = 229 其二六篇正廟朝靖亂十六年後甲年代事 御製表忠綸音 = 237 御製詩 = 243 갱進詩 = 247 表忠義典 = 257 諸臣謝上箋 = 261 御製表忠綸音跋 = 269
其三五篇 祭文 = 285 烏川鄭再河 = 287 烏川鄭櫓 = 291 寧原辛仁敦 = 299 挽章 = 305 李洙 = 307 鄭櫓 = 308 羅以夏 = 311 尹和鼎鎭川縣監 = 312 金璉器 = 314 柳商雨 = 315 宋來碩 = 316 柳浹 = 318 宋濂喆 = 319 劉大雅 = 320 閔德麟 = 324 李榮復 = 325 ★金光龍(=?) = 326 李春復 = 327 權榮 = 329 閔正洙 = 330 郭來復 = 331 朴昌明 = 332 金夏相 = 333 朝希愚 =334 鄭櫓追稿 = 335 鄭棹判書 = 336 李衡 = 338 宋允喆 = 339 宋朝杰 = 340 宋宗賢 = 342 金泳 = 343 李挺崑 = 344 李寅景 = 346 步韻 按致宅 = 347 趙尙華 = 349 趙永晦 = 351 韓汝斗 = 352 旌門序高宗乙酉特命加贈竝閭事 = 355 寅善君鄭文源 = 357 工曹參議族孫★好謙(=광기파) = 364 遺稿 = 371 過素沙壬辰戰場 = 373 禮川遺稿 = 375
▣ 솔내 -
▣ 김윤식 -
▣ 김항용 -
▣ 김항용 - 사충문에 모셔져 있는 분들의 후손들께서 이렇게 명인들이 되신 것은 선조님들의 음복이 아닌가 하며 사충문을 더욱 빛나게 함은 앞으로의 후손들에게 큰 복을 준비함이 아닐까합니다.
▣ 김홍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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